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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로운 Aug 25. 2022

여행을 가려고 그만둔 건 아닌데(2)

런던 - 잠이 오더라도 뮤지컬은 봐야지

  런던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쯤 걸렸다. 작은 비행기였고 옆자리에 아무도 없어서 좀 편했다. 런던 히드로 공항은 들어오는 사람들이 유럽에서 가장 많은 공항으로 악명이 높다더니, 사람이 진짜 엄청 많았다. 입국 심사하는 줄은 특정 국가 여권 소지자 줄과 일반 여권 소지자 줄이 구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반 여권 줄이 엄청나게 길었다.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는 일반 줄에 서야 했다. 일반 여권 줄에 얌전히 서 있는데, 아까 봤던 그 한국인 학생분이 갑자기 특정 국가 여권 소지자 쪽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내가 서 있는 줄이 맞다는 걸 알고 있긴 했지만 줄이 너무 길어서 일단 반신반의하고 따라갔다. 일반 줄은 입국심사장을 지나서 저어어 뒤에까지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는데, 특정 국가 줄은 입국심사장 안에서 끝날 정도로 줄이 짧았다. 입국 심사장으로 바로 들어가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근처 직원에게 한국 여권을 보여주면서 여기 맞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했다. 아 망했다, 라는 생각으로 돌아가려는데 직원이 일반 여권 줄 중간을 열어주면서 그냥 여기로 들어가라고 했다. 뭔가 합법적 새치기를 한 기분이어서 눈치가 보였다. 보니까 일반 여권은 자동 입국 심사가 되고, 그 특정 국가는 일반 입국심사를 해야해서 심사관을 거쳐야 했다. 그래서인지 특정 국가 줄이 훨씬 짧기는 했는데, 들어가는 속도는 일반 여권 줄이 더 빨랐다. 나중에 보니 그 한국인 분은 여전히 그 특정 국가 줄에 서있었다. 다른 나라 국적을 갖고 있나보다 했다. 내 차례가 돼서 그 입국 심사 기계 안으로 들어갔는데, 기계가 날 인식을 자꾸 못했다. 안 그래도 새치기한 느낌이라 눈치가 보였는데 기계까지 말썽이었다. 뒷사람들한테 괜히 눈치 보여서 허둥지둥댔더니 그제서야 직원이 허공에 대고 외치는 소리가 좀 들렸다. 여권 사진처럼 모자도 벗고 안경도 벗으라고 했다. 나는 모자도 쓰고 있었고 안경도 쓰고 있어서, 여권 사진이랑은 전혀 다르게 생겼을 터였다. 모자도 안경도 벗었더니 그제서야 통과가 됐다. 민망함에 서둘러 입국장을 빠져나갔다. '아 이제 짐 찾아야하니 2차전이구나' 생각하고 짐 찾는 곳으로 갔더니 가자마자 내 짐이 컨베이어벨트를 돌고 있는 게 보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서 바로 챙겼다. 근데 짐 찾는 곳을 둘러보니 바닥에 주인 없는 짐이 진짜 엄청나게 많이 쌓여있었다. 곳곳에 주인 없는 짐 무더기가 있어서 보통 심각한 게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고서 바로 밖으로 나갔다.

