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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은 최고의 책

장강명의 <먼저 온 미래>를 추천합니다.

by 전새벽

‘올해 최고의 OO’를 선정해 친구들과 공유하는 일은 언제나 재미가 있다. 그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한 해를 돌아볼 수 있고, 정보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 모임의 이번 달 숙제를 <올해 최고의 OO>로 정했다. 책이든 영화든 공연이든 전시든, 분야는 자유롭게 열어두었다. 그중에서 나는 책을 다룰 요량이었다.

그런데 막상 숙제를 하려니 고민이 됐다. 최고를 고르는 건 원래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올해 유독 좋은 책을 많이 읽은 덕분에 여러 후보가 치열하게 경합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세 권의 책을 최종 후보로 선정하고도 한참을 더 고민했다. 그러다가 한 가지 기준이 떠올랐다.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 나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그러자 마침내 우승자가 보였다.




2016년,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은 직후 한 신문사에서 모 소설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설가가 본 알파고’를 주제로 글을 써 달라는 용건이었다.

소설가는 망설임 끝에 이를 거절했다. “이것이 중요한 사건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2022년, 오픈AI가 대화형 인공지능 챗GPT를 공개했다.

그 뒤부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세간은 온통 AI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고 실리콘밸리의 주가는 연일 치솟았으며 머지 않아 엄청난 일들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AI로 만든 영화가 개봉했고, AI가 작곡한 곡들로 구성된 뮤지컬이 국립극장에 올랐고, AI개발진이 노벨화학상을 수상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모 소설가도 이제는 AI 현상에 대해 말해야 할 때라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바둑계를 찾아갔다. 수 많은 사람을 인터뷰하며, 대체 알파고 이후 바둑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집요하게 취재했다. 그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충격적인 것이었다.

<댓글부대>, <한국이 싫어서>와 같은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장강명 작가의 르포르타쥬 <먼저 온 미래(동아시아, 2025)>는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프로 바둑 기사들은 하나 같이 알파고 이후로 모든 게 달라졌다고 증언한다. 가장 나의 이목을 끈 것은 과학이 관념을 무찔렀다는 것이었다. 알파고 이전까지 기사들은 온통 관념의 지배를 받았었다. ‘기백’이니 ‘마인드’이니 하면서 말이다.

조훈현은 “승부의 첫째 조건은 뭐니 뭐니 해도 기백”이라고 말했고 이세돌은 프로기사로 성공하려면 ‘마인드’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케미야 마사키는 “바둑돌들이 판 전체의 아름다운 흐름을 따라간다”고 말했고 이창호는 “(바둑이란) 끝없이 먼 길을 가는 거”라고 말할 정도였다.


알파고는 이 모든 걸 뒤 엎었다. 기풍과 기백이란 관념의 용어는 모두 ‘블루스팟’으로 대체되었다. 블루스팟은 다음 돌을 놓을 수 있는 곳 중, AI가 추천하는 ‘가장 승리 확률이 높은 곳’을 말한다. 기사들은 이제 ‘마인드’를 수련하기 위해 애쓰지 않고, 확률의 과학이 가리키는 다음 수를 노린다.

기백만 사라진 게 아니다. 바둑계는 오랫동안 금기시해왔던 것들을 다시 평가하게 됐다. 대표적인 것이 빈삼각(돌 세개가 직각으로 이어진 모양)이다. 과거부터 빈삼각은 절대 두지 말아야 할 악수로 여겨졌으나, AI 이후에는 빈삼각이 블루스팟일 수도 있다는 게 드러났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하호정 4단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옛날 기보들을 사람들이 인공지능에 입력하기도 해요. 기사들이 피를 토하면서 처절하게 뒀다는 전설의 대국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피를 토하면서 발견했다는 신수(이전에는 잘 두어지지 않았지만 검토 결과 좋다고 검증된 수)를 인공지능에 넣었더니 이길 확률이 5퍼센트 떨어지는 수 였고 그렇더라고요.”

잘 알려진 것처럼 이세돌은 알파고와의 대국 후 바둑계를 은퇴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소식은 얼마 후에 날아들었다.


이세돌과 붙었던 AI모델의 이름은 ‘알파고 리(AlphaGo Lee)’다. 리는 인간 기사가 남긴 16만장의 기보를 가지고 학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는 이세돌과 총 5번 승부를 겨뤘고, 그 중 4번을 이겼다.

