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조진웅, 해리포터, 일론 머스크, 페이커

- 작품과 작가는 구분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과 허혜정의 평론집

by 전새벽

배우 조진웅이 은퇴했다. 청소년 시절 범죄기록이 세상에 드러난 직후에 자발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이를 두고 여러 말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는 이미 촬영이 끝난 드라마 <두 번째 시그널>을 어떡할 것인가다.


먼저 작품을 빨리 개봉하라는 목소리가 있다. 이는 <두 번째 시그널>이 조진웅 한 사람만의 작품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여러 다른 출연진, 세기 어려울 만큼 많은 제작진, 그리고 거대 자본까지 힘을 합쳐 만드는 게 드라마이며, 그러므로 배우 한 사람에 대한 논란이 있더라도 작품은 작품대로 자신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이다.


위의 주장에 틀림이 없음에도 개봉이 망설여지는 것은, '작품'과 그 '작품의 얼굴'을 무 자르듯 자르기 어려운 '마음' 때문일 것이다. 숱한 사람이 힘을 합쳐 만들었더라도 주연배우는 엄연히 작품의 얼굴이다. 그 얼굴을 온전히 응원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면 개봉이 망설여지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심지어 이 작품 속 조진웅의 역할은 형사인 것인데...

(오늘 여기서는 "작품과 아티스트는 불가분의 관계인가 아닌가"만 다루기로 한고, 조진웅을 둘러싼 비난이 정당한지 마녀사냥인지의 논의는 다루지 않는다.)


<해리포터> 이야기는 20세기와 21세기를 모두 통틀어 가장 강력한 문화현상 중 하나다. 원작 소설은 85개 언어로 번역되어 6억 부 이상이 팔렸고 영화 시리즈는 지금까지 무려 13조 원을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명작가에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가 된 원작자 JK롤링은 순자산이 1조 원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해리포터가 위기에 처했다. JK롤링의 강력한 반트랜스젠더 메시지 때문이다. 과거부터 MTF(성전환을 통해 여성이 된 사람)는 여성이 아니라며 생물학적 여성의 지위를 옹호했던 롤링은 결국 해리포터 보이콧 사태를 불러왔다.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작가의 작품을 읽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보이콧 참여자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얘기한다. 해리포터 멋진 세계관이 롤링의 차별적인 세계관보다 훨씬 크고, 두 개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쯤되면 질문은 명료해진 것 같다. 작품은 아티스트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가? 아니면 롤랑 바르트의 주장처럼, 콘텍스트와 텍스트를 온전히 분리하여, 텍스트 자체만으로 감상하고 비평하는 일이 올바른가?


와중에 일론 머스크가 인간 세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Grok5가 내년에 롤 챔피언 팀을 꺾을 수 있을지 붙어보자'며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머스크가 상대방을 특정한 적은 없지만, 자연스럽게 실제 롤 챔피언팀이 소환되었다. T1은 페이커의 얼굴을 띄우며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맞불을 놨다.


실제 경기가 치러지면 결과는 둘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 인간팀이 이기든가, 지든가. 그리고 인간이 질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는 걸, 이세돌-알파고의 전설적인 대국 결과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실제로 AI가 롤까지 섭렵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인간은 그때부터 AI끼리 싸우는 롤 경기를 볼 것인가? 아니면 바둑계가 여전히 그렇게 하듯, 인간끼리의 경쟁을 볼 것인가? 만일 AI 대결은 시청률이 형편없고 인간끼리의 대결만 흥행이 된다면 그것은 왜 그런가?


이러한 질문을 안고 최근 문학평론집을 한 권 읽었다. 허혜정 교수의 <현대시와 골룸의 언어들(푸른사상, 2016)>이다. 공교롭게도 알파고가 지구 최강의 바둑기사가 되었던 해에 세상에 나온 이 책에는 인간만이 하는 고민들과 인간만이 가진 취약성으로 가득하다. 허혜정은 80년대 정부에 더 세게 저항하지 못해 한탄했던 시인들의 세계관과 시구를 읊고(김중식), 90년대를 상징하는 '젊은 전위'에 대해 당황스러움과 반가움을 감추지 않고(기형도, 장정일), 보다 새로운 명명이 필요해보이는 그 다음 세대(주하림, 이선욱)에 대한 알 듯 말듯한 기분과 기대를 한껏 쏟아낸다. 그러면서 한국 시단이 시대에 걸쳐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보여준다. 즉 시대정신의 변화를 보여준다. 바꾸어 말해, 허혜정의 문학평론집은 한국 근대사 증언집이고, 역사 공부를 하는 한 가지 효과적인 방식으로 보인다.


한데, 이게 효과적일지는 몰라도 효율성 측면에선 어림도 없다. 채팅형 AI를 열고 "1980년대, 1990년대 그리고 2000~2010년대 한국사회의 주요 담론과 시풍에 대해 알려줘" 라고 입력하면 2초 안에 해결되는 게 이 공부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제미나이를 열어 대화하는 것보다, 허혜정의 책을 몇 번 더 읽을 생각이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간결한 결론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불완전함을 딛고 도전해온 과정에 있는 것이니까. 애초에 문학이 결론이 아니라 과정인 것이니까. 이스포츠든 소설이든 드라마든, 어떤 서사가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이유는 그 어려운 메이킹 작업을 고작 인간의 손으로 해냈기 때문인 것이니까. 그리하여 작품과 아티스트는 끝내 구분될 수 없고, 아티스트의 삶과 시대적 상황까지 훑어가는 감상만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며, 콘텍스트 없이 텍스트가 존재할 수 없음을 믿으니까.


2025. 12. 23






(...)어쨌든 나의 비평이 편리한 이론의 기계를 돌리지 않고, 무언가 좀 바깥으로 튕겨져 나간 까닭은 대단히 명쾌하고 작품을 분석하는 데는 효율적인 각각의 이론들이, 작품을 해독하는 데는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아쉬움을 안고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비평을 쓸 수 있을까를 끝없이 질문해오던 내게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던져준 충격을 잊을 수 없다. 판타지물이지만 지극히 역사적으로 느껴졌던 그 작품에는 인류사회의 오랜 원동력이었던 도덕적 추진력을 분쇄시킨 현대의 악에 대한 근원적 탐구가 담겨 있었다. 언제든 악마로 돌변할 수 있는 존재의 탐욕과 악의 기류에 대한 강렬한 고발이 인상적이었던 그 작품에서 놀랍게 느껴진 것은, 그 책에 부록처럼 덧붙여진 연표였다. 그 거대한 시간의 프레임에 나는 강렬한 매혹을 느꼈다. 요정과 인간, 호빗과 난쟁이같은 부족들의 기나긴 역사는 존재의 다면적인 초상을 비춰주는 놀라운 신화적 감각을 품고 있었다. <반지의 제왕>은 과연 문학적 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게 했다. 그 작품은 종교, 역사, 신화, 언어학 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 거대한 서사였다. 비록 판타지는 한국문단에서 주류로 취급하지 않는 장르지만, 이미 20세기 서구문학의 정전으로 확고히 자리잡고 있는 그 훌륭한 작품을 통해 나는, 한 시대의 서사로만 국한시킬 수 없는 강력한 상항력의 힘을 현대의 한국문학이 다소 결여하고 있음을 느꼈다.


-허혜정, 위의 책 6-7쪽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달로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