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을 짓이기는 반전, 모든 걸 이기는 사랑

영화 <그을린 사랑> 이야기

by 전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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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택트(2016)>라는 영화를 무척 좋아합니다. 평소 외계인 매니아이기도 한데다 영화가 고결한 한 편의 예술작품 같았기 때문입니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라는 영화도 상당히 재밌게 봤습니다. 활력과 긴장, 어딘가 공허한 기분까지 모두 완성도 넘치는 그릇에 고루 담겨 있는 영화였습니다.


이는 모두 드니 빌뇌브 감독의 작품들입니다. 1967년 퀘백에서 태어난 그는 유럽과 북미의 정체성을 모두 간직한 예술가로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해왔죠. 위의 작품들도 유명하지만 <블레이드 러너 2049>나 <듄> 시리즈로도 상당한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오늘은 그런 빌뇌브의 지금을 있게 해준 작품을 보고 왔는데요. 넷플릭스에서 편하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상당히 진이 빠지는 영화이니 각오는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주 커다랗고 충격적인 이야기, <그을린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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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스포X)


쌍둥이 남매인 잔과 시몽. 둘은 최근 엄마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일했던 사무실 하필 공증사무소였네요. 생전 엄마의 부탁을 받았던 공증사무소 주인 장은 쌍둥이를 사무실로 불러 그녀의 유언장을 읽어줍니다. 묘비에 아무것도 쓰지 말고 시신은 세상을 등지게 놓아달라... 너무도 세상에 한이 많은 것 같은 엄마의 유언에 쌍둥이는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런데 유언이 거기서 끝이 아니네요. 장은 별안간 두 통의 편지를 꺼냅니다. 잔, 너는 오빠를 찾아 이 편지를 주어라. 시몽, 너는 아빠를 찾아 이 편지를 주어라. 각자의 미션을 완료하고나면 너희들에게도 줄 편지가 있단다...


갑자기 분위기 명탐정 코난이 되어버린 사무소. 쌍둥이는 존재도 몰랐던 오빠와 아빠 이야기에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잔은 이번 기회에 엄마의 인생을 좀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인지 오빠 찾기에 나서기로 하는데요, 시몽은 반대입니다. 그는 평소 엄마가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며 화를 내며 사무실을 나가버리죠.


잔은 엄마의 흔적을 찾아 레바논으로 갑니다. 잔이 들고 있는 엄마의 흔적이라고는 사진 한 장이 전부인데요. 그걸 들고 무작정 엄마가 다녔다는 학교로 갑니다.


그리고 조금씩, 믿기 어려운 진실에 한발씩 다가가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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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평 (스포X)


명작이라고 소문은 잔뜩 나 있지만 <그을린 사랑>에 명사들의 리뷰는 별로 검색되는 게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짐작건대, 리뷰를 쓰기 참 어려운 작품이라 그럴 겁니다. 자칫 스포일러가 될까봐 그렇기도 하고요, 사실 무슨 말을 덧대는 게 큰 의미가 없어 보일 만큼 영화가 모든 얘기를 다 한 것 같은 기분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두서 없지만 조금씩 감상평을 늘어 놓아 보자면... 우선 연기가 일품입니다. 잔 역할의 멜리사 데소르모풀랭과 엄마인 나왈 역할의 루브나 아자발이 이 어지러운 플롯에서 강한 중심이 되어 줍니다. 두 사람의 연기가 얼마나 좋았던지, 제 13회 주트라 영화제(2011)의 여우주연상 후보에 두 배우가 나란히 올라가는 일도 벌어졌었는데요, 수상은 루브나 아자발에게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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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는 이 작품을 두고 "플래시백의 편의적 사용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훌륭하다"라고 했다는데요, 과연 그런 말이 나올만큼 영화는 뒤죽박죽의 시간 순서를 보여줍니다. 플래시백이 반복되는 작품들은 이때 흑백/컬러를 교차한다든지 해서 관객의 몰입을 도와주는데요, <그을린 사랑>은 그런 거 없습니다. 시간 때가 아무렇게나 현재였다가, 아무렇게나 과거입니다. 가뜩이나 두 모녀가 서로 다른 시간대에 비슷한 모습을 나와 (게다가 똑같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어) 헷갈리는데, 이건 처음에 관객이 의지와 집중력으로 극복해내야 하는 문제 같네요.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많이 쏟아졌던 반응처럼, <그을린 사랑> 역시 템포의 문제도 있습니다. 공을 들인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려나요?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도 될 것 같은데 좀 더 시간을 할애하는 모습이 꽤 여러번 발견되었습니다. 감독의 스타일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상당히 많은 관객들에게 '루즈하다'라는 인상을 줄 것 같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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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약점에 불구하고 <그을린 사랑>이 주는 임팩트는 너무도 큽니다. 영화가 감추어둔 놀라운 진실, 그리고 정교하게 설계된 진실이 들어나는 과정, 그리고 휴머니즘까지... 사실 연기, 템포 같은 요소 하나하나를 언급하는 일이 아주 불필요하게 느껴질 정도죠. 그만큼 영화는 큰 충격과 깊은 울림을 남기면서 끝납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이 정도 밖에 얘기할 게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무성의한 리뷰가 될 게 뻔해보였죠.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며 떠오른 시인 한 명 얘기를 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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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이야기