  런던에서의 숙소는 2개 다 빅토리아 역 근처로 다 잡았다. 빅토리아 역으로 잡은 이유는 사실 교통 때문이었다. 계획 처음 짤 때만 해도 런던에서 암스테르담으로 갈 때 유로스타 기차를 탈 생각이었다. 그래서 숙소를 모두 유로스타를 탈 수 있는 빅토리아역으로 잡았었다. 근데 정작 암스테르담으로 갈 땐 기차를 안 탔다. 정확히는 못 탔다. 한국에서 이미 유레일패스를 다 사고 개통까지 한 다음에 찾아보니까 유레일패스로 이용 가능한 자리는 이미 며칠 치가 만석이었다. 일반 좌석으로 타고 가기엔 20만원 넘게 내야 했고, 오히려 비행기로 가는 게 더 쌌다. 공항으로 갈 때도 굳이 빅토리아 역에서 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빅토리아 역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치만 이미 다 예약도 해버린 마당에 그냥 가기로 했다. 아무튼 공항에서 빅토리아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웬 중국인 모자가 기계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괜히 도와주기 민망해서 난 그 옆 기계로 바로 가서 티켓을 끊었다. 내가 티켓 끊는 걸 보더니 어머니 되시는 분이 갑자기 서툰 영어로 날 붙잡으셨다. 눈치로 이미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는 걸 알고 있던 나는 간만에 중국어 힘겹게 끄집어내서 도와드렸다. 근데도 뭔가 잘 안돼서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했는데 아드님이 처음부터 안하려고 고집을 부렸다. 자꾸 틀린 비밀번호만 입력하고 있길래 다른 기계에서 해보라고 했는데도 그냥 거기서만 하셨다. 그렇게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버스 시간이 다가왔다. 난 이제 가봐야한다고 일단 다른 기계에서 해보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서 버스 타는 데로 갔다. 근데 버스가 연착됐다는 문구가 보였다. 한 10분 정도 터미널에서 앉아있다가 다시 로비로 갔는데 중국인 모자가 여전히 다른 분을 붙잡고 물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바로 티켓을 뽑은 것 같았다. 어떻게 뽑았는지 궁금했는데 곧 버스가 진짜 오는 시간이라서 바로 버스 타러 갔다.

  빅토리아 역까지 가는 길에 사진을 좀 찍었다. 내가 기억하는 빅토리아 역이 아니어서 낯설었다. 좀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파리에서 이미 진을 뺄만큼 다 빼서 너무너무 쉬고싶던 상태여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숙소를 찾아갔다. 혹시나 얼리 체크인이 되는지 물어봤지만 택도 없었다. 그래서 짐만 맡기고 작은 슬링백에 지갑과 여권, 보조배터리만 챙겨넣고서 바로 밥 먹으러 갔다. 호텔 직원분이 추천해준 곳으로 가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핌리코 프레쉬 라는 식당이었는데, 근처에서 좀 인기 많은 아침식사 식당인 듯 했다. 가게가 손님들로 꽉 차 있었고 직원들도 엄청 분주했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랑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바 자리에 앉아있는데, 옆에 웬 중국인 여자가 앉아서 전화를 하더니 갑자기 울먹거렸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정말 엄청 신경 쓰였는데 아는 체 하는 게 더 웃긴 것 같아서 그냥 모른 체하고서 나온 밥을 먹었다. 버섯이랑 계란후라이랑 빵이랑 소세지랑 베이컨이 나왔는데, 구성 자체는 평범했다. 소시지 질감이 좀 풀어지는 느낌이라 특이했다는 거 빼곤? 버섯이 좀 짜고 별로였는데 그래도 배고파서 밥은 깨끗이 다 먹었다.

