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 여행을 하다가 실망하는 경우
4일차는 점심에 선데이로스트를 먹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일정이 없었다. P의 여행이 이렇지 뭐. 갈 곳을 찾아서 구글맵을 이리저리 뒤져보다가 자연사박물관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사박물관이면...공룡 화석이 있겠네! 이라는 생각으로 신나서 아침 일찍 밖으로 나설 준비를 했다.
런던에서 묵은 두 번째 숙소는 호스텔이었다. 혼자하는 여행에선 거의 매번 호스텔에만 묵었어서 도미토리는 익숙해졌다 싶었는데 12인 도미토리는 난생 처음이었다. 3층 침대는 보기도 처음 봤다. 내 침대는 1층이었는데 진짜 허리를 피고서 앉을만큼의 높이도 되지 않았다. 이 호스텔이 유독 구렸던 게 헤어드라이기를 1층에서 빌려야하는 건 둘째 치고 욕실에 콘센트가 없었다. 그나마 있는 소켓은 전동면도기나 돌아갈 정도로 약한 소켓이었고, 방에 있는 걸 쓰자니 늦잠 자는 11명의 룸메이트들의 눈초리가 무서웠다.(실제로 한 번 썼다가 3층 침대를 쓰던 스페인 남자가 뭐하냐고 짜증냈다.) 그래서 거울도 없는 복도에서 혼자 핸드폰을 거울 삼아 머리를 말려야 했다. 다른 건 다 감안할 수 있었는데 이 머리 말리는 게 정말 너무 불편했다. 그리고 이 날 머리 말리는 것 때문에 스페인 애가 짜증 내서 되게 무안한 채로 짐 정리하고 있는데, 잠깐 나갈 때 카드키를 놓고 나갔는지 문을 똑똑똑 두드렸다. 우리 침대는 제일 안쪽에 있어서 난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이 열어줄 줄 알았다. 근데 아무도 열어줄 생각을 안하는 것이다. 똑똑똑 소리가 점점 세지길래 내가 열어줬다. 문 열어주면서 눈 마주치니까 그 사람도 민망해했는데 더 웃긴 건 한 번 또 나가더니 또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이번엔 그냥 내가 바로 열어줬는데 카드를 보여주더니 작동이 안된다고 혼자 뭐라뭐라 하면서 들어왔다. 그리고서 나도 나가려했는데, 갑자기 내 카드가 갑자기 안보였다. 제일 안쪽인 우리 침대까지 나머지 9명이 올 일도 없고 온 적도 없었다. 우리 침대 2층은 비어있었다. 내가 머리 말리느라 밖에 한 번 나갔다오고서 내 카드를 선반 위에 놨던 것 같은데 그게 안보였다. 내 캐리어를 뒤엎고 가방을 다 뒤져도 카드가 안나왔다. 그리고 그 스페인 남자는 카드 없이 나갔다가 두 번째로는 카드를 들고 갔다왔다. 카드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엄청 당황했었다가, 갑자기 그 남자가 의심스러웠다. 3층에서 자고 있는 스페인 애를 깨워서 물어볼까하다가, 내가 간수를 못한 거기도 하고, 훔쳤으면 천벌 받아라 라는 생각으로 그냥 카운터에 카드키 분실했다고 말하기로 했다. 나는 당연히 카드 분실 비용을 낼 줄 알았는데 너무 쿨하게 '새로 줄게~' 라면서 카드를 새로 줬다. 30분을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게 허탈하면서도 다행이어서 웃었다. 괜히 그 남자를 의심한 것도 미안했다. 기분이 갑자기 좋아져서 바로 신나게 자연사 박물관으로 갔다.
