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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로운 Sep 04. 2022

여행을 가려고 그만둔 건 아닌데(3)

런던 - 장기여행자들을 만나면 벌어지는 일

  호텔에 가면 가급적 조식을 먹는다. 8년 전에 프라하에서 묵었던 3성급 호텔에서도 먹었고, 이번에도 먹었다. 이 곳이 하나 달랐던 건 셀프 이용이 아니라 주문을 하면 갖다준다는 것이었다. 자리에 앉아있으니 나이 지긋하신 직원 분께서 메뉴판을 들고 오셨다. 반가운 목소리로 계란은 어떻게 익힐지, 토스트는 어떻게 할지 등등을 물어봐주시곤 커피를 따라주셨다. 아침 메뉴는 평범했다. 계란과 토스트, 베이컨, 베이크드빈이었다. 퀄리티만 따지면 오히려 전날 먹었던 핌리코 프레쉬의 아침이 훨씬 알찼는데, 친절한 직원 분께 서빙을 받는 기분이 제법 괜찮았다. 

  기분 좋게 밥을 먹고서 체크아웃을 마치고, 시간이 이르길래 다음 숙소에 아예 짐을 맡겨두기로 했다. 사실 랜드마크를 꼭 찾아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빅벤이나 런던 아이 같은 명소는 애초부터 갈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예쁜 사진을 많이 건질 생각이었는데, 다음 숙소로 걸어가는 길에 하늘이 참 깨끗해보였다. 이럴 때 빅벤이나 웨스트민스터 성당을 사진으로 남겨두면 예쁠 것만 같았다. 맑은 날 에펠탑이 얼마나 예쁜지 바로 전날 직접 봐서 그런지 괜히 한 번 다녀오고 싶었다. 시간을 쪼개서 포토벨로 마켓을 가기 전에 빅벤을 잠시 들르기로 했다. 다음 숙소에 짐을 무사히 맡기고 바로 빅벤으로 출발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관람하는 관람객들도, 운동을 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여행하면서 거의 처음으로 한국인 관광객들도 봤다. 날이 얼마나 깨끗한지 하늘 사진만 찍어도 결과물들이 맘에 들었다. 빅벤 앞 다리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사진을 찍다가, 지난 번 런던 여행에서 만난 양아치들이 떠올랐다. 내 폰으로 사진 찍고서 20파운드를 삥 뜯으려 했던 디즈니 코스프레 무리들. 그 때 실제로 10파운드 밖에 없어서 20파운드 없다고 얘기했는데도 막무가내로 삥을 뜯은 디즈니 코스프레 무리들은 지금쯤 뭘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나도 퇴사한 마당에 그 사람들도 퇴사를 했을까, 지금은 무슨 일을 하면서 먹고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지만 알 방도는 없었다. 그 땐 삥 뜯길 뻔한 게 그렇게 무서웠는데, 이제는 삥 뜯는 사람들이 와도 전혀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삥 뜯는 사람들이 무섭지 않을만큼 나이를 먹었구나 싶었다.(근데 막상 삥 뜯는 사람들 오면 무서워할 것이다 분명.) 적당히 사진을 찍다가 그냥 강변을 걸었다. 해리한테 내 사진을 찍어 보내주고 싶었는데 카메라를 켜보니 내가 너무 못나보였다. 스노우로 찍어도 해결이 안됐다. 해리한테 나 진짜 못생긴 것 같다고 했더니 해리가 뭐 어떠냐고 했다. 아니라는 말은 안해줬다. 얼굴이 다 나오는 것보다 절반 정도 잘라서 찍으니까 그나마 나은 것 같아서 얼굴 반만 나온 사진을 보내줬다. 

