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하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는 것은
8월에 형이 갑자기 집을 떠났다. 신혼집을 구해야 했던 형은 1년 반이라는 계약 기간이 남은 그 집을 나에게 맡겨둔 채로 떠났다. 모든 게 갑작스러웠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삶을 얻어맞은 듯 살아야 했던 형과 부모님이 가장 갑작스러웠겠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집을 반강제로 맡게 된 나도 갑작스러웠다. 나에게 남겨진 1년 6개월이란 기간은 뭐랄까 장난처럼 던지는 허무맹랑한 농담 같았다. 현실이 너무 싫었지만 차마 원망할 수 없었다. 형과 부모님에게는 이미 더 급하고 중요한 일들이 많았다. 싫은 건 싫은 것이고, 가족은 가족이었다. 형이 새 삶을 준비해야 하는 과정에 짐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 짧은 순간에 나도 모르게 약간은 철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마음을 바꾸었다. 낯설고 미운 그 집과 독산동에 정을 붙이기로.
싫어하는 걸 좋아해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싫어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경우에는 더욱 어렵다. 상황이 어떻고 내 마음가짐이 어떻게 달라졌든, 나는 차마 그 공간을 집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형이 있을 때도 그랬지만 형이 떠난 후에도 그 집에서는 마음이 불편했다. 마음이 불편한 공간이 내 집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싫었다. 집을 나서야 왠지 모르게 마음 한편이 편안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는 그 길이 조금 더 멀어지길 바랐다. 필요하지 않다면 집에 있기 싫었기 때문에 더더욱 내 취향의 공간을 찾아야 했다. 독산동은 여전히 낯선 동네였고, 어떤 공간이 있는지조차 알 방법이 없어서 무작정 걸어 다녔다. 길이 익숙해지니 가게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왔다. 멍하니 걷다가 뻔하지 않은 이름과 간판이 보이면 검색부터 했다. 나보다는 독산동이 더 익숙한 사람들의 후기들을 길잡이로 삼았다. 그렇게 발견한 카페와 펍 몇 군데는 소중한 도피처가 되어 내 여유 시간을 나누어 차지했다. 특히 집 근처에 있던 리온즈펍은 턱수염을 멋지게 기르신 사장님이 이방인이었던 (그 집에서 지낸 시간 내내 나는 스스로가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편견 없이 맥주 한 잔을 건네주는 곳이었다. 편견이 없는 곳은 마음이 편했다. 나는 그 집에서 자기혐오가 시작될 때면 지체 없이 노트북을 들고 그 펍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스스로조차 가지고 있던 편견도 잠시 잊혔다. 리온즈펍은 독산동과 그 집 깊은 곳까지 뿌리 박힌 나의 편견이 잠시 사라지는 곳이었다.
마음이 편해지는 곳을 찾고 난 후로 마음이 살짝 열렸다. 가까운 곳에 쉴 공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집에 있는 시간이 견딜 만 해졌다. 예전엔 집에 가는 게 싫어서 퇴근이 싫은 날도 많았는데, 처음으로 집으로 퇴근하는 게 즐거웠다. 물론 그 집은 여전히 싫었다. 사실 달라진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몇 시간을 치워도 지저분해 보이는 집도 그대로였고, 정신 나간 옆집 남자도 그대로였다. 문만 열면 들리는 공사 소리도 똑같았다. 단지 내가 독산동에 익숙해졌을 뿐이었다. 그렇게 내가 싫어하던 것들을 하나씩 좋아하게 됐다.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