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허튼소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르헤시아 Feb 10. 2018

눈과 귀를 가리는 것

「겨를 눈에다 뿌리면 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뀌며 한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면 태산도 보이지 않는다. 겨가 하늘과 땅의 위치를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며 손가락이 태산을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눈이 가림을 받으면 하늘과 땅처럼 큰 것도 그것에게 어두워지고 태산처럼 높은 것도 그것에게 가리어지고 마는데 무엇 때문인가? 하늘ㆍ땅ㆍ태산은 먼 데 있고 겨와 손가락은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옛날 송 나라에 술을 파는 자가 있었는데 술맛이 매우 좋았으나 시어지도록 사가는 사람이 없자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이장(里長)에게 물으니, 이장이 말하기를 “술맛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너의 집 개가 사나워서이다.” 하였다. 제 환공(齊桓公)은 관중(管仲)에게 묻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무엇이 걱정거리인가?” 하니, 관중이 말하기를 “사당에 있는 쥐이다. 쥐가 사당에 구멍을 뚫고 사는데, 불을 피우자니 사당이 탈까 두려워하므로 사당의 쥐를 없애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 위 영공(衛靈公)이 옹저(癰疽)와 미자하(彌子瑕)를 맞아들였는데 두 사람이 전제하면서 가리자 복도정(復塗偵)이 나아가 말하기를 “꿈에 임금을 보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엇을 보았는가?” 하니, 말하기를 “꿈에 조군(竈君부엌에서 불씨를 관장하는 신령)을 보았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꿈에 조군을 보았는데 어찌하여 임금을 보았다고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앞에 있는 사람이 불을 쬐면 뒤에 있는 사람은 불빛을 볼 수 없습니다. 지금 임금의 옆에도 불을 쬐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신흠(申欽,1566~1628, 去蔽篇)


상촌 신흠 선생의 글이다. 지도자의 도리로써, 지도자의 안과 밖 가까이에서 눈과 귀를 가리는 마땅히 없애야 할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는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괴물을 닮아가지 않을까 조심하고 경계하라고 말한다.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에 따르면 타인에게서 쉽게 보이는 허물이나 악한 모습과 태도는 곧 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는 정신 심리학적으로 방어기제의 하나인 '투사'로 설명된다. '군자는 잘못된 것의 원인을 자신에서부터 찾기 시작하고 소인은 타인에게서 찾는다.' 공자의 말이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고 한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까닭이다. 양심은 실낱같이 약하고 부드럽다고 한다. 칼릴 지브란은 말하기를, "진실로 아픔을 주는 것은 양심이다. 우리들이 양심의 소리를 거역하면 양심은 괴로워하고, 우리들이 그것을 배반하면 양심은 죽어버린다." 섬뜩하다. 양심이 죽은 까닭에, 꺼릴 것이 없는 까닭에 뭐든 못할 게 없다.


사람을 수단 가치, 즉 마치 일회용품처럼 자기 목적이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이용의 대상, 들러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은 물론이고 그 대상마저 가리지 않는다. 토사구팽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과하탁교(過河坼橋) 즉 강을 건너고 자기를 건네준 다리를 허물어 목재를 챙겨가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가 원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는 것은 이해되고 용납되어야 할 마땅한 일이지만, 남이 자기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이해도 용서도 안 되는 사람들도 있다. 무조건적인 존중과 배려는 타인으로부터 자기가 받아야 할 몫이고,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일에는 언제나 조건과 전제가 붙는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다. 죄는 보이는 사람에게 짓고, 사과와 참회는 보이지 않는 신에게 눈물로 한다. 참 편리하고 합리적이다. 한번 몸에 밴 습성은 여간해서 고치기 힘들다. 마치 자동제어장치처럼 상황과 조건이 갖춰지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손가락으로 사람을 삿대질할 때 나머지 세 손가락은 언제나 자신을 향하기 마련이다. 노벨 평화상이 찬란한 민주화의 투사 아웅산 수치나 몽테뉴에 버금간다고 평가된 자칭 타칭 우주 문학계의 아름다운 수필가 503은 비단 남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진짜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과시하지 않기에 찾기가 힘들다. 대신에 눈에 가득 들어오는 것은 온통 아름다운 껍데기들이다. 


상촌 선생이 던지는 이야기들이 어찌 남을 향한 비유로만 그치겠는가? 꾸며진 껍데기를 겉으로 드러내고 자신의 속 사람을 가리는 것은 무엇인가? 내 안의 적나라한 실체를 인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거북하고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렵고 힘들 때 주변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가장 효과적인 개선, 즉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태도를 바꾸려 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러한 결심을 한다는 그 자체가 아주 어렵다'라고 통찰하였다. 자기 개혁에는 엄청난 용기와 흔들리지 않는 굳은 결심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나름의 희생이 수반되지 않은 자기 개혁이나 개선은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사람답게 살고 싶다면, 한번쯤은 스스로를 살펴볼 일이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다만 더듬어 볼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자신을 안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나를 모르고서 남을 안다는 것, 심지어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넓은 세상과 넓고도 깊은 바다를 알 수가 없다. 어린 아이는 어른의 삶을 알 수 없고, 젊은 이는 늙은 이의 삶을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만의 언어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을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물며 모르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을 제대로 다룰 수는 더욱 없는 일이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진실을 말할 수 있으려면 많은 것을 오랫동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실을 말하려면 진실이 무엇이고 거짓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있어서 말이다. 그런데 아무도 이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게오르기 구르지예프(1877~1949)의 말이다.


"어찌 '내 안에' 겨ㆍ손가락ㆍ개ㆍ쥐와 불을 쬐는 것들의 걱정거리가 없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의 도리는 가리는 것을 없애는 게 중요하다." 상촌 선생 글의 결부다. 원문의 '후세(後世)에'를 '내 안에'로, '임금'의 도리를 '사람'의 도리로 바꾸어 보았다. 내 눈과 귀를 가리는 그것들이 과연 무엇인가? 손가락이 나를 향할 때, 그나마 실낱같이 위태로이 살아있는, 양심이 쓸쓸하게 아파오는 밤이다.(2018.2.10)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을 지키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