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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플마 Jan 29. 2023

아내는 용감했다

제주공항 탈출기

난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저런 사람이 내 아내일리가 없어. 내 아내가 얼마나 얌전한 사람인데. 저런 몰상식한 행동을 할리가 없지.'

하지만 내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 사람은 분명히 아내였다.

자그마한 체구의 가녀린 여인 하나가 항공사의 발권 창구 데스크 위로 소리를 지르며 넘어가고 있었다. 잠시 안쪽에서 뭔가 실랑이가 있는 듯하더니 상황은 금방 종료되었고 그 여인 손에는 탑승권이 쥐어져 있었다.

2003년 태풍 매미가 왔을 때 제주공항에서의 일이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며칠 전 뉴스를 보니 폭설과 강풍으로 비행기 운항이 취소되어 제주공항에 발 묶인 관광객들이 비행기 대기표를 받으려 소동을 벌이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이를 보니 비슷한 경험을 했던 태풍 매미 때의 일이 생각났다. 아울러 당시의 아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내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내의 행동이 우스꽝스러워서가 아니라 사랑스러워서이다. 아내의 어디에 그런 투사적인 모습이 숨겨져 있었을까?


2003년 가을 우리 세 식구는 추석 연휴를 이용하여 제주 여행을 갔었다. 태풍 예고가 약간 걱정되기는 했었지만 난 당시에 휴가 같은 것은 꿈도 못 꾸는 바쁜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던 터라 모처럼만에 만들어진 가족 여행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태풍이란 것은 수시로 있는 것인데 큰 문제가 있으랴 하는 안일함도 있었고, 태풍이 오기 전에 우리는 제주를 벗어날 수 있을 듯도 했었기에 태풍에 대해서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었다. 그저 편안한 휴식만을 즐기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역대 최강급의 태풍 매미가 올라오면서 우리 여행은 하마터면 악몽으로 변할뻔했었다. 돌이켜보니 이 여행에서 경험한 맛집과 관광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고 아찔했던 기억들만 남아있다. 따라서 이 여행에 '추억의 가족 여행'이란 정감 어린 단어를 붙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이 여행은 내게 '가장 기억되는 가족 여행'이라는 것이다. 이 여행을 통해서 내가 모르고 있었던 아내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데스크를 전투적으로 뛰어넘던 아내의 당시 행동은 결과적으로는 매우 현명한 결단이었으며 아내의 이런 모습에 내 사랑도 더 깊어졌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보는 아내의 이미지는, 외모상으로는 아주 연약해 보이고 성격은 마냥 착하기만 하여 남들과 자그마한 실랑이도 못할 것 같은 타입이었다. 따라서 남들과 부딪히며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보살펴줘야만 할 듯한 사람이었다. 그랬었는데 그때 제주공항에서 본 아내는 전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위기 상황에서는 우리 가족을 적극적으로 보살펴 줄 수 있는 강인함과 현명함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살아온 나날들을 돌이켜보면 아내는 실제로 그런 사람이었다.




아내와 나는 서귀포의 어느 한 호텔에서 저녁 뉴스를 보며 고민을 하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매미'라는 태풍이 어마어마한 기세로 제주를 강타할 것이며 내일 오후부터는 모든 비행기 운항이 중단되고 며칠 후에나 운항이 재개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비행기는 모레인데. 자칫하다가는 제주에 발 묶인 난민이 되어 버리겠네. 회사에 중요한 회의가 있는데 제 때 복귀못하면 큰 일인데.'

하지만 마냥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결정을 내렸다.

'내일 새벽에 제주 공항을 가서 비행기표를 구해보자.'


그렇게 우리는 다음날 일찍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이 엄청 많았는지 공항은 이미 북새통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당장 떠나는 비행기 표는 구할 수가 없었고 대신 대기표라는 것을 받았다. 이는 비행기가 출발하기 직전 빈 좌석수만큼 대기 승객으로 채우는 데 사용되는 순번표였다. 우리의 순번을 보니 당일 중으로 제주를 탈출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더구나 그날 비행기 운항은 오후 2시 30분 정도에 마감을 할 것이라는 예고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불안해했었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는 모든 것을 운에 맡기고 발권 카운터 앞에서 죽치고 앉아 우리 번호가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번호를 불렀을 때 빨리 대답을 안 하면 곧바로 다음 번호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은 너무나 소란스러워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기에는 마땅치 않았다. 아무래도 장기전으로 가야 할 듯하여 우리 가족은 공항의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고, 카운터 앞에서의 대기번호 호명은 아내가 전담하기로 하였다. 난 아이가 심심하지 않도록 돌보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장시간 그러다 보니 지루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여 가끔씩 카운터 쪽 아내에게 가보곤 했었다. 그러던 중 시간은 2시 30분쯤이 가까워져 있었고 이번에 탑승권을 받지 못하면 무조건 며칠 더 제주도에 발이 묶이게 될 상황이었다. 우리만이 아니라 모두들 다 그래서였는지 카운터 앞은 한층 더 소란스러웠었다. 마침 내가 카운터 쪽에 도착했을 때 뭔가 우리 번호 비슷한 호명이 들렸던 듯한데 너무나 시끄러운 소음에 묻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난 대답을 해야 하나 망설이며 아내를 찾고 있었다.

'우리 번호였으면 아내가 대답했겠지.'

