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판타지 공간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제목이기도 하면서 영화의 판타지 공간을 담당하는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중요한 공간이다. 항상 움직이고 이동하는 하울의 성은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손잡이 색에 따라 문을 열고 나가면 각각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동시에 존재하지만, 한 곳에 있을 수 없는 공간들이 ‘움직이는 성’의 문을 통하면 언제라도 어느 곳에서라도 펼쳐진다. 손잡이 색이 빨간색이면 왕이 있는 왕국 앞의 화려한 거리가 나오고 파란색 표시는 바닷가 항구 도시로 열린다. 검은색 표시는 하울의 전쟁터이고 초록색 손잡이는 하울의 어린 시절이 담긴 정원으로 한없이 펼쳐진 꽃밭이다.
그런 공간들은 동시에 존재하지만 한 번에 경험될 수는 없다. 시공간의 경계가 모호하면서 역사성이 탈각된 여러 공간들은, 달리 생각하면 접히고 겹쳐있다. 여러 모습 각각이 모두 일본의 한 단면들을 함축하고 있다. 절대군주제의 나라면서 섬이고 전장이자 꽃밭이다.
움직이는 성은 그 자체로 ‘하울’ 자신이다. 성을 움직이는 힘은 불꽃 마귀 캘시퍼에게서 나온다. 캘시퍼는 하울과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존재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며 죽어가던 별 캘시퍼를 하울이 삼켜 그에게 심장을 줌으로써 캘시퍼는 죽음을 피하는 계약을 맺게 된다. 그들은 심장을 나눈 형제이고 분신이다. 하울이 죽으면 캘시퍼도 살 수 없고 캘시퍼가 죽게 되면 하울의 심장도 죽는다.
하울이 설리번의 추적을 피해 집을 이사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그 이사의 순간이 전환의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사를 한 새 집은 소피의 모자 가게이다. 그러니까 겉모습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지만 내부는 소피의 집이다.
‘움직이는 성’에 들어온 소피는 자신의 장애물(할머니가 되어 자신을 잃어버린)을 딛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 ‘움직이는 성’이라는 판타지 공간은 소피라는 인물에게 새로운 영감을 안겨주며, 인물이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켈시퍼라는 '불'이 존재한다. ‘불’은 성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자, 하울 자신이다. 원작의 제목이 『마법사 하울과 불의 악마』로 되어 있듯이 이 ‘성’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캘시퍼’라고 불리는 ‘불의 악마(난롯불)’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캘시퍼’의 ‘불’은 베이컨이나 토스트를 굽는 ‘난롯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뭐라고 할까 뜨겁지도 않은 식물의 원동력이 되는 불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만지면 ‘뜨겁다’고 느끼는 불과 만져도 뜨겁지 않은 ‘생명의 불’, 이 두 가지를 불의 악마는 가지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마지막에 캘시퍼는 하울의 ‘심장’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하울의 생명’이기도 하다.
과거는 더 이상 우리에게 단순하고 사실적인 과거가 아니다. 과거는 항상 기억과 환상과 이야기와 신화를 통해 구성된다. 나는 미야자키 작품들이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 환상과 이야기를 통해 과거를 현재에 소환하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다고 본다.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 즉 동일화의 문제를 다루는 듯하다. 그것을 다룸에 있어 많은 균열과 흔들림과 혼돈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적이 누구와 싸우는지 알지 못한다.
상상 속 판타지 공간을 통해 비유적으로 표현한 두 작품의 낯선 공간에 놓인 인물은 공간을 통해 변화하고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는 캐릭터로 변모하였다.
소피는 평범한 존재로 감정이입을 하고 영화를 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하며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신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모든 것들이 혼돈되는 세상에서 쉬운 일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것을 놓아버리는 순간 ‘나’는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고, 너도 우리도 아닌 무의미한 존재로 살게 되니 명심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참고자료
미야자키 하야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칼 구스타브 융, 융 저작 번영위원회 역, 『인격과 전이, 융 기본 저작점 3』 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