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테이프 편지 / C.S 루이스 1942
인류 역사 전반적으로 선과 악은 끝나지 않는 논쟁의 주제였다. 성경에서도 기록된 최초의 갈등과 분열의 시작은 ‘선과 악’의 등장이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인간은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을 스스로 부여했다. 이 과정에서 '뱀'이라는 존재가 인간을 현혹하여 신의 영역을 탐하려고 유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오류일 수 있다. 뱀을 인간 외부의 존재로 낙인찍고 그 책임을 전가하는 굴레를 벗어야만, 우리는 진정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선과 악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외부의 유혹이나 존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선택과 책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선과 악의 개념은 우리 각자의 삶에서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탐구되어야 할 주제임이 분명하다.
세상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기준으로 나뉘었다. 너무나도 명백한 가치로부터 세분화되는 선과 악의 과실로부터 끊임없는 인류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전쟁이라는 비극도, 이데올로기라는 신념도, 착취와 군림이라는 시스템도 구체적 선과 악의 결정권 아래에서 시행되었다. 안타깝지만, 그런 곳에서 신을 호소하는 것도, 신의 결정을 요청하는 것도 아무런 효력이 없다. 신은 선과 악을 가리는 곳에 없다. 대체 숭배물이 되려 하는 부단히 애쓰는 인간만 있을 뿐. 프리드리히 니체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을 초월하는 세계를 제시하며, 이러한 개념이 인간이 부여한 피상적인 기호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취사선택이 인간 존재의 깊은 차원과 다층의 '심연'을 통찰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
전쟁과 폐허의 현실 속에서 C.S. 루이스의 성찰은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보인다. 그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설립의 과정에서 '재건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었으며, 이는 그가 당시 시대를 목격하면서 느낀 안타까운 마음의 반영일 수 있다. 루이스는 전쟁과 갈등이 만연한 시대에 인간 존재의 의미와 신의 역할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그러한 상황에서 정확한 재건의 필요성을 강조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저작인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이러한 성찰을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과 본질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중요한 기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일종의 편지 형식으로 진행되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경험 많은 악마 스크루테이프와 그의 조카이자 제자인 젊은 악마 웜우드로, 스크루테이프는 웜우드에게 인간을 유혹하고 영혼을 지옥으로 끌어들이는 다양한 방법을 조언하며, 웜우드는 이를 통해 악마의 유혹 기술을 배우고 체득해 나간다. 웜우드는 처음에 하나의 인간, 즉 "피실험자" (그는 단순히 한 명의 인간을 가리킴)의 영혼을 타락시키려고 하고. 스크루테이프는 웜우드에게 끊임없이 조언을 보내며 인간을 타락시키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제시한다. 이 소설은 악의 세력에 대한 풍자적인 탐구이자, 한 인간이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고 분별해 나가는 방법에 대한 지침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크루테이프 편지'가 제공하는 인사이트는 ‘신의 법’ 아래에서 기생하는 악마의 ‘재치’와 새로운 ‘모럴 기준 설립’에 있다. 형용 불가한 신의 세계를 간파하기 위해 악마는 새로운 선악과를 인간 마음에 심는다. 악마가 태초에 누릴 수 없었던 권력과 우월감을 쟁취하기 위해 인간의 영혼에 깃든 신과의 연결 지점을 찢어 자신의 보금자리이자 컨트롤타워를 짓는다.
스크루테이프(Screwtape)라는 이름은 고정(Screw)과 묶음(Tape)을 연상시키며, 이는 철저하고 명확한 세계에 대한 욕망을 반영한다. 이 이름은 낯설지 않으며, 정체성과 확실성을 추구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결정권과 통제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스크루테이프'는 인간 내면에 잠재된 복잡한 가능성을 지닌 또 다른 존재로 추정해볼 수 있다. 안으로부터 성찰되지 않고 검거되지 않으며, 밖으로부터 악의 출처를 찾는 행위는 결국 모두 자의적 규탄과 심판이 된다.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결코 창조가 아니다. 완벽한 ‘무無’에서 극소형의 ‘유有’를 창조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이 ‘무無’가 ‘없을 무’가 아닌, 인간 인지 영역 밖에 존재하는 개념이라 ‘무’로 표시되어 있다는 근거가 더 타당하다 (헤겔). 실재하는 것이지만 그 실재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없다는 고백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창조란 그저 있는 것을, 있었던 것을, 그리고 있게 하는 것을 겸허하고 명철하게 바라보고, 느끼고, 나의 삶 안팎에서 구현해 내는 일이다.
‘스크루테이프 편지’는 현실의 배후에서 전쟁과 불안, 좌절과 고통을 초월하는 ‘구원’에 대해 불완전한 화자의 입을 빌려 외친다. 시종일관 ‘진짜’로부터 ‘가짜’를 걸러내려는 악마의 노력은 역설적으로 ‘진짜’의 면모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여기에 ‘모조’의 정확한 역할과 희망이 있다. 이는 흉내가 아닌 묘사, 개작이 아닌 기록, 숭배가 아닌 진정한 경의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악마가 외부에 존재하지 않듯이, 신 또한 우리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엔도 슈사쿠는 자신의 소설 '깊은 강'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신이란 결국,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는 그 무엇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