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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로운 Oct 08. 2022

여행을 가려고 그만둔 건 아닌데(5)

런던, 브라이튼 - 빈티지를 좋아하세요?

  5일 차엔 처음으로 근교로 나갔다. 브라이튼! 런던에서 남쪽으로 한 70km 떨어진 해안도시인데, 세븐시스터즈라는 유명한 기암절벽 관광지를 가려면 꼭 거쳐야해서 인기가 많다. 나는 세븐시스터즈는 됐고 브라이튼을 구경하러 왔다. 이번 여행기에서 자꾸 8년 전을 언급하게 되는데, 그만큼 그 때 기억이 강하고 또 좋게 남아있어서 그런 것이니 그러려니하고 넘어가주면 좋겠다. 8년 전에 처음 유럽에 왔을 때 카피부 동기였던 정규 형을 만나로 브라이튼에 온 적이 있다. 그때 브라이튼에서 딱 1박 2일 지냈었는데, 런던보다 훨씬 조용하고 평온한 동네로 내 기억에 남아있었다. 정규형이 데려가 준 브렉퍼스트 식당과 애프터눈티 가게가 그리워서 찾아보고 싶었는데 결국 찾지 못했다. 형한테 연락해서 물어볼까 잠깐 고민해봤지만 대뜸 식당 물어본다고 연락하기가 괜히 미안했다. 그렇지만 아는 척은 하고 싶은 마음에 브라이튼 사진 올릴 때 형을 태그하는 걸로 대신했다. 아무튼 내 기억 속에 브라이튼이란 도시는 날씨도 좋고 해변가에서 쉬고 있던 사람들의 모습도 평화로운 곳이었다. 이번엔 평화로움을 한껏 만끽할 생각이었다.

  아침 일찍 기차 시간을 확인하고 빅토리아 역으로 향했다. 가자마자 티켓부터 사기로 했다. 티켓판매기를 살펴보니 일반 티켓 말고 Peak Off 티켓이라는 좀 더 저렴한 티켓이 눈에 들어왔다. 별 생각 없이 그걸로 일단 표를 끊고서 Peak Off 티켓을 좀 더 알아봤다.(진짜 대책없다) 오프피크 티켓은 출퇴근 러쉬아워를 제외한 아무 시간대에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이었다. 영국의 피크타임은 오전 6시 30분부터 9시 30분, 오후 4시 30분부터 7시 30분. 내가 기차표를 산 시간이 8시 30분이었으니까, 피크타임이 끝나려면 1시간은 더 기다려야했다. 이 때부터 괜히 샀다 싶었다. 출발이 1시간 뒤인 건 둘째 치고 이따가 돌아올 때도 4시 반 전에 기차를 타야했다. 난 좀 여유롭게 브라이튼을 돌아볼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시간 제한이 생겨버렸다. 더 큰 문제는 기차가 무슨 5분에 1대 있는 것도 아니고 30분에 1대였는데, 그나마도 파업 때문에 어떤 기차편이 언제 취소될지 모른다는 거였다. 실제로 난 9시 30분에 딱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가려했는데 갑자기 취소되는 바람이 9시 59분 차를 타고 가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다려야하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수수료를 물더라도 오프 피크 티켓은 환불하고 싶었다. 티켓오피스 앞을 보니 어림 잡아 20명이 서있었고 카운터는 1개만 열려있었다. 내가 따지기도 전에 이미 사람들이 창구 더 오픈하라고 항의 중이었다. 백 번 양보해서 순서를 기다리더라도 기차 시간 전에 환불은 불가능해보였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출발할 때는 1시간을 기다렸다가 피크 타임이 끝나면 가고, 돌아오는 티켓을 가서 환불할 마음으로 느긋하게 기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승차 플랫폼 옆에 코스타 커피가 보여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 시키고 앉았다. 가만히 앉아서 간만에 셀카를 찍고 있는데 내 맞은 편에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아기 한 명이 착석했다. 아기는 유모차에 내 쪽을 향해서 앉아 있었고, 아이 어머니는 내 맞은 편에 등을 보이고 앉으셨다. 할머니는 어머니에 가려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기랑 내가 소리 내지 않고 노닥거려도 아무도 눈치 채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기는 나랑 끊임없이 아이컨택을 했다. 내가 커피를 마시는 것도, 보조 배터리에 핸드폰을 연결하는 것도, 휴지로 테이블에 흘린 커피를 닦는 것까지 다 지켜봤다. 가끔 어머니가 먹여주는 이유식을 먹을 때 빼고는 정말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귀여워서 인물사진으로 사진 몇 장 찍어줬는데 얌전히 있었다. 그렇게 아기랑 아이컨택을 하면서 놀다보니 기차 시간이 다 돼서 탑승장으로 갔다.(나중에 놀랐는데, 이틀 후에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공항에서 이 모녀를 또 만났다.)