  밥을 먹고 나서 소호를 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멀지도 않았고, 나은이가 소호에서 쇼핑을 해달라고 간곡히 얘기했던 게 기억이 났다. 보니까 나이키 타운이라는 좀 큰 매장이 있길래 런던의 나이키는 어떤 다른 제품이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전철 타러 가는 길에 빈티지 샵이 있었다. 들어가보니 이것 저것 예뻐보이는 소품들이 많길래 더 구경하고 싶었는데, 내 꼴이 별로기도 하고 해서 살짝 둘러보기만 하고 바로 소호로 갔다. 나이키 타운은 우리나라 강남 나이키 매장처럼 크기도 컸고 4층이라 층별로 다른 라인을 갖고 있었다. 1층은 어떤 가벽이 세워지고 있는 걸로 보아서는 이벤트를 하는 층 같았다. 층마다 사람들이 진짜 많았는데 3층에 에어포스 존이 있다길래 구경하러 갔다. 대체로 다 본 제품들이긴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눈에 꽂혔다. DR0155-100이라는 제품인데, 흰검 조합이 특이한데다 우리나라에선 본 적 없는 제품이었다. 근데 일단은 살 생각까지는 없어서 대충 둘러보고 나왔다. 나은이가 소호에서 쇼핑을 하라길래 쇼핑할만한 곳이 없나 여기저기 둘러보고 다녔다. 난 좋은 향 나는 제품을 워낙 좋아해서 평소에도 호텔 어메니티나 향수 브랜드, 프레그런스 브랜드도 좋아하는데, 돌아다니다 보니 몰튼브라운 샵이 있었다! 쇼핑을 하려면 이런 게 딱이다 싶어서 씩씩하게 들어갔다.(실제로 '쇼핑을 하려면 이게 딱이지' 라고 생각했다.) 가자마자 직원 분이 환하게 맞이해주시길래 워시제품 보러왔다고 했다. 좀 큰 제품들을 보여주시길래 기내에 들고갈 수 있는 정도의 사이즈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자 작은 사이즈 3개에 25파운드로 팔고있는 세트를 소개해주셨다. 이거면 됐다는 생각으로 신나서 이 향 저 향 맡아봤다. 시그니쳐 향이 블랙페퍼라고 말씀해주셔서 맡아봤다. 시그니처가 오히려 내 취향엔 안맞았고, 오히려 그 옆에 있떤 인디안 그레스라는 향이 더 내 취향이었다. 작은 사이즈는 선택지가 많지 않아서 다른 향들을 더 맡아보진 못했지만 인디안 그레스로 이미 충분했다. 성공했다는 뿌듯함과 3개짜리 트레블세트를 안고 매장을 나왔다. 맥도날드에 들러서 티라미수 맥플러리도 먹고(반만 먹고 버렸다) 카나비 주빌리라는 특이해보이는 골목도 발견해서 여기저기 구경했다. 장난감 백화점 가서 예봄이가 좋아할만한 제품은 뭐가 있나도 보고 해리가 갖고싶어한 별이 빛나는 밤 제품도 있는지 찾아봤다.(없었다.) H&M에 들러서 옷도 구경하다가 뭔가 마음에 드는 옷이 있어서 고민 끝에 옷도 하나 샀다.(그리고 이 옷은 여행 내내 아주 예쁘게 잘 입고 다녔다.) 그렇게 구경하다가 호텔 체크인할 시간이 다 되어서 후다닥 체크인 하러갔다. 숙소 근처에 도착하니 한 15분 정도 남아서 근처를 돌아봤다. 숙소 뒤쪽에서 좀 특이한 동네 가게를 발견했다. 안에서 커피도 파는데 수제 제품들도 팔고, 이야기도 나누러 오라는 'CAVE' 라는 곳이었다. 궁금했는데 일단 체크인이 급선무여서 시간이 되자마자 체크인을 했다.

  가자마자 되게 친절한 남자 직원분이 맞아주셔서 기분 좋게 체크인을 했다. 내 방은 4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는 숙소였어서 짐을 들고 올라가야했다. 내가 4층까지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갈 수 있을만큼 튼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숙소를 고를 때 엘리베이터가 있고 없고를 크게 신경쓰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문득 감사했다. 숙소는 작지만 편안한 곳이었다. 트윈룸이어서 침대도 2개고, 헤어드라이기도 있었다. 헤어드라이기를 처음에 쓰려고 했더니 작동하지 않았어서 전화로 헤어드라이기가 안된다고 얘기했더니 그 친절한 남자 직원분이 올라와서 설명해주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올라오는 사이에 작동법을 깨달았지만 이미 계단을 박차고 뛰어올라오는 직원의 발소리가 들렸다. 이미 어떻게 쓰는지 알고 있었지만 설명해주는 내내 모르는 척하고 연신 오오 알려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직원분이 방을 나서자마자 참을 수 없는 찝찝함에 바로 샤워를 했다. 얼마나 모자를 오래 쓰고 다닌건지 샴푸를 2번해도 거품이 제대로 안나서 머리만 4번을 감았다. 씻고 나왔더니 세상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입고 있던 양말과 속옷과 에어리즘을 바로 손세탁했다. 세탁을 하고나서야 알았는데 에어리즘은 꽉 쥐어짜면 옷이 늘어난다. 지금까지 에어리즘을 빨고나면 왜 맨날 늘어나서 원피스 사이즈가 되는지 의아했는데,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무튼 그렇게 빨래를 마치고서 낮잠을 잤다. 이따 저녁에 봐야할 레미제라블을 보려면 체력을 아껴야했다. 반쯤 열린 창문을 보다가 날이 덥지 않아서 좋다는 생각을 하고는 짧게 낮잠에 들었다.

