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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로운 Oct 23. 2022

여행을 가려고 그만둔 건 아닌데(6)

런던 - 온전히 런던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에 한 것들


6일차, 

  런던에서 온전히 보내는 마지막 하루를 맞았지만 정해둔 일정은 여전히 없었다. 구글맵에 뭐라도 저장해뒀을까 싶어 살펴보다가, 보로 마켓이라는 곳을 발견했다. 마켓이라길래 빈티지마켓이라면 그만 봐도 될 것 같아서 여차하면 넘길 요량이었다. 근데 사진들을 보니 치즈, 고기, 과일 매대 사진이어서 호기심이 생겼다. 식료품 시장은 또 처음이어서 구미가 당겼고, 그렇게 보로 마켓으로 첫 행선지를 정했다. 

  보로 마켓으로 가는 길에 며칠 전 은성이 형이 추천해준 식당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숙소에서 거리가 좀 있어서 서둘러 움직였다. 도착해서 보니 식당 외관은 평범했다. 허름하다기엔 꽤 멀쩡하고, 그렇다고 대단히 깨끗하지도 않은 그런 2층짜리 가게였다. 그럼에도 이미 식당 안에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있어서 믿음이 가는 식당이었다. 1층 카운터에 주문을 하려했더니, 먹고 갈 거면 2층으로 올라가서 서버 안내를 받으라며 나를 올려보냈다. 올라가서 만난 2층의 서버분은 적당한 친절함으로 편한 자리에 앉으라고 안내했다. 편한 자리라면 구석 자리만한 게 없어서 늘 그렇듯 구석자리에 앉았다.(사실 창가 자리에 앉으려 했는데 이미 선점당했다.) 주문을 받으러 온 웨이터에게 잉글리시 브렉퍼스트와 오렌지 주스를 시켰다. 음식이 나오는 속도는 꽤 빨랐다. 한 10분 기다렸을까. 근데 양이 좀 어처구니 없었다. 첫날 핌리코 프레시에서 먹었던 잉글리시 브렉퍼스트와 그릇 크기부터 달랐다. 그릇이 일단 피자스쿨 피자 한 판 크기였다.(크다는 뜻) 그릇 크기야 뭐 그럴 수 있다쳐도 그 그릇이 음식으로 꽉 차 있었다. 소시지, 계란, 베이컨 4줄, 베이크드빈, 해시브라운, 구운 버섯이 그릇을 가득 채웠고, 토스트 빵은 또 다른 접시에 4조각이 따로 담겨서 나왔다. 내가 먹는 양이 많이 줄은 탓도 있지만 정말 그 한 그릇을 비울 자신이 없었다. 사진을 냅다 찍고서 이게 1인분이 맞냐고 스토리로 올렸더니 동진이 형을 비롯한 여러 대식가들이 1인분이라고 답장했다. 은성이 형이 추천한 이유도 양 때문인가 싶었다. 예상대로 그릇을 비우지는 못했지만, 음식들은 충분히 훌륭했고 베이컨이 내가 먹어보던 베이컨과는 다른 식감의 괜찮은 베이컨이었다. 당연히 토스트는 4개 중 1개만 먹었다. 토스트까지 다 먹었다면 관광은 커녕 배 꺼질 때까지 그냥 걸어다니다가 숙소에서 뻗었을 터였다. 난 배가 꽉 차면 움직이기 불편해지는 그 기분을 너무 싫어하기 때문에, 양 조절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22살 때 군대 선임이었던 익환이 형도 그런 느낌을 싫어한다고 말한 게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이런 느낌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나말고도 꽤 있는 듯 하다. 배가 부를 때 앉아있거나 누워있으면 몸이 앞으로 자연스럽게 굽어지는데, 옛날부터 나는 배가 부를 때 몸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굽어지는 느낌을 싫어했다. 배가 꽉 찬 느낌이 들면 몸이 앞으로 자연스럽게 굽어지는 그 상태에서 몸을 피면 불편하다. 아무튼 그 아침식사를 다 먹으려면 먹었겠지만 다 먹는 게 오히려 마이너스일 것 같아서 빵은 남겼다. 식사를 마치고선 담당 서버가 계산서를 가져다주길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서버가 내 테이블로 와서는 접시를 치워줬는데, 정작 접시만 치우고나선 계산서를 따로 가져다주질 않았다. 그래서 곧 가져다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마저 기다렸다. 속으로는 신경을 너무 안 써주는 것 같아서 살짝 조급해지고 있었다. 웨이터와 눈을 딱 마주치자마자 계산서 달라했더니 그제서야 1층 카운터에 테이블 번호 말하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어떤 곳은 계산서를 받아서 테이블에서 계산해야하고, 어디는 카운터 가서 직접 계산해야하고, 계산하는 방식이 헷갈렸다. 그래도 멋 없어 보이지 않으려면 최대한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제일 나을 것 같다고, 그래서 기다리길 잘했다며 위안을 삼았다. 