  걸을만큼 걷고 구경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지나있었다. 이른 아침 시장 분위기를 보고싶어서 포토벨로 마켓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에서 빈티지 마켓을 꼭 많이 돌아다녀야겠다고 다짐했었고, 그 첫 번째 시장이 포토벨로 마켓이었다. 토요일이 가장 활발하다해서 토요일로 날을 정했다. 포토벨로 마켓은 노팅힐 근처에서 열리는 시장인데, 가까이 붙어있어서 그런지 노팅힐 관광지와 함께 많이들 돌아본다. 내가 그래도 유럽 오는 비행기 안에서 노팅힐 영화는 봤어서 들러볼까 고민했는데, 가봤자 또 서점 꾸며둔 게 전부일 것 같아서 가지 않았다. 그냥 노팅힐 앞 카페에서 커피만 잠깐 마시고서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녔다. 가는 길에 알록달록하고 조그만 간판들이 줄지어 붙어있는 조금 작은 골목을 발견했다. 보자마자 여기다 싶어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는데 아주 맘에 드는 게 하나 있어서 이건 인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걷다보니 도착한 포토벨로 마켓은 진짜 컸다. 여유롭게 구경하면서 걸었다고 해도 거의 1시간 반은 걸어서야 비로소 시장 끝을 볼 수 있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거리가 빽빽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고, 파는 물건도 잡다하게 많았다. 포크나 접시 같은 식기류부터 사진, 엽서, 옷, 카메라 같이 빈티지라면 상상할 수 있는 물건들은 다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살 게 있나 하면서 천천히 구경했는데 막상 사고싶은 건 많진 않았다. 길거리 음식도 종류별로 다양하게 팔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날 오후에 애프터눈티를 예약해둬서 동행을 구했는데, 그 중 한 명과 만나 여기서 점심을 먹기로 했었다. 한창 둘러보니 힘들고 더워서 스타벅스에 앉아서 기다리려고 했다. 야외석 밖에 없어서 땡볕 아래에서 혼자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인스타 라이브도 하고 쉬고 있었다. 영국 스타벅스는 조금 특이하게 자리가 넓지 않은 매장들이 많았다. 그 매장도 실내 좌석이 4개인가밖에 안됐고, 전체 좌석을 합쳐도 10석이 안됐다. 그래서 나 혼자 앉아있는동안 내 맞은 편에 앉아서 먹고 간 손님이 여럿 있었다. 한 번은 옆 테이블에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와 보호자 분이 앉으셨다. 보호자 분이 주문하러 간 동안 웬 노숙자 같은 아저씨가 할머니에게 오시더니 플러팅을 하기 시작했다.(?!) 거짓말 아니고 진짜로 막 입맞추고 싶다, 혼자 사는 것보다 같이 사는 게 행복하다면서 초면에 플러팅을 대놓고 했다. 그 광경을 눈 앞에서 보고 너무 충격이었는데 할머니가 눈길도 안 주고 철통 방어를 했다. 우리나라도 어마무시한 또라이들 많지만 해외에도 많은 듯 했다. 그러다가 노숙자는 그냥 지나갔고, 보호자가 돌아와서 할머니와 나누는 이야기가 들렸는데 재미있었다. 남미 출신인데 런던에 산 지 이미 6년째고 뭐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걸로 봐서는 그 둘도 처음 만난 사이로 보였다. 

  그렇게 이야기 엿듣는 재미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도 동행분은 올 기미가 없었다. 이상해서 보니까 내가 길을 잘못 알려줘서 엉뚱한 곳을 가고 계셨다. 이미 한 번 잘못 알려드렸던 터라 죄송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아무리 빨리 가도 점심을 여기서 먹을 시간은 안될 것 같았다. 그 분이 점심은 따로 먹고 1시간 후에 따로 만나는 게 낫겠다고 하셔서 그러자고 했다. 무거운 마음을 가득 안고서 나 혼자 근처에 있던 혜민님이 추천해준 팔라펠랩을 먹었다. 그것만으로 모자랄 것 같아서 츄러스까지 하나 사먹었다. 동행분께 두 번이나 길을 잘못 알려드리는 바람에 점심도 못 드시게 만든 게 죄송해서 갈 때 물과 츄러스를 하나씩 사서 갔다. 동행을 만나자마자 죄송하다고 몇 번이나 사과했다. 예약시간은 3시였는데, 만난 시간이 좀 일러서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근처에 교토정원이라는 곳이 있다고 해서 들러봤는데, 내 눈엔 너무 별 게 없는 공원이었다. 서양 사람들에겐 그 정도의 정원마저도 오리엔탈스러워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나보다 했다. 가는 길에 동행 분과 짧게 이야기를 나눴는데, 동행 분은 여기서 워홀로 소믈리에로 일을 하고 있는 동갑내기였다. 여행지에서 만났는데 무슨 일을 하든 뭔 상관인가 싶어 딱히 물어보지 않으려 했는데, 워홀로 넘어오는 과정을 묻다가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신기하고 반가웠다. 작년 11월에 제주도에서 만났던 소방관 형과 일식 요리사로 일하던 동생이 떠올랐었다. 나와 전혀 다른 분야에서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건 항상 신기한 일이고 궁금하고 멋있다. 그렇게 이야기하다보니 켄싱턴 팰리스에 도착했다. 

