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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로운 Aug 10. 2022

여행을 가려고 그만둔 건 아닌데(1)

유럽을 다녀오긴 했다.

  떠나기 전날 밤에 짐 다 챙긴 후에 신경 써서 집을 치워두고 잤다. 여행 중에 해리가 우리 집에 친구들과 놀러 올 계획이었어서 좀 신경 써서 치우느라 잠에 늦게 들었다. 제때 못 일어날까봐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알람을 듣고서 바로 깼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리 친구분들께 잘 부탁드린다는 쪽지랑 함께 우리 집 사용 설명서를 적어두고 갔다. 그리고 예약해둔 택시를 타고 공항버스를 타야 하는 관악역으로 향했다. 올 시간이 지나도 공항버스가 보이지 않았다.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10분 정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니 버스가 왔다. 버스 안에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한 분이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셨었는데, 그 분을 태우자 자리가 꽉 찼다. 예약 안 했으면 못 탈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떠나기 전날부터 육개장이 그렇게 먹고 싶었다. 근데 타이밍을 놓쳐버려서 공항에서 먹을 생각으로 버스 안에서 공항 식당을 검색해봤다. 아침 6시엔 공항에서 육개장을 파는 곳이 없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아쉬운 대로 한식당에 가서 소고기 미역국을 시켰는데 간도 짜고 고기도 허접했다. 내가 끓인 미역국이 훨씬 더 맛있다고 해리한테 말했다.

  공항에서 체크인을 하면서, 마지막까지 짐을 부칠지, 비행기에 들고 탈지 고민했다. 요새 유럽 공항 상황이 말이 아니라고 했다. 또 하필 내가 이용해야 하는 히드로 공항이랑 스키폴 공항이 가장 심하다고 했다. 근데 파리에서 경유할 때 시간이 엄청 길어서 짐을 못 싣고 출발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또 해리가 걱정 안 해도 될 거라고 해서 짐을 부치기로 했다. 결과적으론 이게 잘한 선택이었다. 원래는 파리에서 돌아다니는 동안 6유로 내고 캐리어를 맡길 생각이었는데 돈을 아꼈다.

  파리까지 가는 데엔 14시간이 걸렸다. 이전부터도 긴 노선이긴 했는데 전쟁 때문에 노선이 바뀌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상공을 지나갈 수가 없다 보니 중동까지 직선으로 간 다음에 위로 꺾는 노선이었다. 예전에 미국 갈 때도 장거리 비행이 괜찮아서 걱정을 하진 않았는데 내 생각보다는 힘들었다. 복도석이었으니 망정이지 창가석이나 가운데석이었으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가는 내내 런던과 암스테르담 배경인 영화를 보려고 5개 정도 받아갔는데, 한 2개 정도가 한계였다. 연속으로 집중하기도 힘들었고, 일단 너무 피곤해서 계속 잤다. 그래도 받아갔던 영화 중에서 크루엘라는 다시 보고 잘 걸 그랬다.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승무원에게 간식 선물해주고 고맙다고 하고 그러면 엄청 좋아한다는 영상을 본 기억이 있어서, 공항에서 레모나랑 말랑카우를 사뒀다. 에어프랑스 직원 분들이 지나가실 때 말랑카우를 하나씩 드렸더니 엄청 좋아하셨다. 그 유튜브 영상처럼 뭘 더 챙겨주거나 하진 않으셨지만 찐텐으로 즐거워하시는 게 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옆자리 모녀분들께도 하나씩 드렸더니 좋아해 주시고 나중엔 간식도 나눠주셨다.

에어프랑스는 국적기처럼 간식을 나눠주진 않는다. 대신 중간에 셀프바가 있어서 과일컵이나 과자, 작은 햄치즈 샌드위치 같은 걸 언제든 먹을 수 있었다. 기내식이 두 번 나왔지만 그래도 허기질 때가 있었어서, 배고플 때마다 과일컵이랑 햄치즈 샌드위치를 꺼내 먹었다. 엄청 대단한 맛은 아니었어도 요기를 해결하기에는 충분히 맛있었다.

  파리에 내리자마자 유심부터 심었다. 파리에서 14시간 경유하는 동안의 계획을 칼같이 세워오진 않았지만 대충 뭐부터 할지는 정하고 예약도 해뒀었다. 근데 내리자마자 유심이 제대로 작동을 안 했다.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혼자 공항 의자에 앉아서 30분을 낑낑댔다. 유심 설명서를 보기도 하고 인터넷으로 검색도 해봤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시간이 아깝기 시작해서 그냥 공기계처럼 쓰자는 생각으로 지도만 다운로드하고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와이파이를 연결해서 이렇게 저렇게 했더니 갑자기 인터넷이 됐다. 천만다행이었다. 오페라 역에 내려서 바로 라파예트 백화점 구경하면서 소금빵을 먹고, 바로 에펠탑 쪽으로 넘어가 예약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에펠탑 구경을 할 계획이었다.