  5시로 맞춰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낮이기도 하고, 새로운 자리에서 자는 게 낯설어서 몸이 아직은 푹 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뮤지컬을 보기 전에 저녁을 먹으려고 아까 H&M에서 산 옷으로 갈아입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아까 아침을 먹으면서 맞은 편 가게가 피쉬앤칩스를 파는 것 같길래 구글맵으로 찾아봤다. 평이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박지성이 런던에 살 때 자주 왔던 집이라는 후기가 한 몫 했다. 괜히 반가운 마음에 이번 여행의 피쉬앤칩스는 그 곳에서 먹기로 했다. 5시 오픈에 맞춰서 가게에 들어갔고, 피쉬앤칩스와 제로콜라를 시켰다. 8년 전에 먹은 피쉬앤칩스는 상상 이상으로 실망스러운 음식이었는데, 이미 맛을 알고 있어서 그랬던 건지 그냥 이번에 먹은 곳이 잘한 건지 모르지만 맛이 괜찮았다. 오히려 8년 전에 먹은 곳보다 감자튀김이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같이 준 타르타르 소스랑 찍어먹고 소금 뿌려먹고 했더니 또 한 끼 맛있게 먹었다. 그 날 그 가게에는 어떤 직원이 첫 출근을 한 것 같았다. 점장으로 보이는 분이 따라다니면서 도와주고, 새로온 직원은 연신 뚝딱대는 모습이 마치 알바 처음 했던 여러 날들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괜히 안쓰러워서 여행 중 처음으로 가게에 팁을 줬다. 카드기를 들고 온 점장에게 직원이 새로 온 분이냐고 물으니 맞다고, 아직 배우고 있다고 하셨다. 금방 익숙해질 것이라고 말하고서 가게를 나왔다.

  밥을 빨리 먹은 덕에 뮤지컬 시작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서, 아까 구경했던 카나비 주빌리도 좀 더 구경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카나비 주빌리는 몇 개 블록에 걸쳐있는 작은 상업지구인데, 골목 안에 닥터마틴 같은 패션샵도 있고, 파이브가이즈 같은 식당도 많았다. 그리고 해리가 리버티 백화점이 크루엘라에 나온 곳이라고 이야기해줘서, 바로 옆에 있던 리버티 백화점도 안에 들어갔다 왔다. 체크인 전에 지나쳤을 땐 그게 리버티 백화점인지도 몰라서 스쳐지나만 갔는데, 들어가보니 크루엘라에서 본 장면들이 딱 생각이 났다.(그래서 파리 가는 비행기에서 크루엘라는 보고 잘걸하고 후회했다.) 쇼핑은 크게 관심 없어서 거울로 사진이나 하나 찍고서 바로 뮤지컬 보러 갔다. 레미제라블을 공연하는 손더하임 극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사람들이 줄을 엄청 길게 서있었다. 어차피 줄이 빠지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아보였다. 옆으로 살짝 빠져나와서 레미제라블 포스터와 극장 사진을 계속 찍었다.