  기차에 타고 나서부터는, 그냥 쭈우욱 창 밖을 바라보면서 갔다. 8년 전엔 브라이튼까지 되게 오래 걸렸던 것 같은데, 이번엔 생각보다 금방 도착한 느낌이었다. 8년 전도 이번에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갔는데, 생각을 많이 해서 8년 전에 오래 걸렸다고 느낀 걸까, 아니면 생각을 많이 해서 이번에 금방 도착했다고 느낀 걸까. 모를 일이다. 그래도 일찍 도착한 게 신나서 역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길에 브라이튼 역 간판을 찍어서 스토리에 올렸다. 브라이튼을 떠나기 전엔 정규형이 연락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오전 11시가 넘은 때였어서 점심 먹을 곳을 찾아봤다. 근방에 해산물이랑 같이 브렉퍼스트와 브런치, 런치까지 파는 식당이 있어서 곧장 들어갔다. 11시 16분 즈음이었는데 브렉퍼스트 메뉴판을 주길래 런치 먹으러 왔다고 했더니 11시 30분부터 런치 주문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조금 이따 주문해도 되냐고 물었더니 음료 먼저 시키라고 했다. 테이블 담당 서버가 되게 친절하게 잘 챙겨줬다. 약간 예전에 한국민속촌에서 일하셨다가 지금은 유튜버로 지내시는 하줌마 님 닮은 분이셨다. 사과주스를 주문하고 천천히 매장을 둘러봤다. 빈 자리가 거의 없이 꽉차 있었고, 관광객들보다는 현지인들이 더 많아보였다.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대화하는 사람들 가운데 나 혼자 애플주스 하나 쪽쪽 마시고 있는 광경이 좀 민망하면서도 웃겼다. 그러다가 한 25분쯤 됐을 때 담당 서버가 런치 메뉴판을 가져다 줬다. 바닷가 마을까지 왔는데 해산물을 먹어야겠다 싶어서 칼라마리와 농어 플로랑틴을 주문했다. 칼라마리는 이탈리아식 오징어 튀김인데, 타르타르 소스 비슷한 소스와 라임을 같이 줘서 찍어먹는 음식이다. 플로랑틴은 나도 처음 보는 메뉴였다. 시금치가 들어간 단백질류 음식에 모네이소스를 곁들인 음식이라고 한다. 모네이 소스는 버터 베이스인 베샤멜 소스에 치즈를 녹여서 풍미를 한껏 끌어 올린 소스인데, 저 소스 기가 막혔다. 생선을 좋아하고 새로운 맛도 좋아하는 내 입맛엔 아주 맛있는 음식이었다. 모네이소스는 한국 가서도 한번 시도해보고 싶지만, 베샤멜 소스부터가 난관이라서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냥 언젠가 또 먹어보면 좋겠다는 소망만 남기기로 했다. 계산할 때 담당 서버가 나한테 오늘 어디 가냐고 물어봤다. 발음이 지인짜 특이하고 알아듣기 힘들어서 처음엔 그냥 맛있었냐고 물어보는 줄 알아서 잘못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표정이 이상하길래 찜찜해서 질문이 뭐였는지 다시 물어보고나서야 맞게 대답했다. 처음엔 실력이 들통난 게 민망하고 창피했는데, 곱씹어보니 뭔가 영어를 쓰는 사람들의 악센트나 발음이 천차만별인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알아듣는 사람들이 정말 신기했다. 발음과 악센트랑 무관하게 척하면 척 알아듣는 그 감각을 너무 기르고 싶었다. 이 날 말고도 여러 경우에 내 말을 못 알아듣거나 내가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았는데, 기본적인 실력이랑 다르게 통용되는 단어와 문장들을 다 배우고 싶었다.