내가 기대한 건 엄청나게 큰 티라노 사우르스 화석이었다. 뭔가 어디서 그런 사진을 본 기억이 있었는데, 막상 가니까 티라노 사우르스 화석은 없고 어벤져스에 나오는 레비아탄 같은 화석이 있었다. 이건 뭔가 찾아보니까 흰수염고래 화석이었다. 다른 사진들에선 브라키오 사우르스 화석이 있는 걸로 보아서는 가끔 가다 바꿔주는 듯 했다. 그리고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공룡 화석이 많진 않았다. 오히려 다른 전시물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컸다. 공룡만 보고 싶었던 나는 공룡 화석만 후다닥 둘러보니 30분만에 다 둘러보게 됐다. 시간이 한참 남았길래 근처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자연사 박물관이 있는 사우스켄싱턴 역 근처엔 뭐 대단한 관광 명소는 없었다. 대신 사진으로 담을만한 장면들이 많았다.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어떤 기념품 샵을 발견했다. 홀린 듯이 들어갔는데 해리가 좋아하는 피터 래빗 기념품들이 많았다, 카드부터 머그컵, 파우치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해리 생각이 나서 사진을 몇 장 찍어서 인스타에 올렸는데 해리가 자기 피터 래빗 좋아한다고 이야기해줘서 다른 날 다시 들러서 해리 줄 엽서와 파우치를 사기로 했다. 선데이로스트 예약 시간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서 어제 스쳐지나갔던 나이트브릿지 역 근처를 구경하기로 했다. 어제 동행들과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전철을 타러간 역이 나이트브릿지 역이었는데, 들어본 적 없는 동네인데도 명품 매장도 많고 거리도 깔끔하고 건물들도 예뻐서 나중에 다시 와봐야겠다고 생각한 곳이었다. 어차피 선데이로스트를 예약한 매장도 나이트브릿지 역 근처여서 예약 시간까지 설렁설렁 돌아보기로 했다. 큰 백화점도 있고, 다른 건물들도 백화점 못지 않게 외관이 웅장해서 사진 찍을 맛이 났다. 또 5성급 호텔까지 발견하고 나서야 내가 몰랐던 번화가였구나 싶었다. 더 돌아다녀보고 싶었는데 다리가 아파왔다. 예약 시간을 15분 정도 남기고 식당 근처에 바닥에 앉아서 은성이 형을 기다렸다. 금방 형이 도착했길래 들어가서 선데이로스트와 치킨을 주문했다.
선데이 로스트는 이번 영국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 중 하나인데, 혼자 가긴 뻘쭘해서 은성이 형이랑 같이 가기로 했다. 내가 예약한 곳은 훅스무어라는 프랜차이즈였다. 이 곳 말고도 유명한 곳들이 많은데 예약을 하지 않으면 못 가는 경우도 있어서 예약을 미리 했다. 선데이로스트는 영국에서 일요일에만 먹는 일종의 데일리 스페셜 메뉴다. 기독교에선 금요일이 금욕을 하는 요일이라 고기를 먹을 수 없고 대신 생선을 먹는 요일로 지정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이나 영국 성공회에서 일요일 미사나 예배가 끝나고서 많은 음식을 먹는 걸 허락했던 것이 선데이로스트로 이어졌다고 한다. 선데이로스트는 구운 고기랑 요크셔 푸딩, 구운 야채들을 같이 먹는 한 접시짜리 요리다. 요크셔 푸딩은 패스트리 비슷한 식감으로 속이 빈 채로 겉이 부풀어오르는 형태의 빵인데, 예전엔 고기가 풍족하지 않았어서 요크셔 푸딩으로 배를 채우고, 고기를 맛보는 정도로 먹었다고 한다. 설명대로 고기는 두 덩이였고, 구운 감자랑 찐 야채, 요크셔 푸딩과 그레이비소스가 같이 나왔다. 치킨은 큼지막한 다리 부위가 오븐에 구운 채로 홀랜다이즈 소스랑 함께 나왔다. 선데이 로스트의 고기는 로스트비프처럼 적당한 두께로 넓게 잘려져있었는데 솔직한 평으론 평범하게 잘 구워진 고기였다. 의외로 야채가 맛있어서 놀랐다. 찐 야채와 요크셔 푸딩을 그레이비 소스에 같이 찍어서 한 입에 먹는 게 그렇게 맛있었다. 치킨도 소스 없이 먹어봤는데 소스 없이도 이미 맛이 훌륭했다. 파리에서 먹었던 세 가지 코스요리보다 이게 더 나았다.(가격도 그렇고 서비스도 그렇고.) 한껏 들떠서 공간을 필름카메라에 담고 싶었는데, 막상 담으려니 맘에 드는 구도가 없어서 포기하고 눈으로만 담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계산하고서 근처에 있던 포트넘앤메이슨 매장을 구경하기로 했다.
