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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김애란과 나의 애란

편지

by 전새벽

한진이형에게.


지난 편지 잘 읽었어. 평소 좋아하는 작가들에 대해 한 판 정리해나가는 형의 행보는 형다웠고 와중에 나를 소환한 건 기뻤지만 주제는 잠시 나를 당혹케했던 것 같아. 김애란이라니.


김애란이라는 소설가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냐. 그저 나와는 별로 접점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거지. 한국의 평범한 고등학생에게 '레바논 내전의 원인'이나 '말레이시아 술탄 승계분쟁의 역사' 같은 주제가 당장 중요한 문제이기는 어려울 것 아니겠어? 김애란은 내게 레바논 혹은 술탄이라고 생각해. 다만 약간의 반감이 들었던 이유는, 형처럼 김애란을 치켜세우는 이들을 보면서 '좀 과대평가된 인물 아닌가' 하고 내심 불만을 가졌던 것 같기도 해.


그런데 요새는 김애란을 넘어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나와 매우 멀어진 것 같아. 회사 다니면서 아이 셋을 키우다보니 일상의 감각이 완전히 달라졌달까.

흔히 매슬로우의 5단계 욕구라고 하잖아. 생리-안전-사회적-존중-자아실현의 단계였던가. 청소년 시절의 나는 자아실현 단계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 소설을 쓴다든지 그림을 그린다든지 하면서 말야. 그땐 안전하다고 느꼈고 사회나 존중 같은 건 잘 몰랐던 시기였으니까.

그런데 세 아이의 아빠가 된 후부터는 매일 약간의 불안을 느끼고 있어. 내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우리 식구들 다 어떡하나. 이런 생각이 항상 머리 한 켠에 있거든. 여기서 '잘못되면'이란 당장 소득이 끊기는 문제부터 죽음까지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하는데, 어쨌거나 안전 문제가 더 내게는 중요해진 면이 분명 있어 보여. 그래서일까. 소설을 읽을 동인도 여유도 없어진 기분이야.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애들 먹이고 씻기고 재우다 지쳐 잠드는 일상의 연속인데, 와중에 마음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데 소설이라니.


어렸을 때 있잖아, 내가 너무 예술을 동경하니까 아버지가 그랬던 적이 있거든. "빵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빵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예술 운운하는 건 한량이다"라고. 나는 이제 내 빵도 해결해야 하고 자식 셋의 빵까지 해결해야 해서, 김애란의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과 같은 문장을 볼 때마다 사치스럽다는 생각을 해. 센티멘털이라니.


그나저나 애란 대체 뭘까. 그토록 센티멘털하고 소설팬이었던 내가 이렇게 되다니. 애가 뭐길래, 애란 뭐길래, 애란 애란... 그런 나의 애란이 있고, 형의 김애란이 있고, 뭐 그런 거겠지.


그럼에도 형의 편지를 읽는 건 즐거웠어. 재밌는 영화를 보면 '와 재밌다, 담에 한번 또 봐야지' 정도 생각하고 말지만 좋은 영화를 보면 '이 감독 누구지'하고 생각하게 되는데, 형의 편지를 보면서 김애란에게는 통 관심이 없었고, 이 글을 쓴 조한진에게 더 관심이 갔거든.


소설과 멀어졌음을 선포했지만 여전히 사유는 내게 큰 놀이이자 숙제야. 요새 읽은 것들에 대해 나도 잠시 얘기해보면.


헝가리의 철학자 아그네스 헬러(Agnes Heller)는 스무살 살 때 난생처음으로 흑인을 봤다고 한다.
- 이졸데 카림 지음, 이승희 옮김 <나와 타자들(민음사, 2019)>


위와 같이 강렬한 첫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개인들이 어떻게 타인을 타자화(othering)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야. 현대철학의 중요한 키워드중 하나인 타자화는 혐오와 차별의 어머니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카림에 따르면 점차 더 다원화된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고 타자화 문제는 다원화된 사회일수록 그 중대성이 높아진다고 해. 그렇다면 다원화된 사회란 무엇일까. 그걸 이해하려면 다원화 이전의 형태, 동질사회를 이해하는 편이 좋겠지.


카림에 따르면 동질사회, 즉 인종, 종교, 문화적 통일성을 갖춘 상태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게 아니라 치열하게 만들어졌다고 해. 그녀는 그러면서 '동질 사회는 의도된 정치 행위의 결과다'라고 지적하지. 이를 깨닫는 것은 중요해. 동질사회=정상값 / 다원화사회=이상값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좋은 반격이 되는 거니까.


카림은 이런 식으로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문제에 대해 사유를 확장해주지. 그녀의 이야기를 읽는 시간은 뭐랄까, 참 즐거운 시간이었어.


자신이 실제 자신이라고 믿는 모든 정체성과, 자신이 실제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모든 표상은 환상이다.
-본문 중


형.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식당에 앉아 있어. 크림소스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까르보나라를 먹은 뒤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지. 회사일로 일주일간 프랑크푸르트에 머물면서 느낀 점은 '이곳에는 참 인종 차별이 없구나'라는 거였어. 그렇다면 그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타자화의 반대, 환대를 이 사회의 기본값으로 만드려면 우리는 어떤 사유를 하면 좋을까. 여전히 그런 문제가 관심사야.


형이 편지에서 언급한 거 말야. 내가 육아로 바쁜 시기가 오면 형이 한번 우리 동네에 와줄 거라던 약속. 나도 기억하고 있어. 편지를 통한 사과로 은근슬쩍 없던 일로 넘어가려는 것 같은데, 난 계속 기다릴 거야. 잊은 것 같으니 장소를 다시 알려줄게. 수도권 지하철 4호선 인덕원 역. 거기서 만나 우리 형의 애란과 나의 애란에 대해, 마음이 황폐해지는 일과 사회가 황폐해지는 일에 대해 한번 이야기 나눠보자. 이제 막 시작한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말야.


2025.05.30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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