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허튼소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르헤시아 Feb 14. 2018

소통

소통을 이야기할 때 어김없이 연상되는 황당한 오랜 추억이 있다. 80년대 초반, 남미 칠레의 이키케(Iquique)라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다. 나를 포함한 성인 남자 8명이 술집을 찾았다. 우리 일행 중에 스페인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부전공으로 했다는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두리번거리며 길을 헤매는 우리에게 한 청년이 다가왔다. 옷차림도 생김새도 말쑥하게 생긴 청년이다. 청년은 반가운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낸다. 기회다 싶어서 우리는 요란한 손짓 발짓으로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그 청년은 우리의 의도를 알아들은 듯이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 청년을 따라 여름 한낮 낯선 이국의 마을을 한 시간 가량을 헤맸다. 동네 아이들이 우리 뒤를 따라 마치 굴비 엮이듯 줄을 이어 졸졸졸 따라다녔다. 남미 마을의 도로는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길은 마을 중심의 광장으로 이어진다. 한 시간 가량 걸으면서 낯익은 중앙 광장을 몇 번 반복해서 지나쳤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는 순간, 아이들의 제스처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자기 머리에 손가락으로 작은 원을 그렸다. 한쪽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한다. 청년과 우리를 번갈아 보면서 같은 시늉을 반복한다. 그러곤 연신 낄낄거리며 웃는다. 그제야 알아차렸다. 청년은 언어장애인이다. 게다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친구다. 청년이 어버버 하며 뭐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스페인어로 착각했던 것이다. 걷다 말고 멈추어 서서 이 황당한 상황을 파악하는 우리를 보며, 청년은 연신 어깨를 추켜올렸다. 알 수 없는 말을 쉬지 않고 어버버거린다. 아이들은 신이나 깔깔깔 웃는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에게 한결같이 의아한 시선을 보낸 이유도, 우리가  낯선 동양인이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아, 이런 경우도 있구나". 멀쩡한 남자 8명이 졸지에 단체로 바보가 되어 버렸다. 


그날 우리는 이왕 나선 길, 심기일전하여 택시로 갈아탔다. 장정 8명이 택시 한 대에 마치 짐짝 구겨 넣듯 탔다. 기대와 달리 마을 광장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술집은 결국 찾지 못헸다. 졸지에 혼돈상태에 빠져버린 우리를 태우고, 기사는 4시간 가량 한적한 고속도로를 달려서 날이 저물어서야 더욱 낯선 도시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무덥고 짜증 나고 허탄하게 불행했던, 멀쩡한 바보들의 하루였다. 대략 13시간가량 헤맨 끝에 병맥주 한 병씩을 마셨다. 그뿐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날은 국경일이라 모든 가게가 쉬는 날이었다. 이 일에 관하여 다시는 아무도 입에 담지 않았다.


다시 돌이켜봐도 쑥스럽고도 어처구니없는 기억이다. 멀쩡한 사람들도 집단적으로 졸지에 바보가 될 수 있다. 또 의도치 않게 조롱거리로 취급받을 수 있다는 소중한 경험이다. 이는 상대의 의도 혹은 실체와는 상관없다. 단지 우리들 스스로가 원하고 기대하는 것을 일방적인 자신만의 언어로 해석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했을 따름이다. 결국은 앎과 소통, 그리고 이해의 문제다. 근본적으로 앎에 문제가 있고 소통마저 안되면 관계 자체가 막히고 피곤해질 수도 있다. 심지어 삶 자체가 어처구니없이 황당하고 허탄한 상황 속에 빠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셈이다.