  파리는 생각보다 추웠다. 그저께까지 역대급 폭염이었다고 해서 문제가 심각했다더니, 많이 평년 기온으로 돌아왔던 것 같았다. 근데 햇볕은 쨍쨍해서 나중엔 더워서 땀까지 흘렸다. 날이 맑은 건 좋지만 이미 열몇 시간째 씻지도 못하고 꾀죄죄한 채로 있어서인지 은근히 더위가 거슬렸다. 라파예트 백화점에서 소금빵을 찾아봤는데, 소금빵을 파는 곳을 찾지 못했다. 한 3바퀴는 돌았는데 못 찾았다. 직원에게 물어볼까 생각도 하긴 했었다. 그렇지만 식품 매장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못 찾은 걸로 봐서는 이미 다 팔린 것이겠거니 하고 말았다. 대신 사람들이 줄 서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샀다. 거의 7천원 돈이었는데 양이 많기도 했고 맛도 특별하지 않았다. 입맛을 더 버리기 싫어서 절반만 먹고 버렸다.

  라파예트 백화점은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백화점 중 하나라고 했다. 특히 돔으로 된 천장이 예쁘다고 해서 봤는데, 진짜 화려하고 웅장했다. 그래서 광각으로 사진 찍었는데 잘 안 담겼다. 백화점 쇼핑은 원래도 별로 감흥이 없어서 돔 천장 사진을 찍은 후엔 대충만 돌아보고 말았다. 바로 에펠탑에 밥을 먹으러 갔다. 기존에 예약했던 시간보다 좀 더 늦게 가는 걸로 예약 시간을 바꾸고, 승미님이 알려주셨던 역에 내려서 에펠탑을 가장 예쁜 전경으로 봤다. 날이 맑은 날에 탁 트인 전경을 봐서 그런지 진짜 우뚝하게 솟은 에펠탑이 멋있어 보였다. 에펠탑이 이미 보존 기한을 많이 넘겨서 부식이 심한 상태라고 주영이가 얘기해줬던 게 기억나서 좀 더 오래 봤다. 사진도 위치마다 다른 느낌으로 담겨서 계속 찍었다. 8년 전에 파리에 처음 왔을 땐 에펠탑 근처에 호객 행위하는 사람도 많았고, 위험해 보이는 사람도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엔 전혀 없었다. 그래서 좀 안심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더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에펠탑으로 출발한 시간이 7시쯤인데 해가 질 생각을 전혀 안 했다. 진짜 우리나라 3시 정도의 빛이었다. 근처에 그늘이 좀 있길래 그늘로 넘어가서 마트를 찾았다. 목이 너무 말랐다. 걸어서 3분쯤 지나니 마트가 나와서 물 한 병을 샀다. 물병을 들고 바로 식당으로 갔다. 이번 여행엔 돈을 나름 넉넉히 들고 와서 맛있는 걸 많이 먹을 생각이었다. 파리에서도 평이 괜찮은 식당을 찾았다. 찾아보니 가격도 생각보다 합리적이어서 들어갔는데, 손님이 혼자 오는 경우는 많지 않은지 혼자 온 손님은 없었다. 코스도 혼자 가면 시키지 못했고 단품으로 코스를 구성해야 했다. 또 기분 탓이지만 직원들의 서비스도 다른 테이블과 결이 좀 달랐다. 유색인종이셨던 직원 분만 유일하게 친절하다 느꼈는데 내 테이블 담당이셔서 다행이었다. 음식은 스타터, 메인, 디저트까지 3가지 시켰는데 셋 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은 아니었다. 그래도 메인이었던 참치 스테이크가 처음 먹는 식감이어서 맛있었고, 디저트 위에 올라갔던 아몬드 폼이 엄청 괜찮았다. 누군가랑 코스로 먹었다면 조오금 더 만족도가 높았겠지만 혼자 가서 민망했다. 빨리 나가고 싶어서 다 먹자마자 계산서를 받으려고 직원 눈을 엄청 열심히 마주쳤다. 친절했던 직원 덕에 빨리 나갈 수 있었다.

  밥을 먹고 나오니 그제야 해가 지고 있었다. 해 지는 에펠탑을 보려고 에펠탑 뒤쪽 공원으로 갔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돗자리를 깔고 노을을 구경하고 있었다. 노을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에펠탑을 보니까 느낌이 또 새로워서 사진을 연신 찍었다. 시간이 좀 여유롭게 남았어서 근처 길거리 풍경까지 사진으로 담았다. 알고 보니 유럽의 여름은 해가 10시 넘어서까지 떠있기도 했다. 밤 10시에 루아씨버스를 타고 다시 공항으로 갈 때 해가 졌다.