  그렇게 식당을 나왔다. 배를 좀 꺼뜨릴 겸 근처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둘러봤다.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는 좁은 골목이 보였다. 여긴 뭘까 싶어서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골목이었는데도 빈티지 샵들이랑 식당이 즐비했다. 빈티지 도서부터 빈티지 LP, 빈티지 소품 등등 빈티지라면 모든 게 다 있을 것 같은 보석 같은 골목이었다. 난 빈티지를 진짜 좋아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모든 빈티지를 사랑하는 건 또 아니다. 지금까지 외면 받아온 손때 묻은 제품들이 널리고 널려 있는데, 그 속에서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는 숨은 제품을 만나는 그 순간이 진짜 짜릿하다. 난 그 순간에 중독돼서 계속 빈티지 가게들을 찾아다니는 것 같다. 가게마다 돌아다니면서 그런 물건이 혹시 있나 열심히 구경하면서 다녔다. 그런 물건을 발견하진 못하더라도, 각자의 이야기가 있을 물건들로 가득한 선반들은 사진으로 담기에 정말 예쁜 공간이었다. 그래서 브라이튼에선 유독 빈티지 샵 안에서 찍은 사진들이 많았다. 또 같은 빈티지 샵이더라도 어떤 가게는 소품 위주, 어떤 가게는 그림 위주, 어떤 가게는 가구 위주라서 가게마다 다른 색깔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원래 계획은 브라이튼에 내리자마자 바로 바닷가를 구경하러 가는 거였는데, 브라이튼 도착하고 3시간 넘게 바다는 구경도 못했다. 계속 사진 찍으러 돌아다니고 빈티지샵들을 구경하다보니 어느새 3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슬슬 당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젤라또 집이 보여서 이끌리듯 들어갔다. 사실 한 입만 먹었어도 충분했을텐데 쓸데없이 두 스쿱짜리를 주문했다. 난 우리나라 젤라또 양 정도를 생각했는데, 거의 밥 한 공기 분량의 젤라또를 담아줬다. 당이 떨어진 거지 배가 고픈 게 아니었는데... 적당히 먹다가 또 물린다 싶어서 반쯤 먹고 버렸다. 이번 여행에서 먹은 아이스크림들은 모두 절반을 채 먹지 못하고 버렸다. 난 아이스크림에 강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배회하다가, 오후 2시가 지나고서야 비로소 바닷가로 출발했다. 사진이 예쁘게 나오는 맑은 하늘은 아니었지만, 8년 전의 바다를 다시 한 번 보고싶었다. 

  바닷가라 바람이 매섭게 부는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바람을 맞으면서도 돗자리 없이 자갈 위에 잘만 앉아서 쉬고 있었다. 바람 때문인지 파도가 좀 높았는데도 나름 운치가 있었다. 관광 도시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새들이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가까이 다가왔다. 특히 갈매기는 진짜 손만 뻗으면 닿을 위치까지 걸어오길래 참 겁 없구나 싶었다. 우리나라는 비둘기만 많아서 비둘기가 극혐의 대상인데, 여기는 갈매기도 하는 꼬라지 봐선 비둘기랑 함께 극혐의 대상일 것 같았다.(비둘기는 만국 공통으로 걸어다닌다.) 바닷가에 그렇게 앉아서 멍 때리다가 인스타 라이브를 잠깐 켜서 친구들한테 바닷가를 구경시켜줬다. 다들 적당히 행복하라고 말하는 게 너무 웃겼다. 또 사람들이 잠깐 들어왔다 사라지는 것 같아 금방 껐다. 멍을 마저 때리다보니 머리 위로 하늘이 아주 살짝 개는 것 같길래 좀 얄미웠다. 흐릴거면 아예 흐리던지, 갤거면 좀 제대로 개던지. 이게 영국의 날씨인가보다. 흐린 날씨 때문에 계획을 틀어 조금 일찍 떠나기로 했다. 기차 시간을 확인해보니 저녁 피크타임 전에 3시 40분 경에 런던으로 가는 기차가 있어서, 근처에서 애프터눈티를 하나 더 마시고 떠나기로 했다. 정규 형이랑 갔던 곳을 찾고 싶었는데 실패해서, 그냥 역 근처 카페를 찾아서 갔다. 내가 생각했던 애프터눈티는 당연히 티팟에 차가 나오고, 각설탕이든 설탕이든 우유와 함께 같이 나오는 형태였는데 내가 간 카페는 진짜 그냥 우리나라 카페처럼 티 우려서 잔에 내주는 곳이었다. 우유와 설탕을 요청하니까 받긴 했는데 내가 바라던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도 우유랑 설탕이 있는 게 어디냐며 아쉬운대로 야매 애프터눈티를 만들어 먹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 해리랑 전화를 잠깐 했다. 여행하는 내내 해리랑 같이 돌아다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리는 오늘 했던 정처 없는 배회까지도 나랑 같이 하고싶다고 했다. 물론 해리랑 같이 가면 해리의 체력을 위해 내가 좀 더 J처럼 움직이겠지만, 해리는 그냥 내 여행에 맞춰 같이 다니는 것도 좋아할 것이다. 이번엔 타이밍이 안 맞았지만 너무 늦지 않게 해리랑 같이 오고싶어졌다. 