  예약 시간보다 조금 늦어서 바로 테이블 안내를 받았다. 또 오기로 했던 나머지 동행은 전날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시느라 답장이 한동안 오지 않았었다. 난 혹여나 잠수를 탄 걸까 걱정했었는데 늦게라도 오신다해서 천만다행이었다. 오히려 잠수 탄 게 아니라서 감사하기까지 했다. 우리보다 좀 더 늦긴 했지만 나머지 한 분도 합류하셔서 주문도 바로 했다. 원래는 인당 1개 세트를 시키려다가 옆테이블을 힐끗 보니 양이 말도 안되게 많아서 그냥 디저트 트레이는 1개만 시키고 티를 2개 추가했다.(결국엔 디저트 트레이 한 개도 다 안 먹었다.) 디저트들은 특출나지 않았다. 맛만 놓고 보면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먹었던 것들이 훨씬 나았다. 그런데도 이 날 애프터눈티 자리가 기억에 유독 많이 남았던 이유는, 이날 나눴던 대화들과 풍경 때문이었다. 보통 동행을 구하게 되면 같은 단기 여행자들을 생각하곤 하는데, 이 날 만났던 사람들은 전부 장기여행자들이었다. 아까 같이 왔던 동갑내기 동행은 소믈리에로 1년째 일하고 있는데 더 오래 일할 생각이라고 했고, 늦게 온 두 번째 동행은 한 살 많았는데 회사를 차렸다가 팔고서 유럽 각 국가마다 도시를 정해서 한 달 살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런던이 벌써 3번째 도시였었나, 암튼 그랬다. 여행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밌긴 한데, 우리가 이 날 나눈 대화들은 뻔하지 않은 대화들이었다. 누군가 들으면 정말 쓸데없고 무의미한 주제들이라고 생각했을 주제들이었다. 어떤 태도로 살아야하나 이야기를 나눴고, 걱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요 몇 달 간 행복한 삶의 조건은 뭘까 생각해보던 터라 두 사람의 생각이 궁금했다. 기저에 깔린 불안이 없는 삶이 행복한 삶인지, 아니면 소소한 즐거운 모먼트들이 많은 삶이 행복한 삶인지에 대해 물어봤다. 난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서 소소한 즐거움들은 순간에 불과하고 또다시 불안으로 회귀하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은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했고, 둘은 소소한 즐거움이 많은 삶이 행복하다고 했다. 지금은 그 이유가 자세하게까지 기억나진 않는다. 그 순간엔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동행으로 만나서 즐거웠다. 또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하늘이 예쁘다고 툭 던지는 사람들이어서 편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가장 오랫동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궁전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서 자리를 옮겼다. 켄싱턴 팰리스 바로 앞은 켄싱턴 파크라는 커다란 공원이 있다고 해서 그 곳에 잠시 들렀다 가기로 했다. 우린 거기에 잠시 들렀다만 갈 생각이었는데, 예상 밖의 풍경을 마주하고서 아예 자리를 깔고 앉게 됐다. 