  원래라면 아침을 먹자마자 바로 보로 마켓을 구경할 계획이었다. 밥을 먹으면서 지도를 보니 일요일에 못 갔던 영국도서관이 근처에 있길래 들렀다 가기로 했다. 영국도서관은 세계에서 제일 중요한 학술도서관 중 하나라고 한다. 영국 국립 도서관의 대우를 받게 된 건 얼마 안되지만, 뿌리를 타고 올라가면 1700년대부터 이미 제대로 된 도서관의 역할을 해왔고, 수집품 가치가 워낙 높아서 유명한 곳이었다. 비틀즈 자필 가사부터 영국 근대 헌법 기초 문헌이 된 마그나 카르타, 기원전 300년 전 문헌까지 보관하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겉모습이 꽤 세련된 대학 건물처럼 보여서 한 번 놀랐고, 안에 들어갔을 때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커서 두 번 놀랐다. (건물 밖에서 봤을 땐 그렇게 커보이진 않았는데 지금 찾아보니 14층이라고....?)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작은 크기의 로비에는 소규모 강연 같은 걸 하고 있었다. 도서관을 둘러보기도 전에 그런 일상적인 광경을 좀 더 살펴보고 싶어서 괜히 한 번 엿들어봤다. 인종 차별에 대한 책을 가지고 여러 청중들이 무대에 나와 이야기하는 그런 자리였는데,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나와서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있는 게 좀 부러웠다. 무대 위에 있던 4명이 일반인인지 아니면 나름 저명한 사람들인진 모르겠지만 의견 개진에 적극적인 분위기를 한 발짝 옆에서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무대를 조금 지켜보다가 다른 층도 구경하고 싶어져서 움직였다. 계단을 올라가보니 열람실같이 꾸며진 좀 더 넓은 로비가 나타났다. 내가 도서관 열람실을 간 게 대체 언제였더라 싶을만큼 오랜만이고 낯설었다. 평일이었는데도 공개열람실 자리가 꽉 차 있는 걸 보니까 공부가 좀 하고 싶었다. 난 사실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좀 여유롭게 도서관 가서 공부하는 일상을 상상할 때가 있다. 인강을 듣거나 뭘 검색해야해서 노트북이 필요한 공부 말고, 영어 단어 공부나 문제집 푸는 식의 아날로그스러운 공부는 도서관 가서 가끔 해보고 싶다. 로비 열람실 양 옆으로는 도서를 대출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여기를 진짜 너무 들어가보고 싶었는데 리더스 패스라는 회원증 비슷한 게 있어야했다. 그냥 살짝 둘러만 보는 건 안되냐고 했는데 어렵다고 했다. 안이 너무 궁금해서 포기하지않고 리더스패스를 만들어보려했는데 뭔 세금 납부 서류 같은 게 필요하다해서 깔끔하게 접었다. 도서관에는 열람실 말고도 상설전시관이 있는데, 이 전시관이 앞서 말했던 대영도서관의 소장물을 전시하는 곳이었다.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곳이라 사진은 찍지 못했고 눈으로만 담았다. 그리고 좀 특이했던 게, 건물 지하에 옷을 맡아주는 곳이 있었다. 여기 뿐만 아니라 좀 크다 싶은 건물이면 다 있었던 것 같은데, 그만큼 영국에서는 포멀한 의상을 입은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가 잘 되어있는 듯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본 적 없는 서비스였다. 전시관까지 구경한 후에 볼 것 없는 기념품 샵을 스윽 지나치고 나니 더 볼 게 없었다. 대여실을 진짜 한 번 보고싶었는데, 아쉬웠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서 회원 가입에 필요한 세금 납부 서류를 찾아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깔끔하게 맘 접었다. 나올 때쯤 예원이가 해리포터 두꺼비 초콜릿 사다달라고 했던 게 기억이 나서 바로 옆에 있는 킹스크로스 역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마침 예원이한테 카톡이 왔길래 안그래도 지금 초콜릿 사러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자 어떡하냐며 농담이었다고 황급히 오더를 취소하는 예원이었다. 이미 거의 다 도착한 김에 역사 구경이나 하러 들어갔는데, 포트넘앤메이슨 2호점이 보였다. 포트넘앤메이슨이 거의 300년 만에 분점을 낸 곳이 세인트판크라스 점인데 우연히 2호점을 찾은 것이었다. 다음 날 영국을 떠나야했던 나는 기념품들을 차라리 지금 사기로 했다. 