1923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쉼보르스카는 어른 시절 유복하고 교양 있는 환경에서 글을 쓰며 자라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청년 시절 2차 대전을 겪게 돼죠. 전쟁의 끔찍한 학살과 지하 교육 세계에서 공부했던 이 때의 경험은 그녀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simic_1-122211.jpg?type=w773 쉼보르스카


2차 대전 후 잠시 공산주의 사상에 빠지기도 했던 쉼보르스카는 이후 이데올로기 자체의 허망함을 깨닫고는 점차 실존을 위해 투쟁하는 글을 썼다고 합니다. 또 만물을 포용하는 생명중심적 가치관 절묘한 우화와 패러독스를 선보이며 시단의 모차르트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하지요.


저는 쉼보르스카의 삶이 영화 속 나왈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쟁을 직접 겪었다는 것, 어느 진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 전체를 포용하는 태도를 보여줬다는 것 등에서 말입니다.


쉼보르스카를 갑자기 소개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을린 사랑>의 내용이 너무 시적이라 제 수준의 글솜씨로는 멋진 리뷰를 쓸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그렇다면 이 영화와 맥락을 같이 하는 시를 한 편 가져와야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쉼보르스카의 시들을 보고 있으면 <그을린 사랑>속 인물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여러 편을 고르는 것보다는 하나만 힘 있게 전하고 싶어 고민 끝에 한 편만 옮깁니다. 영화를 보기 전이었다면 너무 유아틱하고 착하기만 한 시라며 무시했을 것 같은데, '나왈'이란 인물의 삶을 따라간 뒤에 읽어보니 울림이 있네요. 그야말로 예상을 짓이기는 반전, 모든 걸 이기는 사랑을 다룬 이 영화와 제격인 시입니다. 특히 아들을 키우는 저로서는 첫째 아들을 생각하며 나왈이 쓴 마지막 편지를 생각하며 읽다보면 눈물이 납니다.






온 세상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부스럭대고 있어요,

해바라기, 배따라기, 호루라기, 지푸라기

찌르레기, 해오라기, 가시고기, 실오라기,

이것들을 어떻게 가지런히 정렬시키고,

어디다 넣어둘까요?


배추, 고추, 상추, 부추, 후추, 대추,

어느 곳에 다 보관할까요?

개구리, 가오리, 메아리, 미나리

휴우, 감사합니다. 너무 많아 죽을 지경이네요.

하늬바람, 산들바람, 돌개바람, 높새발마은

어디쯤 담아둘까요?


얼룩빼기 황소와 얼룩말은 어디로 데려갈까요?

이런 이산화물은 값지고 진귀한 법.

아, 게다가 다시마와 고구마도 있군요!

이것들은 모두 밤하늘의 별처럼

그 값이 어마어마하겠네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과연 내가 이걸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이 모든 노력과 수고가 나 한사람을

위한 것이라니 과분하기 그지없네요.

이것들을 다 만끽하기엔


나는 여기에 그저 잠시 머물다 갈 뿐입니다.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 동안

멀리 있는 것은 미처 보지 못하고,

가까이 있는 것은 혼동하기 일쑤랍니다.


이 촉박한 여행길에서 나는 사물이 가진

허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그만 길가의 조그만 팬지꽃들을 깜빡 잊고,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사소한 실수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답니다.

아, 이 작은 생명체가 줄기와 잎사귀와

꽃잎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을까요.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생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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