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일기 #4
둘째의 기저귀를 갈고 있는데 셋째가 맹렬하게 운다. 그런데 첫째가 짜증을 부리기 시작한다. 아이고 이 썩을 놈들아. 아내와 나는 진땀을 흘려가며 사태를 진정시킨다. 그러면서 서둘러 밥을 먹는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빨리 먹고 치우고 애들 밥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을 매일 겪으며 나는 생각한다. 이번 생은 적당히 끝내고, 빨리 쿵!족으로 다시 태어나야지...
나의 아버지는 9남매다. 인구절벽의 시대를 사는 요즘 기준으로는 잘 상상이 안된다. 어떻게 아홉 명을 낳았지? 2년에 한 번씩 출산한다고 해도 18년짜리 프로젝트다. 뿐만 아니다. 육아 비용도 따져보면 아득해진다. 짜장면 한 그릇 씩만 시켜도 부모까지 11 그릇이다. 체력도 경제력도 계산이 안나온다. 지금처럼 모든 게 계산에 기반하지는 않던 시절의 일이라 가능했으려니 한다.
9남매의 막내, 옥은 결혼하기 전에 우리 집에 잠깐 같이 살았다. 어릴 때라 기억이 촘촘하진 않은데, 드문드문 떠오르는 좋은 추억들이 있다. 두런거리는 소리에 일어나보니 밤 늦게 뭘 먹고 있던 고모. 눈이 마주치자 기꺼이 나를 야식테이블로 초대해주었다. 다른 식구들이 깰까봐 소리 죽여 먹는 한 밤의 된장찌개. 둘만의 비밀. 옛날 얘기들.
그 고모가 배우자상을 당했다. 온화하고 인자했던 고모부였는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빈소에 들어서니 희와 연이 있었다. 내 사촌들. 옥의 딸들이었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안고 울었다. 어떡하니. 내 입에서 그런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가족을 잃은 사람을 보면 늘 그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잠시 후, 밥 먹는 자리에서 그런 얘기들을 했다. 투병과 임종에 관한 이야기들. 그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와 더불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예전처럼 다 모여 살았으면 좀 나았을 텐데. 누가 그런 말을 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프면 번갈아 돌보고, 누가 돌아가시면 다 같이 모여 장을 치르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대가족 얘기로 흘러갔다. 무슨 일이 생겨도 힘을 합칠 수 있던 시기의 이야기들.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누가 이런 식으로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노인과 청년 그리고 아동이 무인도에 있다. 이 셋이 살아가는 법은 단순하다. 노인과 아동은 직접 물고기 사냥을 할 체력과 기술이 없다. 오직 청년만 물고기를 잡는다. 하지만 청년은 기꺼이 물고기를 노인과 아동에게 나누어준다. 이렇게 분배가 가능한 이유는 청년이 한때 아동이었고, 노인이 한 때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 사회는 경제활동이 가능한 기간 동안 열심히 벌어 사회에 나누어주고,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시기에 그것을 제공받는다는 논리로 유지된다.
<총, 균, 쇠>로 유명한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또 다른 명서 <어제까지의 세계>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서구문명과 개인주의 생활양식은 인류 전반이 형성한 다양한 문화중 아주 일부일뿐인데다 고작 최근에 생겨난 것임을 보여준다. 특히 다이아몬드가 정성들여 취재하고 묘사한 아프리카 쿵!족의 이야기가 인상 깊은데, 쿵! 족에는 정치적 리더십도 없고 개인소유물도 없다. 무엇보다 공동체가 함께 육아를 한다고 한다. 쿵!족에서는 적어도 아기띠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화상회의에 들어오는 재택근무자도 없을 것이다.
위의 이야기들은 꼭 부부 두 사람이 모든 걸 해쳐나가야 하는 게 인생이 아님을 보여준다. 개인 단위가 아니라 가족 단위, 혹은 공동체 단위로 꾸려가는 삶도 있다. 경제활동과 밤샘육아를 부부가 고스란히 책임져야 하는 이 기형적인 사회에서, 나는 대가족에 대한 판타지를 갖고 만다.
얼마 전에 형이 집으로 왔다. 같이 맥주나 마실까해서 초대했는데 얼떨결에 1박2일을 같이 있고 말았다. 그런데 형이 있음으로서 어찌나 편하던지! 첫째와 놀아주든 둘째 혹은 셋째를 안고 있든, 형은 계속해서 뭔가를 도와줬다. 아주 큰 일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의 기여만으로도 우리 부부는 크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내는 웃으면서 형에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냥 우리 합가해요."
아내도 같은 판타지를 갖게 된 모양이었다.
역할을 분담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대가족에게는 의의가 있다. 그 이야기는 '로세토 효과'라는 표현으로 다 설명 가능하다.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로세토 마을은 겉보기엔 여느 마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미국 다른 지방에 비해 뭔가 다른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로세토인들만 심장병 사망율이 미국 평균 대비 30~50% 낮았다는 점이었다. 연구진들은 곧 이 수치에 주목했고, 로세토인들만 간직한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마을로 들어갔다.
식습관이 원인일거라던 연구진의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로세토 사람들은 여느 미국인들처럼 먹고 마시고 흡연하고 운동을 안했던 것이다. 그럼 비결이 대체 무엇일까. 오랜 노력 끝에 연구진은 결론을 찾는다. 그건 바로 로세토 마을이 유난히 왕래가 많은 마을이라는 거였다. 그들은 대가족 기반으로 살아가며 한 사람이 수십 개의 모임에 속하여 마을 사람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서로 과시하거나 경쟁하는 문화가 없었고 외로움과 스트레스가 다른 지역대비 월등히 덜했던 것이다.
아이 세 명을 키우며, 외롭다는 생각을 종종한다. 식구가 이렇게 많은데 무슨 외로움이냐? 물론 애들이랑 실컷 살 부대끼고 살기 때문에 정서적으로는 괜찮다. 이 외로움은 뭐랄까,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는 생각에서 느껴지는 절망에 가깝다. 우리 가족이 굶든 말든, 애들이 아프든 말든 사회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사실에 매일 그러한 절망을 느낀다. 사회가 '네 일'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일'이라고 느낄 수 있는 상태. 나의 대가족 판타지는 그런 것들을 향해 있다.
끝으로 쿵! 족에 대해 한번 더 얘기한다. 자료에 따르면 쿵!족은 아이가 울면 그게 누구 애인지 따지지 않고 달려가 돌봐준다고 한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다시 태어나면 쿵! 족으로 태어나기로 했다. 다시 태어났을 땐 아이를 안키우는 것도 방법 아닐까하고 잠깐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나는 애들이 너무 좋아 다시 다둥이 아빠가 될 생각이다. 다만 지금처럼 모든 걸 핵가족 형태로 헤쳐나가야 하는, 핵 싫은 이 체제로는 안되겠어서 나는 오늘도 대가족 판타지, 정확히는 쿵!족으로 다시 태어나리란 원대한 꿈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2025.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