  기차 타야할 시간이 될 때쯤 하늘이 아예 맑아졌다. 역 쪽만 갠 것이 아니라 바다 쪽까지 아예 싹 파래져서 진짜 얄미웠다. 역에서라도 맑은 하늘 사진을 실컷 찍고서 런던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탔다. 저녁에 시간이 많이 남길래 저녁엔 뮤지컬을 하나 더 보기로 했다. 첫 날 레미제라블을 봤던 기억이 잊히질 않아서 다른 뮤지컬도 한 번 더 볼 생각이었다. 돌아가는 시간에 찾아보니 몇 가지 유명한 공연들은 자리가 남아있었다. 맘마미아, 위키드, 오페라의 유령 중 그나마 내용을 아는 오페라의 유령을 골랐다. 후기를 찾아보니 이 3개는 좀 클래식한 뮤지컬에 속하고 겨울왕국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즐길 수 있는 뮤지컬이라고 했다. 어차피 난 뮤지컬컬을 잘 모르는 편이라 겨울왕국을 보고싶었는데, 당일 좌석은 남은 게 없어서 포기했다. 오페라의 유령을 해리가 진짜 감명 깊게 봤다고 했어서 해리의 픽을 믿기로 했다. 가는 길에 티켓 예매를 하려했는데 결제가 자꾸 안돼서 5번만에 성공했다. 가끔 이런 식으로 뭐가 잘 안풀리면 짜증도 나고 땀도 나는데 이번에도 땀이 났다. 찝찝함 때문에 우선 숙소 가서 씻고 싶었다. 씻고 나선 전날 갔던 사우스켄싱턴 소품샵에서 피터래빗 카드와 파우치를 후딱 산 다음 바로 옆에 파이브 가이즈에서 저녁을 먹고 바로 뮤지컬 공연장으로 가기로 했다. 조오금 일정이 빠듯했지만 일단 빛의 속도로 씻고서 사우스켄싱턴 역 파이브가이즈로 갔다. 

  파이브가이즈는 미국에 있는 햄버거 프랜차이즈인데, 인앤아웃, 쉐이크쉑이랑 미국 3대 버거라고 불린다고 한다.(근데 이런 건 대체 누가 정하는 걸까) 예전에 건이랑 미국 갔을 때 인앤아웃도 쉐이크쉑도 먹었는데 파이브가이즈만 못 먹어서 아쉬워했었다. 이번에 영국에 있으면서 한 번은 꼭 먹어야지 생각했는데 이번에 먹기로 했다. 시간을 1초라도 아끼려고 파이브가이즈에서 주문만 먼저 하고서 피터 래빗 기념품을 사러 뛰어갔다. 사장님이 어제 왔던 걸 기억해주고 계셨다. 물건을 후딱 받아든 다음 파이브가이즈로 다시 뛰어가서 햄버거를 받았다. 주문할 때 야채를 다 넣어달라했어야하는데 잘 모르고 양파만 넣어달라고 했더니 햄버거에 거의 패티 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근데 패티가 지인짜 엄청 두껍고 육즙이 많은 패티였다. 그 당시엔 특별한 맛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떠올려보니까 패티가 그렇게 훌륭할 수 없었다. 야채 제대로 추가해서 한 번은 더 먹고 올 걸. 갑자기 후회된다. 그리고 감자도 스몰 사이즈로 추가했는데, 스몰 사이즈 용기에 감자를 담긴 담았는데, 봉투 안에다 감자를 한 번 더 쏟아넣어준건지 봉투가 그냥 감자로 가득했다. 보면서 살짝 헛웃음이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감자가 두껍고 큰데 맛은 그냥 그랬어서 다 먹지도 못했다. 우리나라도 요샌 음료 시키면 디스펜서에서 알아서 따라 먹도록 많이 바뀌었는데, 여기도 콜라는 컵으로 주고 알아서 마시게 했다. 조금 신기했던 건 코카콜라 전용 디스펜서 머신이었는데, 코카콜라 체리, 라임 등등 코카콜라를 다른 맛으로 따라마실 수 있었다. 심지어 터치형태라 훨씬 더 세련되어 보였다. 사용해본 적이 없었는데도 사용법이 쉬워서 금방 제대로 따라서 마실 수 있었다.(그리고 이 기계는 암스테르담 넘어가는 공항 안에서 한 번 더 만났다.)