중국에서 공부했던 시절에 차를 많이 접하고 또 좋아했어서, 서양 차에도 관심이 많았었다. 가장 유명한 차 브랜드 중 하나가 포트넘앤메이슨이었고, 해리한테서도 워낙 많이 들었던 브랜드라 구경할 겸 또 선물도 찾아볼 겸 가보았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널찍한 공간에 수십가지 종류의 차가 진열되어 있었다. 얼그레이 티 종류만 어림잡아 10가지는 되는 것 같았다. 매장은 6개 층이었는데, 차 제품은 1층에만 있었고 지하는 식료품, 2층은 굿즈, 3층과 4층은 좀 특이하게 남성 여성 제품이 있었다. 그리고 5층은 레스토랑이었는데, 5층에서 포트넘앤메이슨의 애프터눈티를 즐길 수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애프터눈티를 예약할 때 켄싱턴팰리스 말고 이 곳도 고려를 했었는데, 생각보다 별로였다는 얘기가 많았었다. 나는 어제 애프터눈티 예약이 엄청 만족스러웠어서 켄싱턴 팰리스를 잘 골랐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다보니 생각보다 볼 게 많지 않았다. 선물도 지금 사면 손이 너무 무거울 것 같아서 빈 손으로 나왔다. 나오는 길에 은성이 형이 근처에 버버리 본점이 있다는 얘길 해줬다. 브랜드 본점이라니, 뭔가 다를 것 같아서 갑자기 흥미가 돋았다. 버버리 매장으로 가다가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시위 인파를 마주쳤다. 시위대를 보다가 영국에서도 이렇게 하고 있으면, 다른 나라에서도 동시간대에 같이 하고 있을까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제대로 나오는 건 딱히 없었다. 우리나라는 이렇게까지 관심이 있진 않은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이유가 뭘까 궁금해하면서 버버리 본점에 도착했다.
사실 명품에는 관심이 없어서 매장에서 뭐 파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고, 본점에서 볼 수 있는 브랜드 레거시같은 게 있을까 궁금했다. 브랜드가 구축하고 싶어하는 이미지엔 관심이 많아서 기대도 좀 했었다. 근데 막상 버버리 본점에서 경험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매장 둘러보고 싶다고 하고 직원 안내를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동안 직원을 배정해주지 않았다. 은성이 형 얘기를 들어보니까 남성복 구경하러 왔다고 했으면 바로 붙여줬을 거라고 했다.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기다리는데 다른 직원 한 명이 지나가다가 은성이 형 옷이 멋있다고 했다. 좀 차려입은 사람을 알아봐주고 인사 건네는 문화가 있구나 싶었다. 뭔가 고급 브랜드일수록 손님에겐 동등한 서비스와 친절을 베풀 거라는 생각을 당연하게 했었는데, 그런 애티튜드는 아니었다. 브랜드 급에 맞는 손님에게는 그에 걸맞는 서비스를 대접하고 그렇지 않은 손님은 티가 날 정도로 떨어지는 서비스를 대접하는 애티튜드를 처음 경험했다. 나 혼자 갔으면 정말 제대로 찬밥 신세를 받았겠구나 싶었다. 은성이 형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은 안나는데, 비싼 미용실을 갈 때는 좀 꾸미고 가야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직접 가본 적도 없는데도 불쾌했었다. 사람을 급으로 나눠서 다르게 대접하는 부류를 극도로 싫어하는 나에게 버버리 본점에서의 경험은 그런 미용실을 아무 생각 없이 간 느낌이었다. 이 경험 자체도 그랬는데, 본점에서만 있을만한 특별함이랄 것도 딱히 없었다. 큼지막한 조형물 하나 있는 것 빼고는 커다란 매장에 불과했다. 버버리 본점을 다녀온 시간은 실망으로 가득해서 기억에 강하게 남았다.
