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만 J 이스라엘, 에스콰이어> 리뷰
잿빛 LA의 축축한 질감, 영화 전반에 깔린 음울한 정서, 덴젤 워싱턴의 명연기(그리고 그의 분장!),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다이나믹한 서사, 감독 본인이 각본을 썼고 조카가 출연을 했으며 동생은 편집을 했고 딸은 음성팀에 참여했다는 사실까지. 댄 길로이의 2017년작 <로만 J 이스라엘, 에스콰이어>는 얘깃거리 참 많은 영화임에 틀림 없다.
그렇다고 열 페이지, 스무 페이지짜리 리뷰를 쓸 수는 없어 그중 하나를 고른다. 그건 바로 서사다. 특히 주인공의 삶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서다.
대학생 시절 학생회를 시작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해 온 로만 J 이스라엘. 부, 명예, 윤택한 삶 따위 일찌감치 포기한 그는 허름한 복장에 커다란 서류가방 하나 들고 오늘도 LA시내를 누빈다. 인권 변호사 사무실의 동업자 윌리엄이 끊임없이 건수를 물고 오기 때문이다. 윌리엄은 의뢰인을 만나고 법정에 서는 프런트 역할을, 로만은 자료조사와 법적판단을 하는 실무형 참모역할을 하고 있다. 돈은 없지만 둘에게는 사명감이 있다. 자부심도 있다. 무엇보다 ‘미스터’보다 높은 ‘에스콰이어’라는 직함이 로만의 자부심을 대표하고 있다.
위기는 통지서도 없이 온다. 어느날 윌리엄이 쓰러지고 그의 가족들이 로펌을 정리하겠다며 나타난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로만은 일자리를 찾아 시내를 헤매지만 온통 허탕이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조지와 손을 잡는다. 번듯한 차림새 하고 잘난척하는 사람과 일하고 싶은 마음 따위 추호도 없지만 어쩌랴.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비록 BMW를 타는 CEO와 손을 잡았지만 로만의 열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바쁜 회사일이 끝나면 땅콩버터 바른 빵을 우적이며 위대한 숙원사업에 매진한다. 그건 바로 사회 시스템 전체를 뜯어고쳐달라는 내용을 담은 방대한 양의 탄원서 쓰기 프로젝트다. 30년 넘게 사회운동을 하며 찾아낸 온갖 부조리를 그는 한 편의 탄원서에 담고 있다. 매일 들고 다니는 물개처럼 크고 무거운 가방에는 항상 이 탄원서가 들어 있다. 그런데 점차, 견딜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가난이라는 곤경, 나 때문에 의뢰인이 죽었다는 자책감, 내가 생각했던 정의가 이미 고리타분해졌다는 절망감, 모든 것들이 로만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한 인물의 이야기를 죽 따라가는 작품들은 보통 ‘헤어 체인지’로 인물의 변화를 드러낸다. <아저씨>에서 원빈이 삭발을 한다는 건 뚜껑이 열렸다는 뜻이다. <슬램덩크>에서 강백호가 머리를 민 것은 이제 제대로 해보겠다는 뜻이다. <로만 J 이스라엘, 에스콰이어>에서 덴젤 워싱턴이 사자머리를 누르고 나온 것은? 이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쪽에 가깝다. 앤 해서웨이가 ‘칙칙했던 옛날이여 안녕’하고 샤랄라 변신하고 나온 것처럼, 로만 역시 칙칙했던 과거를 저버리기로 했다. 그건 그가 인권, 사회, 정의 대신 양복, 펜트하우스, 파인다이닝에 눈을 떴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미 이 시점에 로만에게 정을 느끼고 있는 관객은 이 같은 변화가 반갑다. 고생 많이 했으니까 좀 즐겨. 한껏 그의 일탈을 부추기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태리산 양복을 빼 입고 고급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그는 왜 이리 물가에 내 놓은 애 같아 보이는가? 영화가 남긴 여운은 이 질문과 함께 계속 밀물처럼 찾아왔다. 그리고, 간신히 떠올린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로만이 세속화 되자 주변 인물들이 의식화되었다. 마야는 로만의 인생을 보며 감명을 얻고 있고, BMW남 조지조차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해 보려고 한다. (다들 어디 있다 이제 왔어? 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 한가득이다.) 이 공교로운 어긋남으로 인해 로만은 영원히 부유하는 존재가 된다.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겉만 맴도는 고리 같은 삶. 인생이 원래 이렇게 블랙유머 같은 것인가.
둘째, 그는 진짜 변하지 못했다. 삭발을 한 원빈은 그때부터 어금니 빼고 모조리 씹어먹을 기세로 총을 쏘며 뛰어다녔고 염색반삭의 강백호는 그날부터 밤새 슛연습을 했다. 로만은? 삐치는 머리 좀 누르고 양복을 바꿨다는 것 외에 그의 행태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무거운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며 무엇보다, 여태 헤드폰을 쓰고 있다. 비록 구형에서 신형으로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그의 귀를 덮은 헤드폰이 세상과 단절된 그의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사회운동을 하겠다면서 사회가 변하는 걸 눈치채지 못한 남자의 이야기를 봤다. (그는 젠더 이퀄리티를 모르고 ‘기사도’ 운운하다 망신을 당하는 사람이다.) 면접 보러 갈 차비도 없는 주제에 노숙자 변사체의 화장비를 대겠다며 으름장 놓는 남자의 이야기를 봤다. 뭔가 잘 해보려고 했는데, 결국 이룬 것 없이 떠나버린 남자의 이야기를 봤다. 무능하고 무모하며 무의미한 삶의 주인공. 그런데 영화를 보내는 내내 그가 왜 이리 좋던지.
마지막 장면에서 로만의 ‘탄원서’는 결국 법원에 제출된다. 그리고 카메라는 이를 제출하는 조지의 뒷모습으로부터 점차 멀어진다. 왜 페이드 아웃으로 마무리 했을까? 어쩌면 이제는 떠나도 되겠다며 저승사자의 손을 잡고 멀어지는 로만의 영혼의 시선은 아니었을지.
그리고 노래 흘러 나온다. ‘언제든 전화하면 내가 옆에 있어 줄게요(whenever you call me I’ll be there)’라는 후렴구의 가사는 평소 반갑게 고객들의 전화를 받던 로만이 우리에게 하는 말인가? 아니면 로만을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관객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인가?
그런데 그게 어느 쪽이든, 이 노래를 부른 그룹 이름 ‘The Spinners’처럼,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공중만 맴돌고 있는 이 고리 같은 삶의 옆을 대체 어떻게 꿰차면 좋단 말인가.
2025.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