누구나 소통을 이야기한다. 그 소통은 자기와의 소통일 수도 있고, 타인과의 소통일 수도 있으며, 세상과의 소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소통에 대한 기대는 언제나 자기중심적이요, 자기 주관적이고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머리 속에는 온통 자기가 할 말에 대한 생각뿐이다. 때때로 진심이나 순수한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어느 한쪽은 도구의 수단 혹은 일방적인 소일거리, 심지어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어느 한순간에 수치스러울 만큼 바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그러한 생각에 주체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한다.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징후는 언제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에 존재한다. 다만 보지 못할 뿐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조차도 그러할진대, 눈에 보이지 않고 또 확인조차 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설마 그럴 줄 몰랐다.' 흔히 하고 또 듣는 말이다.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 국부터 마시는 것'은 일상다반사의 경험이다. 그러면서도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또 속아 넘어간다. 상대의 언어가 아닌 자신만의 일방적인 언어로 해석하고 또 이해하는 까닭이다. 그리곤 후회한다. 때론 생각만 해도 화가나고, 몸서리치는 수치심에 휩싸이기도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여기엔 개인의 삶도 허물도 실수도 실패도 당연히 해당된다. 직관은 믿을게 못 된다. 뭔가 잘못되고 이상한 낌새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객관적으로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시각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비록 양태는 다르지만, 새해 들어 비슷한 느낌의 경험이 일상의 현실에서 재현되었다. 이번엔 내가 도움을 베푼 자의 입장에서다. 상대가 먼저 진지하게 도움을 원했다. 그를 절실하게 만든 이유때문에 측은지심이 발동했다. 덕분에 제법 긴 시간 동안 그가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음에도 스스로 획득하기 어렵던 목표를, 별다른 자기 노력 없이 수월하게 성취했다. 내가 바란 것은 어떤 대가나 보상이 아니다. 단지 내가 눈으로 느낌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상대의 진심 어린 마음 하나면 만족했다. 간간히 느꼈던 무례함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무시할 수 있다할지라도, 결국 내게 돌아온 것은 사람에 대한 실망뿐이었다. 어느 날 상대의 실체를 귀로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는 순간 차단된 소통의 벽에 의해서, 호의와 신뢰 그리고 진정성은 실상을 확인할 길이 없는 공허한 그의 말들과, 한결같이 내가 사양하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숱한 그의 일방적 약속들과 함께, 마치 모래탑 무너지듯 한순간에 허물어져 내리고 말았다. 무엇이 그토록 원하던 목표를 이룬 그를 두렵게 하고 회피하게 만든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실패를 교훈으로 삼을지라도 본질적인 문제를 계속 그대로 안고 있는 한, 실수와 실패는 반복되기 마련이다. 


어렴풋이 남아 있는 낡고 오래된 기억 속의 청년은,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우리들의 등 뒤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문제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정신질환자나 인격장애자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정상적인 사람들만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과연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오히려 부러워지는 지금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상적인 사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과 어쩌다가 자기 착각에 빠져, 감정적으로 엮인다는 것은 참으로 황망한 일이다. 어처구니 없었던 낡은 추억을 핑곗거리로 삼아 먼지 털듯 마음을 툴툴 털어 낸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정신적으로 건강할뿐만 아니라 순박하고 좋은 사람들, 훌륭한 인품을 가진 온전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다만 좋은 사람일수록, 스스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기에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은 몸소 겪어봐야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고결한 종교인들 부류에는 이중인격자들이, 문학 예술인들과 자칭 타칭 교양스런 지성인 부류에는 인격장애자들이 쉽게 발견된다. 이는 지극히 직접적이고도 개인적인 나만의 경험에 의한 편견일 수도 있다. 그래서 섣불리 일반화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할지라도 이러한 편견이 또 다른 확신으로 남는 것은, 현실적인 경험이기에 나로선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리 이성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좋은 사람은 못된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사람도 분명 아니다. 나름으로 자부하기를, 진정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을 애써 거부하거나 주저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이왕 시작했으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진심을 다한다. 스스로는 '한 모금의 마른 갈증'조차도 해결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일에는 보상을 기대해 본 적도 없다.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낫다고 한다. 진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했으면 그만이다.그렇게 스스로를 토닥인다. 그래도 마음이 씁쓸하고 자존심이 은근히 쓰라린 것은 감출 수가 없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희망은 기대하는 기쁨보다는 의외로 실망을 자주 가져다준다. 


'사람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다른 이들이 가진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비슷한 실수와 실패가 계속 반복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나는 희망이라는 놈에게 언젠가는 다시 또 속을지도 모른다. 소통은 정확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정확한 언어가 필요하다' 구르지예프의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눈과 귀를 가리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