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 유엑스

- 육아일기 #3

by 전새벽

나는 회사에서 안드로이드와 관련된 일을 한다. 구글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모바일 운영체제 안드로이드 말이다. 이런 경우는 이렇게 한다, 저런 경우는 저렇게 한다... 이런 논리들의 집합, 그것을 운영체제라고 부른다. 안드로이드 또한 자신만의 철학들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오디오 포커스 매트릭스'다. 오디오 재생요청이 여러곳에서 올 때, 누구한테 오디오 재생권을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논리다.


1. 유튜브 재생 중에 스포티파이 재생을 누른다 => 오디오 포커스는 스포티파이에게로 옮겨간다. (유튜브 오디오 재생 중단)

2. 스포티파이를 듣는 중에 전화가 와서 받았다 => 오디오 포커스는 전화로 옮겨간다. (스포티파이 오디오 재생 중단)

3. 전화통화 중인데 앱에서 경고음을 보내려고 한다 => 오디오 포커스는 옮겨가지 않는다. (앱 경고음 차단)

이런 것들.


이런 로직이 없으면 사용자의 기기는 우후죽순 소리를 쏟아낸다. 이건 대표적인 배드 유엑스(bad UX. 나쁜 사용자 경험)다. 이런 것들을 차단하기 위해 안드로이드는 여러 궁리를 하며 살고 있다.




얼마 전에 책을 한 권 읽었다. 중독심리학 연구가 저드슨 브루어의 <식탐 해방>. '전전두엽피질'이나 '안와전두피질' 같은 용어는 어려웠지만 '뇌의 음식 회로와 감정 회로가 얽힌다'나 '단지 감정을 먹고 있었다'는 표현들 덕분에 내용을 잘 따라갈 수 있었다. 메시지는 가짜 허기에 속아 과식하는 일을 멈춰라, 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가짜 허기에 속아 과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항상 불쾌함을 느꼈다. 더부룩함, 멈추지 않는 갈증, 심지어 짜증까지 났다. 즉 항상 배드 유엑스를 경험했다. 그래서 먹는 문제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군것질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더부룩함과 갈증은 사라졌다.


그런데 여전히 일상에는 배드 유엑스가 남아 있었다. 특히 주말 저녁이면 머리가 무겁고 신경질적인 기분이 자꾸 들었다. 주의를 기울이자 문제를 깨달을 수 있었다.

주말 아침이면 나는 아기를 안고 티브이를 켠다. 분유를 먹이면서 뉴스 따위를 보는 것이다. 주말은 그 상태로 흘러간다. 뉴스가 예능으로, 예능이 쇼츠로 바뀌긴 하지만 어쨌든 '티브이 보며 육아'라는 형태는 늘 유지되었다. 나는 피로감과 신경질을 유발하는 게 티브이일 거라고 거의 확신했다. 그래서 브루어의 조언처럼, 그것이 내게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지 조용히 살펴봤다. 그러자 예능이나 쇼츠나 심지어 뉴스조차도, 별 가치도 없는 걸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오늘 아침, 평소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아내와 의기투합해 거실의 티브이를 치웠다. 티브이가 사라진 거실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공간처럼 보였다. 나는 분유를 먹이면서 민준이와 송이의 얼굴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비로소 뭔가 잘 돌아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티브이를 치우기 전 갈등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속보가 뜬다든지, 좋아하는 사람이 유퀴즈에 나온다든지 할 때 티브이를 챙겨 볼 일이 있을 것 아닌가. 그러나 고민 끝에 과감히 티브이를 저버리기로 했다. 그건 오디오 포커스 매트릭스 문제 때문이었다.


사람은 어떤 상태이냐에 따라 오디오 포커스 매트릭스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시절 오디오 포커스를 가장 많이 가져갔던 건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스무 살 연애 시절에는 밤늦게 울리는'카톡'소리가, 신입사원 시절에는 팀장님의 호출이 가장 큰 오디오 포커스였다.

한편 육아인이 되면 아이 소리에 가장 귀를 집중하게 된다. 다른 어떤 소리보다 그게 크고 또렷하게 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티브이를 틀면 오디오 포커스 매트릭스가 무너진다. 포커스가 아이에 있지 않고, 자꾸 티브이에 있게 된다. 고작 애기 칭얼대는 소리 때문에 유재석의 재치 넘치는 멘트를 놓치거나 에스파 신곡의 후렴을 제대로 못 듣는다고 느낀다. 자꾸 방해를 받는다고 느끼니, 신경질적이 된다. 티브이 철거는 오디오 포커스 매트릭스를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한 중요한 작업이었다.


티브이가 사라진 광활한 거실에서, 나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본다. 애들은 잘 놀다가도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운다. 나는 달려가 아이에게 무슨 이상이 있는지 살핀다. 마침내 오디오 포커스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잠시 후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서 잠이 든다. 첫 번째 낮잠 시간인 것이다. 나는 거실에 앉아 무료함을 느끼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한다. 소음 없는 공간에,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린다.

문득, 오늘 하루가 무척 근사한 날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굿 유엑스를 경험할 때 늘 드는 생각이다.



챗지피티의 도움을 받아 만든 육아 오디오 포커스 매트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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