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졸데 카림의 명저, <나와 타자들>에 부쳐
총리 후보 김민석에 대한 말들이 쏟아지고 있다. 지지자들은 그가 총리직을 수행하는 것이 백 번 옳다고 말한다. 반대파는 그가 자격이 부족할뿐더러 채무관계 등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고 지적한다.
그 와중에 내 눈길을 끈 것은 그의 차별금지법 관련 과거 발언이었다. 2023년, 김 총리 후보자는 기독교 단체를 방문해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치적 속내가 뻔히 보이는, 기독교 여론을 의식한 발언이었지만 어쨌든 실망스러웠다. 2017년 대선 토론이 떠올랐다. 동성애 반대하죠? 라는 홍준표의 질문에 반대하죠, 라고 문재인이 답하자 “성정체성은 누군가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일침을 놓았던 심상정이 몹시 그리워졌다.
차별은 왜 생기는 걸까. 내 오랜 답은 이랬다. ‘차별 = 낯선 것에 대한 거부 반응.’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라고, 사랑하려면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졸작 에세이집 『닿고 싶다는 말』을 냈을 때도 그랬다. 책에 실린 게이 친구 이야기를 보고 주변 사람들이 엄청나게 물어댔다. 정말 그런 친구가 있느냐고, 그게 누구냐고.
‘정말 있냐’는 질문은 다양성에 대한 무지를, ‘누구냐’는 질문은 어떻게든 별종을 식별해내려는 집요함을 드러냈다. 그때도 생각했다. 성소수자 친구가 주변에 없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거라고. 하지만 이런 생각을 뒤집는 주장을 최근 한 권의 책에서 만났다.
헝가리 철학자 아그네스 헬러는 스무 살이 되어서야 생애 처음 흑인을 보았다고 한다.
- 이졸데 카림 지음, 이승희 옮김 『나와 타자들』(민음사, 2019)
백인 여성인 헬러가 스무 살 때 처음 흑인을 봤다는 것이, 그녀가 필연적으로 차별주의자가 되었음을 의미할까? 글쎄. 답을 하기 전, 헬러와 반대 상황에 놓인 경우를 보자. 카림은 이렇게 쓴다.
오늘날 서유럽의 대도시에 살고 있는 어린이는 독일어, 세르비아어, 불가리아어, 아랍어뿐 아니라 중국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등 다섯, 여섯, 일곱 개의 서로 다른 언어가 존재하는 자기 반 이야기를 할 것이다.
A는 다양성에 대해 무지한 사람, B는 다양성에 일찍부터 노출된 사람이라고 해보자. 나는 당연히 A보다 B가 더 개방적일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카림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녀에 따르면 A와 B 모두 오히려 폐쇄적인 경향을 보일 수 있다. A는 예상대로, 타인의 특징을 너무 낯설게 받아들이기에 그렇다. 그런데 B의 경우는 다양한 요소에 너무 일찍부터 노출된 나머지, ‘기본값’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하고, 결국 자신이 가진 특성을 기준 삼아 타자를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양쪽 모두 ‘타자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결과적으로 배타성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나와 타자들』은 이러한 원리에 따라, 다원화된 사회일수록 오히려 혐오와 차별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말한다. 책을 읽으며 ‘사랑은 이별과 한 패’라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적어도 카림에 따르면, 다원화는 차별과 한 패다. 이상하다. 다원화는 차별 없이 더불어 산다는 뜻 아니었던가? 어쩌면 우리는 다원화에 대해 오해해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 오해는 어디서 비롯될까? 카림은 말한다. 사회적 다양성이 단순히 여러 문화와 종교가 더해지는 것이라고 믿는 데서 오해가 온다고. 기존 토착 문화 위에 새로운 요소가 ‘더해진다’는 생각은 틀렸다.
다원화는 외부에서 더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내부에서 전면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카림은 덧붙인다.
바로 이 변화가 더하기라는 표상을 통해 은폐된다.
책은 이어서 종교, 문화, 정치 영역에서 다원화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통찰력 있게 분석한다. 페이지마다 통찰이, 단락마다 명문장이 있다. 무척이나 감탄하며 읽었고, 요즘은 만나는 사람마다 “카림 읽어봤어?”라고 묻는 게 인사가 되어버렸다.
