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주인공 '치히로'
사람으로 태어나면 처음으로 생기는 것이 있다. 이름이다. 시인 김춘수의 <꽃>에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처럼 이름을 가지고, 불린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며 그 속에는 한 존재의 정체성을 내포한다.
애니메니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첫 장면은 이사 가는 치히로와 가족이 차를 타고 이사를 가면서 시작한다. 이동하는 장소는 이 동네에도 저 동네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로 그 자체가 경계이며 다른 세계로의 진입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차 안에서 치히로가 친구들이 준 꽃다발을 끌어안고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는 사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특별한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치히로는 내키지 않던 터널을 지나면서 보통 세상과 분리된다. 그 터널은 모험의 출발이다. 영웅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죠셉 캠벨(<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저자)은 모든 관문의 통과는 ‘자기 적멸’의 형태를 취한다고 설명한다. 그 터널, 즉 특별한 세상으로 통하는 관문은 어둡고 두렵지만, 그곳을 통과해야 영웅으로 거듭난다.
치히로가 마음을 먹고 터널을 통과하니 기차역과 개울이 보인다. 적막한 기차역은 떠나고 도착하고, 공간을 가로지르고 시간을 넘나드는 장소로 보인다. 또 물을 건넌다는 것은 ’ 스틱스강(그리스 신화에서 저승을 감 싸도는 강)’을 건너는 것.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표식을 의미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치히로는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유바바의 목욕탕에 ‘센’으로 불리며 살아간다. 센과 치히로는 한 인물이다. 센은 부모님이 귀신 세계에서 음식을 생각 없이 먹게 되면서 돼지로 변하며 몸도 마음도 잃어버리는 것을 본다.
왜 부모님이 돼지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지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그 가게에서 부모님은 ‘원래의 모습’을 잃게 된다.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 된 것이다. 마치 ‘원래의 마을’이 모습을 잃어버리고 ‘폐허’가 된 것처럼 말이다.
우리들은 애니메이션을 보고 부모님이 돼지가 되었다는 것에만 놀라지만, 정작 놀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부모님은 ‘과거를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모를 구하고 이 세계에서 살아남아 다시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서 목욕탕에서 힘겨운 일을 자발적으로 하는 독립적인 인물이다. 반면 치히로는 이사 가는 차 안에서 친구들과 헤어지게 되었다고 투정 부리는 철없는 아이다. 철딱서니 없는 여자아이는 성숙한 자아를 가진 철든 아이로 변화된다. 자기 혼돈과 분열의 표현은 자기 안의 싸움으로 형상화된다. 잃어버렸던 이름을 되찾는 것은 무질서의 세계에서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치히로’라는 이름이 사치스러우니 ‘센’으로 바꾸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이것도 ‘원래 이름’을 빼앗아 ‘원래 모습’을 잊어버리게 하려는 작품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단순히 이름이 바뀐다는 문제가 ‘원래 모습’을 잊어버리게 한다는 문제를 가졌다. 즉, ‘과거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름을 뺏기면 돌아가는 길을 알지 못하게 되는 거야”라고 하쿠가 말하는 ‘돌아가는 길’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다.
과거는 더 이상 우리에게 단순하고 사실적인 과거가 아니다. 과거는 항상 기억과 환상과 이야기와 신화를 통해 구성된다. 나는 미야자키 작품들이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 환상과 이야기를 통해 과거를 현재에 소환하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다고 본다.
고전적인 영웅 서사적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현대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은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정보의 세상 속에서 ‘나’를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우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고 말해준다. 세상의 많은 영향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치열하게 사고하고 삶을 살아내자.
[참고자료]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002.
김윤아 『미야자키 하야오』. 살림출판사. 2005.
무라세 마나부, 정현숙엮음, 『미야자키 하야오의 숨은 그림 찾기』, 한울,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