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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좋은 세상

육아일기 #1

by 전새벽

쌍둥이 유모차를 밀고 다니면 동네에서 주목을 좀 받게 된다. 많은 행인들이 귀엽다며 말을 걸어주는 것이다. 지나가면서 아이고 귀여워 정도의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적극적으로 다가와 큐앤에이를 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이런 상호작용은 기분 좋은 일이다. 우선 내 애들을 예뻐해주니 기분이 좋고 나아가 아기들을 보면 함박웃음 짓는 사람이 많은, 건강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감각 때문에 기분이 한번 더 좋다.


와중에 웃지 못할 일도 생긴다. 며칠 전에는 유모차를 밀고 단지 안을 걷고 있었는데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가 다가오셨다. 그는 적극적인 부류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편이었는데, 그 경우 대화가 오 분에서 십 분까지도 이어질 수 있으므로 내쪽에서도 긴장이 필요한 일이긴 했으나 특별히 바쁜 일은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나는 경계심없이 아주머니의 접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주머니께서는 몇 개월? 얘가 남자고 쟤가 여자? 아이고 애기 엄마가 힘들겠네, 부부가 애국하네로 이어지는 통상의 레퍼토리로 포문을 여신 뒤 느닷없이 정치 얘기를 꺼내셨는데 대통령 선거가 얼마남지 않은 시기였음을 헤아려보면 과히 놀랄 일도 아니긴 해보였으나...그 뒤가 문제였다.

"얘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 와야 되는데 말야."

"그렇죠."

"그러니 대통령을 잘 뽑아야 돼."

"맞아요."

"이재명이하고 문재인이 그 찢어죽일 놈들."


어이쿠, 이런 과격한 표현을. 그런데 순간 웃음이 났다. 아주머니의 태도와 언행에서 큰 아이러니가 느꼈기 때문이었다. 애들 앞에서 찢네 마네만 안하셔도 조금은 더 좋은 세상일 것 같은데. 그렇게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나는 정치에 다소 과몰입한 이웃에게 살가운 미소를 건넸다. 아주머니는 '이재명이'하고 '문재인이'를 생각만해도 혈압이 오르는지 구시렁대며 갈 길을 가셨다.


*


아내는 첫째와 둘째를 데리고 건넌방에서 잔다. 이른바 여자방.

나는 셋째를 데리고 내 방에서 잔다. 여기는 남자방.

집안에 젠더이슈가 발생하여 그렇게 나눈 것은 아니고, 나름의 논리가 적용된 선택이었다. 기회되면 얘기해 보겠다.

아무튼 오늘도 민준이를 데리고 쿨쿨 자고 있는데 울음 소리가 들렸다. 눈 떠보니 준이가 거칠게 칭얼대고 있었다. 좀 더운가 싶어 에어컨도 틀어보고 토닥여도 봤지만 준이는 그칠 기색이 없어 보였다. 이럴 땐 탄수화물이 들어가줘야 한다. 분유를 타서 먹였다. 시간은 두 시 삼십 분이었다.


배를 채우고 다시 잠든 7개월 짜리 아이를 어루만지며 나는 생각한다.

어쩌다 이런 애를 낳았을까!

감탄은 양가적이다. 어쩌다 이렇게 예쁜 꼬물이를 낳았을까 하는 마음과, 각박한 세상에 이렇게 자식들을 많이 낳아 어쩔 셈인 거냐! 라는 자조적인 마음. 아마 오랫동안 내 마음은 그렇게 양가적일 거다. 그 비율이 50대 50을 넘어, '예쁜 꼬물이'쪽이 51이나 60쯤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그런데 일을 그렇게 만드는데 필요한 것 중 대통령이 전부일 것 같지는 않다.


어젯 밤 대선이 있었다. 나는 자식 셋을 모두 데리고 투표장에 다녀왔다. 아침 일찍 다녀왔다는 아내와 속마음을 맞춰보니 각자 소신투표를 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까. 궁금했지만 육아로 피로한 부부는 본격 개표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잠들어 버렸다.

준이가 분유 먹는 동안 스윽 핸드폰을 열어보니 야당대표가 당선되어 있었다. 정권교체. 역사에 남을 큰 사건이 또 한 번 일어났다.

같은 시간, 미국발 뉴스도 신문지상을 메웠다. 트럼프팔 철강관세가 25퍼센트에서 50퍼센트로 올라간다는 소식이었다.

국제정세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진다. 자기이익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열강들과 과거에 비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이념/종교 대립으로 인해 어떤 식으로 입장을 취하든 적이 생기는 시대가 됐다. 그러니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고생 끝, 파라다이스 시작'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변화는 있겠지만 절대적이지 않다. 즉, 우리 애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려면 정치는 일부일뿐, 분명 더 중요한 무언가 남아 있다.


육아일기를 한편 썼더니 어느새 밖이 밝아져있다. 정권교체가 일어난 첫 아침이다. 새 정권이 두루 잘 해줬으면 하는 마음과 더불어, 정치에게 다 맡겨버리지 말고 개인 차원의 변화도 만들어 나가야겠다는 다소 EBS 청소년 교육 영상 같은 생각을 하며 나는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꼬물이들도 곧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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