이런 나와 달리 고개를 갸웃할 독자들도 있겠다. 특히 고든 올포트(Gordon Allport)의 팬이라면 그럴 것이다. 올포트는 『편견』(교양인, 2020)에서 편견이란 ‘충분한 근거 없이 남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런 편견은 뇌가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다. 모든 개체를 일일이 판단하기엔 비효율적이므로, 사람들은 범주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들이 생겨난다.
“그 사람들은 너무 따로 놀아요. 돈에 집착하는 것도 보기 좀 그래.”
“그 동네에 가봤어요? 더럽고 위험해서 밤엔 못 나가요. 저들이 들어오면 집값 떨어지는 건 당연하죠.”
‘그들’의 대상은 유대인이었다가 흑인이었다가, 조선인이었다가, 성소수자였다가, 난민이었다가, 여성이었다가… 계속 바뀐다. 결국 모두가 차별받는다.
올포트는 이렇게 형성된 내집단과 외집단이 적대적 언사 → 회피 → 차별 → 물리적 공격 → 절멸이라는 단계로 나아간다고 경고한다. 절멸.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를 막기 위한 방법은 없을까? 올포트는 ‘접촉 가설’을 제시한다. 편견을 줄이려면 다른 집단과의 접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 다음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집단 간 지위가 평등할 것
공동의 목표가 있을 것
협력이 이루어질 것
사회/제도적 지원이 있을 것
서유럽 대도시의 다인종 학급을 떠올려보자. 학생들은 지위가 평등하고, 협력하고, 교칙이나 선생님을 통해 사회적 지원도 받는다. 하지만 한 가지가 부족하다. ‘공동의 목표’. 학교라는 공간은 본질적으로 경쟁을 유도하기에, 공동 목표를 갖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다면 네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접촉은 가능하기나 한 걸까? 이 질문은 언젠가 더 많은 사람과 함께 토론해보고 싶다.
우리는 방금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다루었다. ‘무지가 차별을 낳는다’와 ‘다양성이 차별을 불러온다’는 입장.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 『나와 타자들』을 읽은 후, 나는 후자에 더 가까운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래서 책장을 더 빨리 넘겼다. 혹시 마지막에 중요한 제언이 담겨 있지는 않을까 해서.
하지만 놀랍게도, 제언은 없었다.
오히려 카림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비판하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마치 해답이 있고,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는 듯 헛된 희망을 준다. 더 나아가 이 질문의 목적은 실제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
오늘날 이 질문은 결국 정책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해답을 '알고 있는' 사람, 하나의 해답을 줄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사람에 대한 질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은 징후적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정치적 희망은 이념이 아니라 사람에게 걸리기 때문이다. 무언가 다른 것, 더 나은 것을 약속하는 사람, 해결책을 약속하는 사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약속하는 사람. 그리고 이런 인물이 나타날 때마다 과대 선전이 있었다. 오바마, 버니 샌더스, 마르틴 슐츠, 마크롱.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대답되지 않은 채 남는다.
이제 다시 아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스무 살에 처음 흑인을 본 아그네스 헬러는 차별주의자가 되었을까?
아니다. 헬러는 헝가리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되었고, 윤리학을 탐구하며 차별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했다.그녀에 따르면 차별은 무지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에서 기인하는 사회의 문제다.
끝으로『나와 타자들』에 대해 한번 더 얘기한다. 책에 제언은 없지만 카림의 분명한 입장은 있다. 그녀에 따르면 순수주의자는 잘못되었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 비현실적이므로 그렇다. 심지어 그건 위험한 일이다.
“이민 이후(postmigrantisch)”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 사회는 이민 이후 사회다. 이 말은 이민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성공적인 이민이 유럽 사회를 지속적으로 변화시키고, 심지어 다원화했다는 뜻이다.
(...)
그러므로 전선은 원주민과 이민자 사이에 있지 않다. 정치 전선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정치 전선은 오늘날 포괄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과 배타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 사이에 놓여 있다. 이민으로 변화된 이민 이후의 사회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이민 이후의 현실을 수용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른다. 후자는 변화를 위협으로 느끼고 '과도한 외국화' 또는 이슬람화로 재해석하는 이들, 말하자면 변화를 막고 싶은 사람들이다. 현실에 대한 이러한 저항은 변화하지 않는 '진정하고 순수한' 사회라는 환상에 기초하고 있다. 역사는 진실에 대한 거부와 부인이 힘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이는 위험한 힘이다. 현실을 자신들의 환상에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
2025.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