  분점은 1개층밖에 안돼서 여러 층을 쓰는 본점보다는 작았지만 여전히 있을만한 제품들은 다 있었다. 해리 선물을 꼭 마음에 드는 걸 사고 싶어서 처음엔 쿠키를 살지 초콜릿을 살지 왔다갔다하면서 고민하고, 초콜릿도 다크를 살지 밀크를 살지 막 고민했다. 고민 끝에 초콜릿을 고르자마자 쿠키도 유명하다는 해리 카톡에 그냥 둘 다 사버렸다. 그렇게 초콜릿과 쿠키와 얼그레이 티백을 들고서 세인트 판크라스 역을 나왔다. 옆에 작은 크리스마스 소품샵이 있어서, 스노우볼이나 하나 살까 했었는데 스노우볼이 무슨 오르골되는 3만원짜리밖에 없어서 깔끔하게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서 오늘 첫 행선지로 꼽았던 보로마켓으로 출발했다. 

  보로마켓은 그렇게 규모가 크진 않고 한 30분이면 충분히 돌아볼 정도의 크기인데, 우리나라에선 못 보는 물건들이라 나는 좀 더 오래 머물렀다. 각종 치즈 류부터 염장한 햄 종류, 향신료, 빵, 과일 같은 게 진짜 다 생소한 것들 투성이였다. 가장 충격이었던 건 육류 가격이었다. 삼겹살이 1kg에 12.5파운드, 한화로는 2만원 정도 하는데 내가 처음에 가격표를 제대로 안보고서 100g 가격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12.5파운드만 적혀있는 걸 보고서 와 100g 에 12.5파운드면 진짜 엄청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근데 옆에 조그만 글씨로 per kg이라고 적혀있었다. 100g당 가격으로 따지면 2천원 꼴인데, 우리나라는 삼겹살이 지금 3천원이 넘어가고 있는데 2천원이면,,,한창 부러워하고 있는 와중에 옆에 있는 돼지 등심 가격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서는 돼지 등심이 100g당 1,500원쯤이었는데, 여긴 삼겹살보다 등심이 더 비쌌다. 1kg에 14.5파운드니까 22,800원, 100g에 2,280원.... 나라마다 어느 부위를 더 많이 사용하냐에 따라 가격 차이가 난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소고기는 진짜 우리나라에 비해서 가격이 월등하게 저렴했다. 물론 품질 차이나 이런 걸 감안하더라도, 소고기가 돼지고기와 가격이 비슷한 수준이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보단 소고기에 대한 접근성이 훨씬 높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들을 발견하는 재미로 보로마켓을 구석 구석 돌아다녔다. 과일 매대를 둘러보다가 사람들이 그렇게 극찬하던 납작복숭아를 발견했다. 맛보고 싶었는데 상자 단위로 팔아서 나한텐 투머치였다. 그렇다고 1개만 사겠다고 떼쓰고 싶진 않아서 나중에 마트 같은 데에 가면 소규모 포장으로 팔겠거니 하고 말았다. 돌이켜보니 너무 여행을 안전하고 재미 없게 한 건가 싶다. 저런 데에서 1개만 팔아달라고 하면서 흥정하고 이야기 나누는 재미도 있었을텐데. 