  저녁을 먹자마자 바로 공연장으로 갔다. 이번에도 레미제라블 때처럼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오페라의 유령이 열리는 '여왕 폐하의 극장'공연장은 레미제라블 공연장보다 훨씬 컸다.(공연장 이름이 Her Majesty's Theatre이다.) 내 좌석은 1층 앞에서 다섯 번째 줄이었는데, 연기자들의 표정까지 하나하나 다 보였다. 레미제라블을 봤던 2층 첫번째 줄은 전체적인 그림을 한 눈에 볼 수 있어서 좋았다면, 1층 앞쪽은 배우들이 대사를 하는 표정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그 감정에 몰입하기 좋았다. 그리고 여왕 폐하의 극장도 오페라의 유령 전용 공연장이어서 무대 장치가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레미제라블은 장치와 영상 같은 무대 구성 요소들을 센스있게 활용한 연출이었다면 오페라의 유령은 무대 장치 스케일이 일단 넘사벽이었다. 샹들리에 떨어뜨리는 연출이랑 유령이 출몰하는 그림자 연출 보면서, 내한 공연을 할 땐 무대장치 완성도가 비교적 떨어질테니 이 정도의 감동을 느끼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만큼 스케일이 남달라서 몰입하게 됐다. 물론 이번에도, 내가 졸기 전까지 말이다. 보다보니 노래도 생각보다 알아듣기 어렵고, 내가 잘 모르는 내용을 3시간 가까이 봐야해서인지 중간에 또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레미제라블을 볼 땐 그래도 노래들이 다 아는 곡들이었고, 스토리 라인도 이미 알고 있어서 따라갈 수 있었는데, 오페라의 유령은 그냥 계속 모르니까 졸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했다. 가기 전에 내용 요약도 다 찾아보고 갔는데, 내용을 아는 것만으로 뮤지컬을 온전히 감상하긴 어려운 것 같다. 나보단 뮤지컬 덕후인 내 친구들이 봤으면 정말 인생 공연으로 남지 않았을까 싶다. 해리가 왜 엄청 감명 깊게 봤다고 했는지도 이해가 됐다. 난 해리가 좋아한 수준만큼 좋아하진 못했지만, 내가 레미제라블을 보고 느낀 깊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다 끝나고 나니까 또 어김없이 피곤했다. 오랜 시간 가만히 앉아있는 게 몸에겐 지치는 일이었다. 그치만 이번엔 저번만큼 피곤하진 않아서, 숙소 가는 길에 펍에 들러서 맥주 한 잔 먹고 싶었다. 말 걸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현지 펍이라도 가야 영어를 좀 쓰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펍으로 갔다. 기대와 달리 영어는 무슨 펍에 사람이 없어서 그냥 청승 맞게 혼자 맥주만 들이켰다. 그나마도 한 잔 마시고 나니 매장 마감시간이 다 돼서 나가야했다. 한 20분도 채 못 앉아있다가 나와서 다시 호스텔 1층에 있는 펍에서 혼자 맥주를 마셨다. 그래도 호스텔 카운터 직원이 말 걸어줘서 한 30분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는 뻔했다. 어디서 왔냐, 어디로 가냐, 어땠냐. 여행자로 만나면 항상 여행지를 묻는 대화와 나도 가봤다느니 가보고 싶다느니 아는 사람이 거기 다녀왔다느니 하는 대화로 이어지는데, 뭔가 그런 반복되는 패턴이 좀 질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프터눈티 마시면서 이야기했던 날이 떠올라서 흥미가 갑자기 떨어졌다. 흥미가 떨어져서 금방 숙소로 올라와서 잠에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대화 주제는 나만 즐거운 대화일까봐 쉽사리 꺼내질 못하겠는데 뻔한 대화는 하기 싫다는 약간은 모순적인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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