이듬해 딥마인드는 ‘알파고 제로(AlphaGo Zero)’를 내놓았다. 이전 모델과 달리 제로는 별다른 기보를 학습하지 않았다. 그저 바둑의 규칙만 알려주고 스스로 학습하게 둔 모델이었다. 제로는 리와 100번 겨루었고, 100번을 모두 이겼다.


바둑은 5천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장강명은 <먼저 온 미래>를 통해 5천 년의 역사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새 패러다임에 접어들었는지 집요하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AI의 충격은 하필 바둑계에 먼저 온 미래일 뿐, 이제 다른 세계에도 AI 광풍이 몰아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다른 세계’는 어디든 될 수 있다. 제조, 문화, 스포츠, 법률, 의학, 정치… 확실한 건, 여러분이 속한 그 세계에도 이 미래가 빠르게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인문학을 공부하며 오랫동안 관념과 싸워왔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으니, 사람들의 마음 속에 중첩된 관념이란 어지간해서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알파고는 그걸 해냈다. 바둑계를 넘어, 각 계는 이제 이론과 과학의 시대로 넘어갈 준비를 해야 할 거다.




지금부터는 책이 다루지 않은 알파 이야기.

바둑계와는 좀 거리가 있는 생물학계에는 아주 오래된 난제가 하나 있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1972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크리스천 안핀센이 “단백질의 구조는 아미노산의 서열에 의해 결정된다”는 가설을 남겼다. 단백질 구조가 인류에게 중요한 이유는 단백질이 잘못 구조화 됐을 때 나타나는 참사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 같은) 때문이었다.

아 그렇구나. 단백질 구조는 아미노산 서열이 결정하는 거구나. 인류는 밝은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온갖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해소하고 마침내 생명연장의 꿈을 이루는…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아미노산의 서열을 보고 단백질 구조를 알아맞히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보다못한 보건기구와 대학 등이 나서서 대회를 개최했다. 각 국의 과학자들이 팀을 이루어 단백질 구조 예측하는 모델을 제시하는 ‘단백질 올림픽’인 CASP은 1994년, 그렇게 제 1회 대회를 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도록 CASP은 별 진전을 만들지 못했다. 이름난 과학자들이 온갖 시도를 했지만 각 모델의 점수(예측 정확도)는 아무리 높아도 40~50점에 그치는 게 다반사였다. 그런데 2018년 CASP에 한 연구진이 제출한 모델의 점수가 무려 60점에 육박했다. 모델의 이름은 ‘알파폴드(AlphaFold)’. 바로 알파고를 만든 딥마인드팀의 단백질 구조 예측 AI였다.

CASP 대회는 2년에 한 번씩 열린다. 딥마인드팀은 2018년 성과를 기반으로 더 열정적으로 2020년 대회를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2020년 대회, 딥마인드팀은 주최측으로부터 전화를 한통 받는다. 알파폴드의 점수는 90점을 넘겼고, 이로 인해 ‘단백질 구조 문제는 사실상 해결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의 딥마인드의 행보다. 그들은 알파폴드가 만들어낸 2억 개의 단백질 구조 데이터베이스를 무료로 풀어버렸다. 이걸 가지고 화학계, 생물학계, 의료계 등이 나서 인류 보건에 기여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딥마인드 CEO와 수석연구원은 이 공로로 2024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바둑계에 먼저 왔던 미래는,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자연과학계를 평정하고 있다.




AI는 앞으로 어디까지 발전할까? 이건 좀 답하기 어려운 문제 같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게 있다면 AI가 가진 힘을 깨닫는 것이다.

AI가 거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고작 채팅형 모델 하나에 너무 많은 투자가 발생한다’를 지적하는 것 같다. 이제는 AI하면 챗지피티를 돌리는데 들어가는 수 많은 전기료와 GPU비용에서 눈을 떼고, 알파고와 알파폴드가 이룩한 것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수준의 업적들을 상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다보면 인류가 가진 가장 큰 문제, 즉 관념이라는 게 곧 전부 사라질 위기라는 걸 느낄 수 있을 거다.

당신은 그 시대를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십중팔구는 아니라고 할 것 같은데, 그럼 이제 그 준비를 해보자. 나도 전문가는 아닌지라 구체적으로 말해줄 게 없어보이긴 하는데, 그래서 장강명의 <먼저 온 미래>는 한번씩 읽도록 하자. AI의 충격을 먼저 겪은 선배님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평온했던 일상의 감각을 세차게 뒤흔들 거다.



202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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