  

식료품을 파는 매장 바로 옆엔 세계 각국의 음식을 파는 코너가 따로 있었다. 태국, 일본, 중국, 스리랑카, 아르헨티나, 스페인 등등 내가 기억나는 것만 해도 이정도다. 이 날 아침에 좀 과하고 느끼하게 먹었어서, 점심은 왠지 아시안 푸드로 먹고싶었다. 일본 음식을 먹을지 태국 음식을 먹을지 고민하다가, 그 때 디엠하고 있던 태국 친구가 태국 음식 메뉴 중 하나를 추천해준 게 거기 있어서 바로 시켰다. 소고기 파낭 커리였는데, 사실 맛 자체는 특별할 것 없이 우리나라 사람들 입맛에 잘 맞는 맛이었다. 특이한 음식을 먹는 게 여행의 재미라지만 일단 그 순간만큼은 익숙한 아시안이 땡겼다. 밥을 야외석에서 먹고 있는데, 장애우 분들과 보호자분들이 식사를 들고 내가 있던 자리 쪽으로 왔다. 여긴 장애우 휠체어를 두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자리가 따로 있었다. 그 날 유독 사람이 많아서 장애우석도 비장애인인 사람들이 앉아서 먹고 있다가 그 분들이 오자마자 비켜줬다. 우리나라는 아직 이런 야외 시장 같은 데에서까진 장애우를 위한 시설이 마련되어있지 않은데, 여긴 이런 시장에서부터 장애우를 위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 게 좀 부러웠다. 사람들도 그 곳에서 밥을 먹고 있다가도 장애우 분들이 왔을 때 당연하게 비켜주고 자리를 당연하듯 만들어줬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젠 장애우에 대한 인식들이 많이 개선 됐는데, 아직 이런 시스템에서의 준비가 미흡하단 생각이 들었다. 통인시장 같은 곳에서도 장애우를 위한 시설을 자체적으로 마련해주면 이미지에도 도움될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밥을 다 먹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근처 거리가 예뻐서 또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근데 날이 흐려서인지 폰 카메라로 담으니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흐린 날만의 느낌을 담는 사진을 찍는 법을 좀 배워봐야겠다. 

  그렇게 사진 찍으면서 걷다가보니 템즈 강이 나왔다. 사람들이 두세 명씩 강둑에 앉아서 도란도란 떠드는 걸 보니까 또 평화로워보였다. 알고보니 테이트모던이 바로 옆에 있어서 관광객들이 꽤 많았다. 테이트모던 주변에 있는 작은 잔디밭들 위에는 사람들이 누워서 책 읽거나 떠들고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땡겨서 하나 테이크아웃하고서, 쉬고 있는 사람들 모습을 마저 구경했다. 잔디밭 위에서 아이들이 정말 영화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가끔 영화나 드라마 보면 아이들이 항상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으로 비춰지는 게 별로라고 생각하곤 했다. 근데 그 잔디밭에서 아이들이 영화에서 연출하는 모습처럼 뛰어다니는 걸 보고선 연출이 고증을 잘했구나 생각하고 혼자 재밌어했다. 애들이 뛰어다니는 건 만국 공통인가보다. 해리랑 왔으면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생각하다 갑자기 해리 목소리가 듣고싶어서 영상통화를 걸었다. 해리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전화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맞을만한 비는 아니었던 게 웬만한 비는 맞는 영국 사람들도 다들 하나둘씩 비를 피하고 있었다. 나도 짐을 챙겨서 급하게 숨을 곳을 찾았다. 도망치는 길에 어떤 베이커리에 들어가서 해리에게 빵을 보여줬다. 빵을 보여주면서 무슨 빵인지 설명해주고 그러다보니까 해리가 이런 랜선투어 해보고싶었다고 해서, 전화하는 동안만 임시 랜선투어 가이드가 되기로 했다. 빵집에 있던 빵도 보여주고, 웬 건물 앞에 아마존 프레쉬 사람들이 바나나를 무료로 나눠주는 광경도 같이 보여줬다. 바나나 나눠주는 풍경을 같이 보던 해리가 그런 거 함부로 받지 말라고 했다. 전화 안하고 있으면 냉큼 받으러 갔을 것 같다고 해리가 말했는데, 난 음식물 쓰레기 생기는 걸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안받았을 거라고 부정했다. 그래서 납작복숭아도 아직 안 먹은 것이라고 했더니 끄덕였다. 야매 랜선투어를 진행하고 있으니 비가 살짝 잦아들어서, 다른 곳도 보여주러 더 멀리 갔다. 해리가 돈까스를 좋아해서 돈까스 집도 보여주고, 진짜 아마존 프레쉬 매장이 있어서 밖에서 구경했다. 아마존 프레쉬는 무인 매장이었어서 멤버십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시간에 만들기가 좀 애매해서 그냥 겉에 창문으로만 구경했다. 그런 무인 형태 매장은 이젠 우리나라에도 몇 군데 있어서 막 신기하진 않았다. 대신 안에서 어떤 제품들을 파나 구경했다. 편의점이든 슈퍼마켓이든 해외에서 파는 것들은 몇 번을 봐도 재밌었다. 내가 워낙 장 보는 걸 좋아하기도 해서 마켓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렇게 한창 전화하면서 해리가 소개해줬던 스콘 가게에 가서 애프터눈티를 또마시기로 결정했다. 

