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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로운 Nov 05. 2022

아버지의 이력서를 읽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카톡이 와있었습니다.


'잡코리아 이용해봤어?'


정년퇴임을 한 달 앞두시고서, 아버지가 잡코리아에 이력서를 등록하려는데 잘 안되는 것 같으니 봐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머니께는 비밀로 해달라는 말씀도 덧붙여서요.

평소에 살갑지 못한 편이라 사소한 부탁은 종종 미루기도 했는데, 이번 부탁은 빨리 들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력서'


딱 1개 저장되어있던 이력서의 제목이 '이력서' 였습니다.

제목만큼 내용도 투박했습니다. 아버지의 36년 가까이 되는 경력이 4줄 정도로 적혀있었어요. 겨우 4년 넘긴 경력으로 만든 제 이력서는 몇 페이지씩이나 되었는데, 그에 비해면 아버지가 만들어두신 이력서는 초라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10년 정도의 주기로 부서 이동을 하셨던 아버지의 이력들은 부서별로 한 줄 남짓한 분량이었습니다. 파헤쳐보면 훨씬 넓은 범주의 업무들이 단어 하나 정도로 축약되어 있었어요. 줄마다 끝에 괄호로 붙은 (10년), (13년)이라는 경력과 아버지 직책이 아니었다면 사회초년생의 이력서로 착각했겠다 싶었습니다.



경력기술서 아래에는 자기소개서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자기소개서는 36년의 경력기술서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잡코리아의 자기소개서 양식은 자유양식이다 보니, 제목과 내용을 적을 수 있게 되어있더라구요. 아버지의 자기소개서에는 딱 2가지만 있었습니다. 가족사항과 업무자세.

가족사항은 가족 구성원 소개와 아들 자랑이 끝이었습니다. 업무 자세에는 아버지의 취미인 등산을 녹여낸 앞으로의 각오가 담겨있었구요. 제가 살아온 것보다 더 긴 36년이라는 시간동안 일을 해오시고서, 두 번째 일상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소개하고자 고르신 내용이 가족 자랑과 본인의 각오였어요. 이 두 가지가 지금 아버지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나봅니다.



아버지의 이력서를 보는 내내 코 끝이 찡했습니다. 환갑의 나이에도 잡코리아라는 플랫폼을 이용하시겠다고 아들에게 도움을 청한 것부터, 36년 경력이 몇 줄 정도로 요약되어있던 경력기술서, 그리고 자기소개서 내용까지 모두 어설펐어요. 그런데 그 어설픔 때문에 더더욱 목이 메었습니다. 형식은 투박하기 짝이 없었어도, 아버지의 마음이 이렇게 진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거든요. 아버지의 이력서에는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중요해진 것들과 앞으로의 시간을 준비하는 마음만 담겨있었습니다.



앞으로 아버지가 어떤 직장을 구하실지, 어떤 직업을 갖게 되실지도 아직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려야겠습니다. 떨어져산다는 핑계로,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도 제 때 안받는 못난 아들이지만, 아버지가 이력서에도 쓰실 정도로 자랑인 아들이니까요. 그리고 아버지는 환갑에도 우리 세대의 방식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시는 분이시니까요.


글을 쓰는 내내 목이 메었습니다. 이제 아버지 이력서에서 고칠 점을 좀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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