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시현상

by 서향록

그녀는 떠났다. 아무런 악의 없이, 조만간 또 보자는 막연한 약속을 남긴 채.

책상 위에는 영문판 『카프카의 변신』이 남아 있었고, 그녀의 자기소개 속 스쳐 지나가던 직업 이름들과 현재의 거주지만으로도 그녀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라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가볍게 나열해 놓은 삼십 년의 타임라인. 그 옆에서 나는 나의 서른다섯 해를 머릿속에 펼쳐보았다.


‘난 뭐했지?’


화려한 빌딩 숲 건너편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과 기와집.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 지붕들 아래에 서 있었다.

그녀가 얼마 전 떠나왔다는 도시를 떠올리며 역광 속 자유의 여신상을 아련하게 올려다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봤다.


‘나도 오늘 돌아갈 집이 대치동이라면?’
‘나도 맨해튼에서 버스킹을 듣고 자랐다면?’
‘나도 뉴저지에서 뺨 맞고 허드슨강에서 눈흘기며, 자유의 여신상에게 화풀이했다면?’


내가 겪어보지 못한 남의 조건과 환경을 떠올리는 일은 생각보다 푹신했다.

그렇게 잠시 가본적도 없는 뉴욕을 머릿속으로 감상하는데, 갑자기 아득히 높고 눈부신 자유의 여신상이 말을 걸어왔다.


“오늘 약속이 취소됐어요. 저녁에 시간 괜찮으세요? 종로3가 포장마차에서 꼼장어에 소주 마시고 싶어서요.”


나는 잠시 멍해졌다. 저 높이 타오르던 횃불이 과연 포장마차의 은은한 불빛 아래 앉고 싶어 할까? 게다가 꼼장어에 소주라니...


우리는 잔을 부딪혔다. 우연히 검정치마 이야기가 나왔다. 목구멍으로 흐르는 소주에 의해 토크의 혈이 트이자 그녀의 빌딩도, 나의 초가집도 양념 가득한 꼼장어처럼 잘게 썰려 포장마차 연기 속으로 흩어졌다. 시간은 어디론가 미끄러졌고 우리는 같은 취향의 철로 위에서 밤새 나란히 달렸다.


그녀와 연인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몇 번이고 포장마차에서 다시 만나 취향을 공유했다.
나는 지금의 관점으로 그때의 ‘만약'속에 나를 대입해보았다.


‘나도 오늘 돌아갈 집이 대치동이라면?’
-차는 막히고, 어린이 보호구역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주차 자리는 늘 부족하고, 엘리베이터 앞 학원 가방을 멘 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올라가며 “이 동네를 빨리 뜨던가 해야지"라며 투덜거렸겠지.


‘나도 맨해튼에서 버스킹을 듣고 자랐다면?’
-마치 내가 가수 ‘10cm’처럼 되었을 거란 어처구니 없는 환상을 가졌겠지.


‘나도 뉴저지에서 뺨 맞고 허드슨강에서 눈흘기며, 자유의 여신상에게 화풀이했다면?’
-경쟁과 인종차별이 난무하는 곳에서 자랐다며 부모를 원망하다가 괜히 애꿎은 자유의 여신상에게 욕이란 욕은 퍼부었겠지.


나는 분명, 어디에 놓이든 그 환경에 맞게 불평을 늘어놓을 것이다. 수많은 당연함을 딛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남이 가진 안락함을 찾아내 굳이 나와 비교하면서.


‘나도 그랬다면’이라는 말은 이제 여기까지만 하기로 한다.

월요일 연재
이전 05화필름 사진을 비하하는 이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