  메종 베르토라는 가게인데, 프랑스식 디저트로 유명한 곳이었다. 가게가 오래되어보이긴 했는데 150년이나 됐다고 한다. 혼자 갔는데 야외에 자리가 남아있길래 스콘과 얼그레이티를 시키고 바깥에 앉았다. 야외석이 대단한 게 아니라 진짜 찻길 바로 옆에 덩그러니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있는 방식인데, 날 좋은 날은 진짜 다들 야외석에 앉는 것인지 야외석이 인기가 많았다. 런던이 날씨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도시다 보니 날이 좋을 때 최대한 그 날을 만끽하려고 야외석에 앉는 듯하다. 뷰는 지나가는 차와 맞은 편 건물이 전부였지만 그냥 밖에 앉아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은 좋았다. 차와 스콘은 금방 나왔고 식기는 그냥 모두 새하얀 도자기 식기였다. 스콘은 버터라고 하기엔 너무 부드럽고 클로티드 크림이라 하기엔 너무 버터색인 꾸덕한 크림이 베리잼이랑 같이 나왔는데, 저게 진짜 너무 맛있었다. 스콘도 딱딱하고 퍼석한 식감이 아니라 KFC 비스킷처럼 안쪽은 부드러운 질감인데, 그냥 먹어도 눈 감고 존맛의 찡그림이 나올만큼 맛있었다. 보통은 스콘을 2등분해서 먹는데, 그렇게 먹기 너무 아까울 것 같아서 섬세한 칼질로 3등분을 했다. 3등분한 스콘에 크림과 잼을 아낌없이 발라서 먹었는데, 먹을 때마다 진실의 미간이 나타났다. 솔직히 스콘이야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맛있게 만드는 곳들이 많은데, 저 크림은 한국에서 먹어본 적 없는 맛이었다. 저걸 수입해야하는데. 해리가 왜 추천했는지 납득이 갔다. 근데 먹는 도중에 오고가는 손님들을 보니 죄다 한국인이었다. 커플만 세 커플이 연달아 들어오고, 한국인 무리가 한 번 오고, 나중에 보니까 그냥 매장 절반이 한국인이었다. 이번 여행하면서 한국인을 마주친 게 몇 번 안됐는데, 그 가게에서 마주친 한국인만 10명이 넘었다. 난 여행 다니면서 한국인이 많이 가는 맛집들을 꺼리는 이상한 심보가 있다. 식당을 고를 때도 네이버에서 검색하지 않고 그냥 구글맵에서 음식점이라고 찍었을 때 나오는 곳에서 평점을 기준으로 본다. 한국인이 찾는 곳들도 맛있는 곳들이 많겠지만, 뭔가 다들 한 명이 가서 올린 후기를 보고 우르르 따라가는 것 같아서 괜히 내키지 않는다. 그치만 여기 매장은 인정이었다. 여행 초반에 여기를 방문했다면 런던에 있는 나머지 일정 중 아침 일정에 포함시켜서 한국인이 적을 때 혼자 여유를 만끽했을 곳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스콘과 얼그레이티를 먹다 보니 또 배가 차서 걸어야했다. 다음 날이면 런던을 떠야했기 때문에, 첫 날 소호 나이키 매장에서 본 신발을 사러갈 생각이었다. 어김없이 가는 길에 예쁜 사진을 건질만한 게 없을까 하고 미어캣처럼 고개를 바삐 움직이면서 다녔다. 가는 길에 칼을 파는 매장이 있어서 또 부엌 용품 볼 생각에 신나서 들어갔다. 들어갔더니 가정용 칼부터 벽에 엄청 많이 걸려있었고, 디스플레이 박스에는 잔뜩 깔린 자갈 위에 일본식 칼들이 작품별로 놓여있었다. 칼들이 서로 다른 생김새와 크기로 제작되어서, 작품을 만든 장인의 사진과 함께 놓여있었다. 뭔가 저런 칼을 한 번 가져보고 싶었다. 저런 칼들을 쓰려면 어느 정도의 경지까진 올라야 아깝지 않게 사용할 수 있을텐데, 뭣도 아닌 내가 사기엔 나한테 너무 과분한 칼이고 아까울 것 같았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가격도 한두푼 하진 않을 것이고, 장인도 나같은 초짜보단 제대로 된 사람이 칼을 다루길 바라는 마음일 것 같았다. 칼 구경을 끝내고서 나이키 매장으로 바로 갔다. 다시 에어포스 제품이 있는 진열장으로 가서 직원에게 내가 미리 봐둔 신발을 내 사이즈를 찾아달라했는데 찾아보고 오더니 사이즈가 없다고 했다. 