켄싱턴 파크에서 본 풍경은 이번 여행에서 본 모든 풍경을 통틀어 가장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높은 건물이 없어서 탁 트인 맑은 하늘, 잘 다듬어진 잔디, 가운데 작은 호수, 물놀이하는 아이들, 각자 다른 모습으로 쉬는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을 보자마자 비로소 유럽에 와있다는 게 실감났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감상에 방해가 될까봐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카메라로도 담아보려다가 결국 카메라를 내렸다. 그냥 그 순간의 공기와 풍경에 몰입하는 게 제일 나았다. 우린 다같이 넋을 놓고 구경하다가, 아무데나 앉아서 멍 때리기로 했다. 멍 때리는 것만큼 그 곳을 더 잘 만끽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대신 각자 돌아가면서 이 순간에 적당할 것 같은 음악을 틀기로 했다. 동행들이 고른 음악도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몰입을 깨지않는 음악들이었다. 나는 더발룬티어스의 SUMMER를 신청했다. 그렇게 돌아가며 음악을 틀면서 1시간 가까이 앉아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는 남자도 있었고, 돗자리를 깔고서 귀엽게 놀고 있는 커플도 있었다. 호수 앞 벤치에 앉아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특히 예뻐서 사진을 찍었는데, 이번 여행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이 또 생긴 때였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다가 동행이 예약해뒀다는 식당으로 길을 옮겼다. 소믈리에였던 동행이 일하는 업장 바로 옆에 있는 업장이었는데, 알고보니 모기업이 같은 계열사 식당이었다. 그렇다고 프랜차이즈는 아니고 모기업이 같은 파인다이닝이었다. 덕분에 직원 찬스로 웰컴드링크도 마시고, 직원들과 인사도 나눴다. 밥을 먹다가 알게됐는데 영국 문화에선 웨이터를 부르지 않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다. 테이블 담당 서버가 와서 챙겨줄 때까지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맞다고 했다. 사실 처음 듣는 얘기였는데 돌이켜보니 웨이터를 부르는 제스처를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나도 그 전까지 웨이터를 찾아 부른 적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는 내가 먼저 웨이터를 찾는 건 좀 멋이 없는 행동이구나 싶어서 식당에 갈 땐 아예 마음을 여유롭게 가졌다. 스타터로 우리는 소고기 타르타르와 연어를 시켰는데, 둘 다 너무 맛있었다. 타르타르 고기가 조금 두껍긴 했는데 소스를 곁들여서 먹으니까 오히려 씹는 즐거움이 느껴져서 두꺼운 게 낫다고 생각했다. 스테이크는 미디움 웰던으로 시켰는데 웰던으로 나왔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이 날 하이라이트는 소믈리에 동행이 고른 와인이었다. 바롤로, 또는 네비올로라는 품종이었는데 나는 처음 접하는 와인이었다. 근데 입에 대자마자 너무 맛있어서 놀랐다. 그리고 동행이 직접 와인 테이스팅하는 모습도 프로페셔널해서 멋있었다. 예전에 수선이랑 선영 누나가 우리집 놀러왔을 때 선영 누나가 우리집 인테리어 컨설팅해줄 때 느꼈던 멋짐이었다. 수선이도 누군가가 본업할 때 모습이 멋지다고 글을 썼었는데, 또 한 번 공감했다. 식당이 타워브릿지 바로 옆에 있는 식당이어서, 밤에 조명 켜진 타워브릿지도 함께 구경했다. 밤의 타워브릿지는 옛날처럼 예뻤다.