  샤를 드골 공항에서의 기억은 멍청하고 끔찍했다. 나는 샤를 드골 공항 2터미널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는데, 내가 착각해서 3터미널로 갔다. 내 원래 계획은 일찍 출국심사를 마치고 탑승장 안으로 들어가 편안하기로 유명한 스팟에서 꿀잠을 자는 것이었는데, 3터미널에서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이나 충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해서 보니까 내가 타야 하는 곳은 2터미널이 맞았고, 그때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어서 2터미널로 가는 버스는 진작에 다 끊겼었다. 직원에게 2터미널로 가는 방법을 물어보니까 새벽 3시에나 다음 버스가 온다고 했다. 걸어가기는 40분이나 걸리고 무엇보다 인도가 없어서 못 간다고 했다. 1초라도 편히 쉬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든 걸어가려다가, 내가 내렸던 버스 정류장 쪽에서 전철 표시를 본 게 기억이 나서 정류장으로 걸어가 봤다. 2터미널로 가는 전철이 있는 것 같길래 직원을 붙잡고 물어봤다. 여기서 2터미널로 어떻게 가냐고 했더니 전철 타면 5분이면 간다고 했다. 돈은 어디서 내고 전철은 어디서 타냐고 물어보니까 경쾌하게 it's free! 라고 하고 손가락으로 타는 곳을 알려줬다. 신나서 진짜로 전철 타는 곳까지 달려갔다. 2터미널에 가는 방향도 한 번 잘못 탈 뻔했지만 잘 타서 2터미널에 도착했다. 계획대로 편히 쉴 생각을 하면서 2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이게 웬 걸 출국 심사가 다 끝나고 문이 닫혀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24시간 출국 심사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가보니까 공항 안에도 사람들이 없어서 휑하고 직원들도 거의 안 보였다. 심지어 처음엔 내가 타는 터미널 입구도 닫혀있어서 당황했었는데, 다시 걸어가 보니까 큰 통로는 막아두고 사람만 오갈 수 있는 문을 열어뒀었다. 그래서 다시 가보니 출국 심사는 이미 불가능했다. 6시간을 꼼짝없이 공항 로비에서 버텨야 했다. 맥도날드 아이스크림이 너무 먹고싶었는데 매장은 이미 문을 한참 전에 닫은 시간이었다. 큼지막한 백팩을 안고 긴 벤치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누워서 자고 싶었는데 자리마다 손잡이가 있어서 눕지도 못했고, 공개된 로비라서 누가 내 짐을 훔쳐갈 것 같아서 맘 편히 잘 수도 없었다. 그렇게 눕지도 잠들지도 못한 불편한 자세로 5시간을 버텨야 했다. 일찍이라도 여는 가게가 없을까 싶어서 중간중간 돌아다녀도 봤지만 허탕이었다. 자판기에서 물이랑 마들렌이나 하나씩 뽑아서 배를 채웠다. 하루 가까이 양치도 못한 게 너무 찝찝해서 예전에 선물 받은 주황색 치약으로 양치도 했다. 2시간쯤 앉아있으니 의자도 불편해졌다. 다른 곳을 찾아다니면서 바닥에도 앉고 어디 기대기를 반복하다 결국 출국 심사하는 곳 앞 바닥에 앉아서 기다렸다. 이 때는 잠도 그냥 포기한 상태였다. 

  한 30분 기다렸나, 누가 출국 심사하는 쪽으로 걸어가더니 다시 나오질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단 출국심사 시작 전이기도 하고, 이미 그 전에도 몇 명이 들어갔다가 돌아 나온 걸 본 터라 또 나오겠거니 하고 관심을 끄고 있었다. 근데 그 사람이 안 나오길래 살짝 봤더니 몇 명이 더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근처에서 나처럼 기다리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을 놔두고 서둘러 짐을 챙겨 들어가 봤다. 직원 한 명이 출근해서 출국 심사를 하고 있었다! 신나서 나도 여권 보여주고 짐 검사도 하고 빨리 들어왔다. 4시간 반 만에야 출국장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땐 이미 비행기 출발 2시간 반 전이라서 잠을 잘 생각은 접었고, 그 편하다는 스팟을 찾아서 누워있고 싶었다. 근데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그 스팟을 찾을 수가 없었다. 더 돌아다닐 바에야 그냥 좀 더 편한 의자에나 앉아있는 게 낫겠다 싶어 그냥 비행기 타는 게이트 앞에 앉아있었다. 해가 밤 10시에 졌는데 아침 6시가 되니까 바로 떴다. 밤이 8시간밖에 안 되는 게 어이가 없었다. 배도 너무 고파서 게이트 근처에 있는 빵집에서 카푸치노랑 크루아상을 사 먹었다. 그런 걸로 배를 채우고 싶진 않았는데, 그냥 그 순간엔 뭐라도 먹고 싶었다. 일찍 와서 앉아있는데, 내 옆옆옆자리쯤에 웬 한국인이 한 명 앉았다. 엄청 어린 학생이었는데 짐이 많았다. 말 걸 생각은 당연히 없었고 그냥 내 할 일이나 마저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짐을 놔두고 어디론가 갔다. 내 앞에 앉았던 외국인 커플들이 띠잉 하면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어차피 사람이 없기도 하고 금방 오겠지 했는데 거진 한 30분을 안 왔다. 그분이 자리를 비운 지 한 15분 지나고서부터는 내가 괜히 신경 쓰여서 한 칸 옆으로 옮겨서 그분 짐 옆에 내 가방을 뒀다. 탑승을 시작했는데도 오질 않아서 내가 슬슬 불안해질 때쯤 저 멀리서 오는 게 보였다. 괜히 말 걸까 봐 서둘러 내 짐을 챙겨서 탑승구 앞에서 줄을 섰다. 그리고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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