사이즈가 없다니.... 한 치수 큰 거라도 없냐했더니 285밖에 없었다. 지난 번에 와서 살걸. 괜히 아른거려서 한국 와서도 찾아보고 있는 신발이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나오니 저녁 6시쯤 됐다. 이후로는 생각나는 일정이 아예 없었는데, 하늘이 좀 개는 것 같아서 프림로즈힐을 한 번 찍어보고 오자라는 생각으로 가보기로 했다. 근데 가는 길에 다시 하늘이 어두워지길래, 근처에 있는 리젠트파크로 마음을 바꿨다. 리젠트파크를 가기로 한 이유는 딱 하나인데, 크루엘라에서 에스텔라가 런던에 가서 꼭 가고싶어했던 곳이기도 하고, 작중에서 리젠트파크의 분수대가 에스텔라에게 아주 중요한 장소였기 때문에 그걸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 분수대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 곳으로 향했다. 리젠트파크는 아주 넓은 공원이라서, 분수대도 여러 대가 있을 것 같아서 정확히 어느 쪽으로 가야 내가 찾는 분수대가 나올지 찾아보았다. 근데 아무리 구글맵을 뒤져봐도 그 모습이 나오는 분수대가 없었다. 이상해서 크루엘라 배경이 된 촬영지를 검색해보니, 영화에 나온 그 분수대는 리젠트파크 내에 있는 분수대가 아니었다. 저어 멀리 어떤 대학교 캠퍼스 안에 있는 분수대였다. 그걸 알자마자 리젠트 파크 앞에서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리젠트파크도 좋지만 그 분수대가 보고싶었던 건데. 허탈해지자 갑자기 배가 고팠다. 몸이 지친 건 버틸만 했는데 마음이 지친 건 조금 슬퍼서 그냥 다 접고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저녁엔 해리가 알려준 서브웨이 메뉴를 먹기로 했다. 영국 서브웨이에는 우리나라에 안파는 나초치킨이라는 메뉴가 있는데, 나초 맛 튀김옷을 입은 치킨 조각들이 속재료로 들어가 있는 메뉴였다. 그게 엄청 맛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바로 서브웨이를 검색해서 숙소 근처의 매장에 가서 주문을 했다. 두구두구 맛은! 레전드까진 아니었다. 후기 찾아보니까 다들 대존맛이라던데 내가 소스를 잘못 고른 것일까.... 누구는 마요네즈와 랜치 조합으로 존맛이었다고 하니까 다음 번엔 그 조합으로 시도해봐야겠다. 밥을 먹으니 또 지쳤던 몸과 마음이 되살아나서, 늦은 시간이라 어딜 또 가진 못하고 숙소 1층에 있는 펍에서 맥주 한 잔 하면서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혼자 1층에서 맥주 마시고 있는데 계단에서 누가 내려오면서 문을 벌컥 열다가 나랑 눈이 마주쳤다. 호스텔이라 그런지 눈 마주치면 간단히라도 다들 눈인사를 하는데, 기분이 좋았던 내가 눈인사를 먼저했더니 갑자기 그 친구가 다짜고짜 '그녀한테 말하러 갈거야.' 라고 하면서 내 앞에 서서 자기의 고백 계획을 알려줬다. 들어보니까 고백 계획도 아니고, 어장치는 여자한테 그만할 거라고 말하러 가는 모양새였다. 지금까지 어떻게 마음을 줬었고 힘들어했는지 맥주 마시는 나한테 다짜고짜 하소연하면서 밤 10시 반에 용기있게 말하러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냥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는데 외모는 귀엽지 않았어서 응원한다고만 했다. 넌 해낼 수 있을거라며 자신감을 심어주고서 보냈다. 과연 그 친구는 성공했을까. 그 친구를 보내고서, 나도 내일 떠날 준비를 마저 하고 일찍 잠에 들었다. 런던을 즐긴 마지막 날이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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