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늦은 저녁, 반찬거리와 마침 필요했던 공산품들을 사려고 오랜만에 대형 마트에 갔다.
오랜만에 큰 마트에 와서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이런저런 물건들을 구경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아이용 우산]이었다.
하늘색의 작은 우산을 펴보니 꽤 튼튼하기까지 했다. '
'잘됐다. 우산이 고장 나서 없는 둘째에게 줘야지!'
둘째 아이의 좋아하는 표정을 생각하며 어린이 우산 하나를 카트에 담았다.
우산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마트 쇼핑.
클렌징 폼도 없고, 야채도 없고, 첫째 아이 소풍 도시락에 넣을 간식도 사고,
필요했던 이런저런 물건과 음식을 넣으니 텅 비었던 카트는 어느새 넘치려고 했다.
'이제 오늘 산 거 다 먹고 또 오자~!'라는 말과 함께 '크.. 많이 샀네. 얼마가 나올까?' 내 예상과 맞는 결제금액이 나올까? 조금은 궁금해하면서, 줄을 선 앞 뒤의 카트에 비해 넘치도록 꽉 찬 카트가 왠지 조금은 민망하기도 했지만 경쾌하고 당당한 발걸음으로 계산대 앞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계산대의 직원은 물건들을 착착 바코드에 찍고 내 쪽으로 밀어내 주었다. 거의 마지막으로 아까 골랐던 우산을 바코드에 찍고, 우산에 달린 '도난방지용 태그'를 제거하려는 그 찰나 직원의 '아얏!' 하는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려 직원을 보니 두 번째 검지 손가락을 감싸줘고 있었다. 도난방지용 택에는 뾰족한 바늘이 꽂혀있었고, 그 바늘에 찔린 것이었다.
순간, 나는 갑자기 내가 산 우산을 계산하다가 다친 그 직원에게 너무나 미안해져서 '괜찮으세요?'를 연신 남발했다. 계산이 끝나고 나서도 괜찮냐는 나의 물음에 그 직원은 '괜찮아요.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거예요.'라며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왜 하필 나는 그 우산을 사 가지고,
왜 하필 그 우산이 눈에 띄어서,
그 옆에 다른 우산을 샀으면 그 직원이 안 다쳤을까?'
주차장까지 돌아오는 짧은 그 순간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우산을 사서 다른 사람이 다쳤다는 죄책감.
남편에게 물었다.
"자기야, 나 죄책감이 들어.
내가 이 우산을 안 샀으면 아까 그 직원이 안 다쳤을 거라는.
내가 왜 이 우산을 하필 오늘 샀을까?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
그런 내게 남편은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했다.
계산하다가 실수를 한 것뿐인데 왜 내가 죄책감을 느끼냐고 했다.
그래도 나는 그 직원에게 미안했고,
앞으로 아이의 우산을 볼 때마다 그 상황이 생각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까지 내가 죄책감을 느낄 일은 아닌데..
이 죄책감은 도대체 뭘까..
나 자신이 낯설었다.
나도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내가 갑자기, 뜬금없이 툭 튀어나왔다.
이 죄책감이, 뭔지 정체를 모를 이 죄책감이 그동안
내 손목을, 발목을, 내 생각을, 내 마음을 붙잡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사소한 것에 그토록 신경을 쓰고 에너지를 쓰느라 정작 중요한 것들에
눈감게 되었던 것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의 무의식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이 죄책감의 정체를 나는 밝혀낼 수 있을까?
긴 여정이 되겠지만 나의 모습을 직면한 오늘,
나는 나를 다시 알아보겠다고 작은 다짐을 했다.
내가 싫어서 외면하고 있었던 나의 모습들에 대해서..
"너 때문이야.
네가 언니잖아.
네가 엄마잖아.
네가 딸이잖아.
네가 며느리잖아.
네가 부모님이랑 가까이 살잖아.
네가 지금 집에 있잖아."
무엇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한다는 그 말들.
어릴 때부터 나의 내면에 깊숙이 박힌 나도 모르는 말들.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나를 칭칭 감고 있었던 그 말들.
자유로워지고 싶다.
내 안의 모든 말들과 상황과 행동으로부터.
나는 무엇을 시작할 수 있을까?
오늘부터 나 자신과의 1일이 시작되었다.
건강한 자존감은 나 자신을 존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하겠지, 아마도?
여러 책에서 그렇게 나오니까.
"내가 산 우산에 그 직원이 손가락을 다치긴 했지만 나 때문이 아니야. 실수한 거고, 그럴 수 있었어.
다만, 그 날카로운 태그는 다른 것으로 개선을 하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