  사실 뮤지컬엔 문외한이라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해리가 예전에 런던에서 본 뮤지컬들이 기억에 깊게 남았다고 한 번 쯤은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얘기에 하나만 우선 볼 생각으로 한국에 있을 때 찾아봤다. 위키드, 오페라의 유령, 맘마미아 같이 엄청 유명한 작품들 사이에서 그나마 레미제라블만 내가 스토리와 음악까지 아는 작품이었다. 또 그 작품을 영화로 처음 봤는데, 그 영화가 정말 좋았어서 레미제라블을 골랐다. 내가 앉은 자리는 2층 가운데 맨 앞줄 제일 오른쪽 좌석이었다. 런던 극장 좌석을 1층은 stall, 2층은 dress circle, 3층은 grand circle이라고 부르는데, 보통 2층 맨 앞좌석이 가장 좋은 자리라는 글이 있었다. Dress circle은 복장 예절을 갖추고 앉아야하는 자리라서 그 이름이 붙었다. 그래서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도 옷을 신경써야하나 걱정을 살짝 했었다. 막상 가보니 그렇게 차려입은 사람은 또 찾아보기 어려웠다. 내 옆자리엔 영국 소도시에서 온 부부가 앉았는데, 아내분의 40번째 생일을 맞아서 보러왔다고 했다. 벌써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남편 분은 악의 없는 유쾌한 분이었는데, 우리나라 지방에 사시는 어르신 분들이 가끔 악의 없이 뱉는 차별성 발언들처럼 악의 없이 인종차별성 발언을 하셔서 살짝 무안했다.(내가 스물 여덟이라고 했더니 아시아인 피부라 그런지 훨씬 어려보인다는 식이었다.) 그래도 내 자리가 시야제한 석이어서 내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봤는데, 자기 쪽으로 넘어와서 봐도 된다면서 배려해줬다. 덕분에 시야 제한 석이지만 제한 없이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셋이 셀카도 찍었다. 진짜 악의 없는 시골 사람.. 뮤지컬은 진짜 너무 좋았다. 전용 극장이 있는 작품들이 왜 인생 작품으로 남는지도 알 수 있었던 게, 일단 무대 장치들이 완벽하게 마련되어 있어서 연출이 기막히게 훌륭했다. 스포인가 싶어서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자베르 다리 씬과 파리 장벽 전투씬에서 조명과 영상들이 막 아주 막..... literally 입이 떡 벌어졌다. 그리고 난 음악 때문에라도 레미제라블을 몇 번은 더 보고 싶었다. 1막 마지막 곡이 One day more 였고, 2막 마지막 곡이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었다. 솔직히 난 이미 30시간 이상 잠을 멀쩡히 못 잤던 채로 보기도 했고, 뮤지컬이 3시간정도 되는 길이였기 때문에 중간에 눈이 감기기도 했다. 근데 마지막 곡들이 나올 때는 꾸벅꾸벅 졸다가도 한순간에 벅차올랐다. 21살 때 영화관에서 비긴 어게인 보면서도 가슴을 부여잡을 정도로 벅차했는데, 그때 느낀 수준으로 벅찼다. 곡 끝나자마자 너 나 할 것 없이 다 같이 기립박수를 쳤다. 1막이 끝나고 인터미션 때 좀 특이했던 게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레미제라블 공연장은 하겐다즈를 팔았는데, 난 사실 졸리기도 했고 1막이 너무 화려하게 끝나서 아예 뮤지컬이 끝난 줄 알고 나가려 했다. 나가는 문에서 직원이 티켓 소지하고 나가야한다는 얘기를 안했다면 아마 집에 갔을 지도 모른다. 직원 말을 듣고 나서 아직 남은 내용이 많다는 걸 떠올리고서 그냥 기지개를 좀 키다가 들어와서 마저 관람했다.

  뮤지컬이 끝나고 나오니 이미 해는 져있었는데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소호 쪽이 확실히 번화가긴 번화가였다. 집에 가는 2층 버스를 타면서 창 밖을 보니 지나치는 거리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특히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가 연극으로 제작이 되어서 그 작품을 상영하는 극장 앞을 지나갔는데, 마침 끝났는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2층버스 제일 앞줄에 앉아 창문에 빛이 반사되지 않도록 핸드폰을 바짝 붙여서 돌아가는 길을 영상으로 쭉 담았다. 이미 너무너무 피곤했던 터라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잠에 들었다. 피곤했어도 눈에 담은 게 많은 날이라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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