  그러다 해가 어둑어둑해질 때쯤 자리를 옮기기로 했는데, 동행분의 업장이 바로 옆이어서 잠깐 얼굴만 비추고 가기로 했다. 이 때 우린 정말 잠깐 얼굴만 비추고 갔어야 했다. 가자마자 많은 직원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근데 반겨주는 정도가 좀...격하달까. 그런 장면을 처음 본 나한텐 낯설고 당황스러운 장면이었다. 보기엔 걱정이 살짝 됐지만 당사자가 그냥 그러려니하고 넘겨서 더 이상 신경 쓰진 않았다. 이 날 우리는 가자마자 샴페인 한 잔씩 얻어 마시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아까 인사를 격하게 했던 브라질 직원(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직원A라고 해야겠다.), 업장 매니저(이름이 티토였던 것 같다), 티토의 여자친구인 더 시니어급 매니저(또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시니어매니저 B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바텐더(이름이.....바텐더 C다.). 이렇게 네 명을 우린 만났는데, 결론만 말하면 바텐더와 시니어를 제외한 나머지 매니저들이 싸웠다. 이 업장이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매니저가 있다고 해서 모든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닌 듯 했다. 주류를 다루는 바는 온전히 바텐더의 영역이어서, 매니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사건의 발단은 그 브라질 직원 A가 우리에게 맥주를 4개 가져다준 것이었다. 우리가 매장을 가기 전부터 동행이 오늘 바텐더 누구냐고 물어보는 게 좀 이상하긴 했다. 알고보니 그 날 바텐더C가 스페인에서 온 신입이었는데, 엄청난 FM이라 융통성이 없는 걸로 직원들 사이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직원들이 몰래몰래 마시는 것도 모두 체크해서 빌을 달아놓는다고 했다. 우리가 갔을 때도 그 브라질 직원A가 환영의 의미로 맥주 4병을 들고 왔다. 그러다가 매니저 티토가 우리한테 반갑다고 매장에서 칵테일을 한 잔씩 선물로 준다고 했었다. 그래서 우리 테이블엔 처음 웰컴드링크 샴페인 잔과 맥주병, 칵테일 잔까지 엄청 많이 있었다. 그러다 우리가 술을 마시던 도중에 바텐더C가 갑자기 카드기를 들고 계산을 하러 왔다. 직원 A가 계산을 하길래 '아 아까 가져온 맥주 계산하나보다.'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그 매니저 티토가 매장에서 준다고 했던 칵테일을 직원 A가 계산한 것이었다. 이 때부터 갈등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심지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맥주 4병은 가져오는 길에 바텐더 C한테 걸려서 A가 따로 계산을 했었고, 티토가 선물한다던 칵테일은 바텐더 C가 빡쳐서 우리 테이블로 결제하러 온 건데 A가 그냥 카드로 결제를 해버린 것이다. 이걸 알게된 티토가 화가 나서 보란듯이 맥주 2병을 안에서 들고 와서 우리 테이블에 올려놓고 뚜껑을 땄는데, 바텐더 C가 방금 뚜껑 딴 맥주도 계산 안됐다고 그냥 갖고 들어가버렸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티토는 바텐더 C한테 따지러 갔고, 술이 좀 들어갔던 동행도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냐고 따져 물으러 들어갔다. 직원 A도 따라 들어가서 야외 테이블엔 나와 두 번째 동행, 그리고 시니어 매니저 B만 남아있었다. 업장 안에서는 이미 언성이 높아질대로 높아져서 욕설이 들렸고, 티토는 유니폼을 벗으면서 싸우려고까지 했다. 우리는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럽고 불편해서 시니어 매니저 B와 이야기하면서 우리 때문에 싸우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 불편하다고 했다. 시니어매니저 B는 바텐더 C는 자기 할 일을 한 것이고,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보기엔 좀 꽉 막혀있을 수 있겠지만 바텐더 C가 잘못한 건 없다, 차라리 바텐더C 없는 자리에서 자기한테 말을 했으면 이렇게까진 안됐을 것 같다면서 우리랑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상황이 심해지는 것 같아서 시니어 매니저 B까지 티토를 말리러 들어갔다. 그렇게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는 얼른 집에 가기로 하고 자리를 떴다. 직원들에게 집에 간다고 인사하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가는 길 내내 우린 '진짜 돈 주고도 못하는 경험했다'면서 불편하면서 신기해했다. 

  이미 한 시가 넘어서 집에 바로 가는 차는 없었고, 중간에 한 번 갈아타야했다. 잠이 쏟아지던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선 채로 졸다가 다리가 풀려서 넘어질 뻔 했다.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학생들이 괜찮냐고 해서 그냥 졸릴 뿐이라고 했다. 버스를 잘 갈아타고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려하는데 바깥에서 혼자 술을 먹던 백인 친구가 따라 들어와 대뜸 어깨동무를 하더니 술을 먹자고 했다. 이미 좀 취해보이던 친구였기도 하고 내가 너무 피곤했어서 내일 먹자했는데 자기는 내일 떠난다고 했다. 유쾌한 친구 같아서 한 잔 마실까 싶긴 했는데 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 너무 졸려서 안되겠다고, 안전하게 여행하라고 인사를 나누고 호스텔에 들어가 잠에 들었다. 런던에서의 밤은 매일 피곤하게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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