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쩌다가 독산동에
독산동에 처음 발을 들인 건 한여름이었다. 중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인턴을 구하겠다며 형이 살던 집에 얹혀 지내기로 했다. 중국에 가기 전 학생일 때는 동작구 상도동에서 형과 함께 둘이 살았다. 각자 살 집을 구하기엔 부담이 크다는 걸 알아서, 적당한 위치에서 둘이 같이 사는 게 어떻겠냐는 부모님의 뜻에 큰 불만 없이 따랐다. 발품을 열심히 팔아 구한 1.5룸은 둘이 지내기에 충분히 넓어서 좋았다. 구옥이라 감안해야 하는 불편함은 당연히 있었다. 기본 옵션이 거의 없었고, 엘리베이터도 없던 4층인 데다 에어컨은 타공을 안 해서 창문 옆으로 선을 빼야 했다. 그리고 그 틈으로 여름에 심심하면 모기들이 드나들었다. 물론 형은 회사와 거리가 있어서 조금 더 불편해했다. 그리고 나와의 생활습관도 맞지 않아서 우리는 종종 사소한 것들로 부딪혔다. 예를 들면 한 명은 술을 먹지 않는데 공동 생활비로 맥주를 샀을 때 부딪히는 그런 사소한 갈등이었다. 그래도 넓은 방과 넓은 화장실 덕분에 상도동의 그 4층 1.5룸은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2년 계약이 끝날 즈음 나는 중국에 갔다. 중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는 4개월 사이에 형은 회사 근처에 새로운 집을 얻었다. 중국에서의 생활을 슬슬 마무리하던 5월의 어느 날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형이 이사 간 곳은 어때?" "수납공간이 많아서 좋을 것 같은데~ 조금씩만 양보하면 둘이 잘 살 수 있을 거야." 대답이 어딘가 찜찜했다. 우리 엄마는 긍정적인 사람이라 장점을 이야기하는 데에 능한 사람인데, 엄마 입에서 나온 '조금씩만 양보하면'이라는 말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집을 구할 건데 원하는 조건이 있냐고 형이 물어봤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졸업할 때까지는 같이 살기로 했던 터라 형이 나에게도 물어보았던 것인데, 그 시기가 내가 중국에 막 도착한 때여서 그렇게 깊이 고민할 정신이 없었다. 대충 고민하다가 집이나 화장실 중 하나만이라도 넓고, 학교까지 30분 정도 걸렸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대충 어딘가에 뭉개졌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돌아온 6월 말, 인턴을 구할 동안은 서울에서 지내겠다며 형이 보내준 집 주소로 향했다. 금천구 독산동. 이름조차도 생소한 동네에 도착한 나는 엄마의 대답에 묻어있던 찜찜함을 그제야 확인했다. 슈퍼싱글 침대 옆에 바닥에 한 명이 겨우 누울 수 있는 5평 남짓한 방, 그나마도 서랍이나 옷장을 열려면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은 일어나야 했다. 신발장 양 옆으로 인덕션과 화장실 문이 있어서 요리를 하려면 내 신발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문이 끝까지 채 열리지 않는 화장실과 24시간 해가 들지 않는 맞은편 빌딩의 에어컨 실외기 뷰. 형의 회사까지 걸어서 30분이 걸리고, 근처 가장 가까운 역까지 걸어서 15분이 걸리는 참 애매한 거리. 우리 학교까지는 50분이 걸렸다. 엄마 말도 맞았다. 수납공간은 참 많았다. 그 좁은 방에 쓸데없이 수납공간만 참 많았다. 내가 누워야 하는 바닥 옆에 3단 서랍장이 있었는데, 가장 위칸은 형의 옷이 들어있었고, 나에게는 주어진 가운데 칸에는 나의 옷. 그리고 제일 아래 칸에는 형이 사둔 보드게임 몇 가지가 있었다. 그 옆 책상 서랍에는 대충 먹을만한 간식들과 갖가지 선들이 있었고 옷장은 2개 층으로 나뉘어있어서 형과 나의 겉옷을 각각 나누어서 보관했다. 그리고 머리 위치에 있던 벽장을 열면 형의 사적인 물건들이 차있었다. 그 집의 수납공간을 열면 형의 서울 생활이 어땠는지 대략 유추할 수 있었다.
내가 그 집에 들어간 이후에, 조금씩 양보하면 잘 살 수 있을 거라던 엄마 말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형이 출근 준비를 하면, 옷을 꺼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 머리맡에서 요를 밟고 서 있는 형의 기척을 느끼면서 자는 척했다. 형은 그렇게 좋아하는 게임을 일찍 출근해야 하는 동생 때문에 자정이 넘으면 눈치를 보면서 해야 했다. 서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삶은 행복할 수 없었다. 종종 갈등이 생겼다. 이전의 갈등들과 똑같았어도 감정이 달랐다. 내가 말했던 조건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하고 장점 하나 없던 그 집에 살아야 하는 나는 그 집 자체가 불만이었고, 형은 얹혀살면서 불만만 내뱉는 내가 불만이었다. 평택에 내려가기라도 하면 부모님은 우리가 내뱉는 서로의 험담을 쉬지 않고 들어주셔야 했다. 형과의 벽은 점점 두꺼워졌고 내 말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렇게 우리는 두껍고 날카로울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