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오염 vs. 언어의 발명

-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 리뷰

by 전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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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정말 숨 막히게 재밌는 서스펜스를 한 편 보고 왔습니다. 우리나라에는 2022년에 개봉했던 작품인데 이제서야 보게되었군요.


우크라이나-캐나다계 미국인 감독 바딤 피얼먼의 장편 영화, 나치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기발하고 밀도 있는 서스펜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수작 <페르시아어 수업>입니다.




줄거리(스포 없음)

2차 대전의 막바지, 나치 독일은 점령지에서 여전히 홀로코스트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유태인이든 누구든 닥치는대로 잡아다 수용소에 가두고 가혹한 일을 시킵니다. 마음에 안들면 그냥 총으로 쏴서 죽이면서 말입니다.


여기, 눈쌓인 벌판을 조용히 가로지르는 트럭 한 대가 있습니다. 안에는 잡혀온 사람들이 한 가득인데요.

본인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채 모두는 불안 가득한 마음으로 정적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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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한 남자가 우리의 주인공에게 말을 겁니다. 그 샌드위치 절반만 나누어 달라는 얘깁니다. 주인공은 저항해보지만 남자가 절박하게 호소합니다. 그러면서 품에서 책을 한 권 꺼내보이지요. 이 귀한 페르시아어 책을 줄테니 샌드위치 반만 주세요... 결국 주인공은 교환에 동의합니다. 별 쓸 데도 없는 페르시아어 책 한 권을 얻는 대신 샌드위치는 절반으로 줄었네요.


잠시 후 트럭이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독일군은 포로들을 줄지어 세웁니다. 이제 어떤 절차가 시작되려는 걸까요? 그런데 분위기를 채 파악하기도 전에 총성이 울립니다. 독일군은 포로들을 가차없이 쏴서 구덩이로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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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잠깐만요! 주인공이 외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유태인이 아니라고 말하죠. 헛소리 말라는 독일군에게 그는 책을 꺼내 보여줍니다. 보세요. 저는 페르시아인이에요. 그래서 페르시아어로 된 책도 갖고 다니잖아요. 그때 한 독일군 병사의 머릿속에 스치는 기억이 있습니다. 대위님이 페르시아인을 찾고 있다는 기억입니다. 병사는 주인공을 데리고 대위님께 가기로 합니다.


수용소에서 급양장교 역할을 하고 있는 대위 코흐. 그는 어떠한 이유로 페르시아어를 배우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페르시아인 포로가 잡혀왔다고 하니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코흐는 주인공에게 이름을 묻고, 주인공은 본명은 감춘 채 페르시아어 책에 쓰인 이름 '라지'를 자신의 이름으로 둔갑시킵니다.


"이제부터 일과가 끝나면 내 방으로 와. 그리고 하루에 네 단어씩, 페르시아어를 가르쳐라."


코흐 대위의 주문입니다. 페르시아어 교사가 되는 것 밖에는 살 길이 없는 라지는 어쩔 수 없이 이에 동의하고 두 남자의 숨막히는 과외 여정이 시작됩니다. 페르시아어를 한 마디도 모르는 페르시아어 선생과, 수 틀리면 다 죽일 준비가 되어 있는 나치 장교의 공부방 이야기는 과연 어떤 결말을 맺게 될까요...?




감상평 (스포 없음)


<페르시아어 수업>이 가지는 흡인력은 무엇보다 위와 같은 설정 그 자체에 있습니다. 잔혹한 나치 장교와 그에게 목숨을 걸고 거짓말을 한 남자. 그 거짓말이 언제 발각될지 모른다는 설정이 128분의 러닝타임을 밀도 있게 끌고나는 서스펜스의 근간입니다.


이야기는 예상 가능한 범주에서 위기-해결을 반복하는데요, 각 시퀀스에 군더더기가 없어 참으로 만족스런 만듦새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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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뛰어난 이야기는 제작진의 탁월한 미적감각으로 인해 더 빛을 발합니다. 40년대의 황량한 유럽, 수용소 포로들의 초라한 행색, 차가운 독일 장교의 제복, 우생학을 믿는 아리아인들의 푸른 눈빛과 손에 묻은 피, 무심하게 내리는 눈... 이러한 미장센들이 모두 솜씨 좋게 얽혀 보는 내내 관객의 시선을 강탈합니다.


자칫 작품의 장르를 혼동하게 될만큼 독특한 분위기 전환도 일품입니다. 강력한 서스펜스로 시작한 이 이야기는 어느샌가 마음 따뜻한 장교와 머리가 기발한 포로의 브로맨스처럼 보이기도 하죠. 그러나 결말부에 가서 <페르시아어 수업>은 결국 이 이야기가 용서할 수 없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임을 잊지 않습니다. 분명하고 단호한 결말부 덕분에 개운한 마음으로 일어설 수 있었네요. 마지막 엔딩씬에서 줄기차게 이어지는 라지의 대사 덕분에 뜨겁게 치미는 감동은 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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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 배우 두 사람의 연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인공 역할을 한 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는 1986년 아르헨티나 출신의 배우로 2018년 영화 <120BPM>을 통해 세자르 영화제 신인남우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고 하죠. <120BPM> 역시 평단의 평가가 매우 우수한 작품이라고 하니 앞으로 기억해둬야 할 것 같습니다.


독일 장교 역할의 라르스 아이딩거는 1976년 베테랑 배우로 190cm의 훤칠한 키가 특징입니다. 풍채부터 위압감을 주는 그의 피지컬과,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이 <페르시아어 수업>의 긴장을 한층 더 끌어내는데 값진 역할을 했습니다.


<페르시아어 수업>의 인문학적 키워드는 바로 언어에 대한 고찰입니다. 영화 속 독일군들은 언어를 몽땅 오염시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히틀러, 국가, 봉사라는 단어를 조합해 도무지 용인할 수 없는 초폭력적인 이데올로기를 완성했죠. 반면에 주인공은 없는 언어를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영화의 원작소설 제목은 '언어의 발명'입니다) 그리고 그 재료로 전쟁이 앗아가는 가장 안타까운 언어를 사용했네요. 바로 죽은 사람들의 이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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