몸도 머리도 좀 피곤해서 우린 옆에 있던 스타벅스에 들어가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형이 프림로즈힐이라는 전망 좋은 언덕이 있다고 했다. 흥미가 생겨서 이따 저녁에 만나 같이 가기로 하고 형은 집에서 잠시 쉬러 간다고 했다. 그동안 나는 다른 곳을 구경하다가 합류하기로 했다. 원래는 영국도서관을 가려했는데 일요일엔 5시까지밖에 열지 않는다해서 시간 상 가지 못했고, 내가 8년 전에 왔을 때 멋지다고 생각했던 피카딜리 서커스와 코벤트가든을 다녀오기로 했다. 피카딜리 서커스는 런던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데, 피카딜리 서커스부터 리전트 스트리트, 코벤트가든으로 이어지는 길목이 시끌벅적한 번화가였다. 그리고 난 피카딜리라는 이름이 내 입에 착 달라붙어서 예전부터 이 곳을 좋아했다. 찾아보니 피카딜리라는 이름은 스트랜드 거리에 있던 양복점에서 처음 만든 ‘피카딜’이라는 레이스 칼라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레이스 칼라가 16세기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고, 부자가 된 양복점 주인은 지금의 피카딜리 서커스 땅에 초호화 주택 ‘피카딜 홀’을 세웠던 것이 피카딜리 서커스 광장의 이름이 된 것이다. 이름이 입에 맴돌아서 몇 번 소리 내서 발음도 해봤다. 또 내가 런던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이 피카딜리 서커스의 지하철역 간판이어서 다시 왔을 때 감회가 새로웠다. 여전히 시끌벅적하고 정신 사나운 곳이었지만 반가웠다. 여전히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아티스트들이 많았고, 거지도 많았다. 비둘기도 이렇게 많았나 싶었는데 금방 무시하고 구경하러 돌아다녔다. 거리에 복작복작한 사람들이 금방 싫어져서 사람들을 피해서 계속 걸었다.
골목 사이를 걷다가 익숙한 모습이 나타나서 잠시 멈췄다. 작년 연말에 프립 랜선투어 상품 중에 런던 투어를 신청해서 봤었는데, 그 때 투어했던 곳이 코벤트 가든이었다. 우리 집에서 빔프로젝터로 혼자 커피 홀짝이면서 나름 재미있게 구경했는데, 그 투어에서 봤던 풍경이 눈 앞에 나타났다. '어, 여기 그때 거기다' 하면서 혼자 코벤트 가든을 괜히 반가워했다. 코벤트 가든은 이름은 정원이지만 사실 쇼핑지구에 가깝다. 이런 저런 매장들과 앉아서 무언가를 먹는 사람들을 또 신나게 구경했다. 2층에 있는 무민샵도 들어가서 구경하면서 작년 연말에 본 랜선투어가 계속 떠올랐다. 한창 걸어다니다보니 또 다리가 아파왔다. 쉴 장소를 찾다가 코벤트 가든 옆에 있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멍을 때렸다. 멍 때리면서 시간을 보니 은성이 형을 만나러 갈 시간이 된 것 같아서 약속 장소인 킹스크로스 역으로 갔다. 킹스크로스 역은 해리포터가 호그와트 기차를 타는 9와 4분의 3 승강장이 있는 그 역인데, 실제로 9 터미널과 10 터미널 사이에 해리포터가 맸던 목도리와 짐 카트가 벽에 박혀진 사진 스팟이 있다. 근데 정말 그게 다라서 나는 그냥 스쳐지나가고 해리포터 샵만 둘러봤다. 해리포터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막상 샵에 가보니 사고 싶은 게 단 한 개도 없었다. 유치하기도 하고 소장 가치도 별로 없는 것 같아서 금방 나왔다. 그리곤 형한테 연락해서 만나기로 했다. 형을 만나러 가는 길에 하늘이 조금씩 흐려지고 어둑어둑해졌다. 프림로즈힐은 날 좋을 때 가야 예쁜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쉬워하다가 형을 만났다. 만나서 날 좋을 때 가야하지 않냐고 얘기했더니 형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저녁을 먹고 날씨를 지켜보기로 했다. 근처 태국 식당에서 간단히 밥을 먹고 나왔는데, 여전히 날은 안 좋았고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은 보던 우리 둘 다 다음을 기약하는 게 맞다는 합의점에 다다랐다. 이 때가 밤 9시쯤이었는데, 다음에 보기로 결정하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다. 더 어딘가를 가기도 싫고 바로 숙소에서 쉬고 싶어졌다. 그렇게 숙소에 도착하니 오후 10시쯤이었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씻고 잠에 들었다. 여행 시작하고 처음으로 11시 전에 잠든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