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변변찮은데 글을 써도 될까요.
자격미달인가 싶어서
오늘의집이나 브런치를 둘러보면 작가 소개글에 'n년 차 마케터', 'OO디자이너의 OOO'이라는 멘트와 종종 마주친다. 소개에 직업을 키워드로 달고 있는 글들은 뭔가 읽기도 전부터 감각적이고 결이 다르고 트렌디할 것만 같다. '오... 마케터라면 남들과는 시각이 남다를 테니 글 쓰는 감각도 남다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필터인지 콩깍지인지 모를 것이 씌인다. 그러다 문득 블로그에 적힌 내 소개를 보았다. 직업도 취향도 아닌 '뭐랄까' 딱 세 글자만 적혀있다. 작가에 대해 아무것도 유추할 수 없는 소개다. 편견 없이 내 글만 봐주길 바라서 의도한 바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소개가 뭐랄까 소개가 아닌 것이다.(내 블로그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뭐랄까' 세 글자를 보고 나를 뭐라고 생각하려나.) 그리고 얼떨결에 브런치 작가가 된 날, 내 소개를 다시 작성하는 순간을 맞이했다. 직업을 키워드로 고를 수 있길래 쭉 살펴보다가 내 직업이 참 애매하다고 느꼈다. 부차적인 설명이 없으면 무슨 업종에서 일하는 지조차 잘 모르는 직업 미디어 플래너. 브런치 키워드에도 없어서 그나마 비슷한 마케터를 선택한 애매한 직업. 그 애매함에서 자라난 억울함이 꼬리를 물고 물다가 문득 '직업이 시원찮으면 글도 못 쓰겠네' 라며 서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진짜 찌질함과 열등감의 극치가 따로 없다. 서럽기까지 할 때쯤 다시 원래의 고민으로 돌아가서 나는 나를 무엇으로 소개해야 하나 걱정이 덜컥 생겼다. 내 직업은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알려줘도 그리 재미나지 않은데, 글을 쓰기 위해서 지금 당장 잘 다니던 중견 외국계 광고대행사(키워드를 위해 구체적으로 적었다)를 때려치우고 귀농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글이 문제가 아니라 나를 소개할 거리가 없어서 글을 못 쓰는 걸까. 과장을 섞어서 직업이 없거나 변변찮은 사람은 글 쓰기 전부터 불리한 것일지도 모른다. 진짜 평범한 사람들 서러워서 살겠나. 그렇다고 해서 감각적이지도 않고 결이 달라 보이지도 않는데 너의 글을 누가 읽어줄 것이냐고 누군가 따져 물으면 나도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근데 뭐 어쩌겠어. 나도 글을 써보고 싶은 걸.
같은 이야기를 예전에 함께 나눈 친구가 있다. 우리 집이 예쁘다면서 오늘의집에 올려 보라고 하다가 요샌 직업 없으면 오늘의집도 못한다며 같이 억울해했다. 마케터의 집은 뭔가 트렌디할 것 같고 미디어플래너나 계약직 MD의 집은 재미없어 보이는 건 아닐까? 아무튼 아주 열등감에 가득 차서 언젠간 이 제목을 주제로 책을 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업이 없거나 변변찮아서 글을 써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드는 친구들 몇을 모아서 변변찮은 삶을 담은 재미없어 보이는 책. 약간 제목은 적당히 후킹하면서도 관심 있어 보이게 생겼는데 서점에 놓이면 좀 집어 들고 싶게 생기지 않았나? 벌써부터 서점에 깔릴 생각부터 하다니 진짜 김칫국 아주 시원하게 마시고 있다. 당연히 장난이고 정말 만에 하나 잘되면 직업 때문에 글을 쓸 용기를 내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바이블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