하며 난 아마도 우리 번호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항공사 직원은 역시나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번호를 재차 부르고는 대답이 없자 다음 번호로 넘어갔다. 그 순간이었다. 카운터 데스크 위로 넘어가는 여자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그리고 얼마의 실랑이 후에 탑승권을 손에 들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본 것은.

나중에 아내에게 물어보니, 아내도 우리 번호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긴가민가하다가 조금 늦게 대답을 하기는 했는데 소음에 묻혀서 직원이 못 들은 모양이었다고. 여전히 우리 번호인지 아닌지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확인이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카운터 안쪽으로의 돌진을 시도했다고. 어물쩍 거리다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사람들의 장벽과 직원의 제지가 거세기는 했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기약 없이 무조건 제주에 발이 묶일 것이므로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주 몰상식하게 보일 법한 행동이었지만 아내의 이 순간적인 결단과 행동은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으며 덕분에 우리 가족은 무사히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만약 내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점잖게만 행동을 하려다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위의 상황들이 아주 찰나에 일어났고 그 비행기가 그날의 마지막 비행기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내의 순발력이 얼마나 현명했었는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다.




당시의 제주 공항 탈출기를 회상하다 보니 몇 가지 에피소드들이 더 생각난다. 아주 아찔아찔했던 순간들이지만 지금은 가볍게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날의 우여곡절들은 이렇다.


자, 드디어 가까스로 탑승권을 확보하였다. 우리는 무사히 제주 공항을 탈출할 수 있었을까? 사실은 탑승권 획득 후 비행기를 타기까지의 10여분 사이에 더 악몽 같은 일을 겪었다. 아내와 내가 아이가 있었던 장소로 돌아왔을 때 아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비행기를 타고  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혼잡한 공항 터미널에서 6살짜리 아이가 길을 잃었거나 아니면 유괴를 당한 것은 아닌 하는 별의별 생각들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우리는 당황스러웠지만 우선 아이가 있던 곳과 카운터 사이를 집중적으로 찾아보기로 하였고, 다행스럽게도 카운터 근처에서 아이를 찾았다.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엄마 아빠를 찾아보겠다고 나섰던 것이었다. 만약 아이를 10분 내에 찾지 못했다면 아내가 전투적으로 획득해 온 탑승권은 무용지물이 될 뻔했다. 아이를 지키기로 했던 내가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한 탓이었다.


내 잘못은 하나가 더 있었다. 서귀포에서 제주 공항까지 갈 때 내가 길을 잘못 선택하여 하마터면 산속 길에서 재난을 당할뻔한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뉴스를 보니 해안 쪽 도로들은 벌써 강풍의 영향권 내에 들어서고 있었기에 난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택했다. 이 도로가 지도상으로 거리가 훨씬 짧아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문제는 한라산을 넘어 공항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산턱에서 도로로 쏟아져 들어오는 물줄기가 강해지는가 싶더니 간간히 침수된 도로도 나타난 것이다. 머뭇머뭇하다가 이 산길을 제때 벗어나지 못하산속에서 조난을 당할 듯한 생각이 들었고 내 운전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저 앞쪽의 길은 괜찮을런지도 걱정이었다. 아무튼 무사히 공항에 도착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나의 판단 착오 하나로 온 가족이 생고생할 뻔했던 순간이었다.


내가 실수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내를 보살피는 든든한 남편 역할을 하려 노력한 순간도 있었다. 그것은 비행기를 탄 이후였다. 바람이 세차서인지 비행기는 활주로에서부터 벌써 흔들림이 느껴질 정도였다. 과연 이륙은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진짜 문제는 비행기가 이륙한 후 발생했다. 비행기가 좀 뜨는가 싶다가 갑자기 푹 가라앉는 느낌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마치 바이킹 놀이기구에서 자유낙하하는 순간의 거북함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비행기가 그대로 추락할 것 같은 아찔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내는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사실 나도 겁이 났었지만 아내를 돌봐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난 의연하게 말했다.

'전문가들을 믿고 안심하자구. 위험하면 비행기를 이륙시켰겠어? 안전하다고 판단되니까 비행기를 띄운 거겠지.'

이러한 나의 토닥거림이 과연 아내에게 안도감을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무사히 서울에 도착했다. 그런데 서울의 하늘은 태풍의 조짐이 전혀 없었 오히려 아주 맑은 가을 하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름답기조차 한 이러한 하늘을 보자니 그날의 고생들은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졌고 우리는 편안한 평화로움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아내의 현명하고 순발력 있는 '돌진'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은 편안한 집이 주는 행복감 대신에 강한 비바람 속 제주에서 난민 같은 불편함을 계속 겪었을 것이다.

당시의 그 제주 여행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아내는 용감했다'이다. 위기 상황에서 안절부절함 대신에 문제해결 능력을 보여준 아내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성과이자 추억거리이다. 그저 착하기만 하고 나약해 보여 남들에게 무조건 치일 듯한 아내로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면에 '강한 결단력과 순발력'을 숨겨두고 있었던 아내였던 것이다. 지금도 아내는 여전히 착해 보인다. 아니 실제로 아주 착하다. 그래서 아주 유약하지 않을까 오해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함께 살아온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면, 아내는 필요할 때는 여지없이 강한 결단력과 추진력을 보여줬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이 그리고 내가 이 순간 이렇게 편안하게 살고 있는 듯하다.


(2023년 1월 2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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