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 발문에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공자(孔子)께서,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셨다. 소나무 · 잣나무는 사철을 통해 늘 잎이 지지 않는 존재이다. 엄동이 되기 이전에도 똑같은 소나무 · 잣나무요, 엄동이 된 이후에도 변함없는 소나무 · 잣나무이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유달리 엄동이 된 이후에 그것을 칭찬하셨다..... 성인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엄동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의 굳은 절조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엄동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이다."
세한도 발문을 번역한 김동석의 주석에 의하면, 『세한도』는, 불우한 처지에서 귀양살이하는 작자 자신을 조금도 괄시하지 않고 옛날처럼 변함없이 대해주는 제자 이상적(李尙迪)의 태도에 감동한 나머지, 그의 인품을 엄동(嚴冬)이 된 뒤에도 잎이 지지 않는 송백(松柏)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림으로 그려준 것이다... 발문의 끝에 보이는 적공(翟公)의 고사는 이러하다. “한(漢) 나라 때 적공이 정위(廷尉)가 되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가 실각하자 이내 그의 대문에는 참새 그물을 칠 정도로 인적이 끊기고 말았다. 그 뒤 그가 다시 정위가 되자 또 당초처럼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에 그는 대문에다 ‘죽고 사는 갈림길에 서봐야 교정(交情)을 알게 되고, 사업에서 망하고 흥해봐야 교태를 알게 되며, 벼슬길에서 귀천을 겪어봐야 교정이 나타난다 [一生一死, 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熊, 一貴一賤, 交情乃見.]’라고 써 붙여 세상 사람들의 염량세태를 신랄하게 책망하였다.”(『史記· 汲鄭列傳』).
염량세태(炎凉世態)란 말의 의미는, 뜨겁고 차가운 세태. 즉 권세가 있을 때에는 아첨하여 쫓고 권세가 떨어지면 푸대접하는,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세속의 인심을 일컫는 말이다. 어느 정도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실감할 것이다. 현실의 삶은 이처럼 냉정하다. 자신은 아니라고 한사코 부정하지만, 사람을 대상으로서가 아닌 수단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흔하게 본다. 마음이 맞는 지인과 이런 말을 나눈 기억이 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꼭 내 마음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적으로 각박한 세상의 인심을 생각해 보노라면, 그 각박한 세상을 만들고 이루는 '우리' 속에서 '나'라는 주체는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주체를, 세상에서 타인에게서, 나로 바꾸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려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한 때는, 제주도 귀양살이가 5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주류사회와 격리된, 인생의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시기다. 나이도 거의 환갑을 앞두었다. 그리고 적공의 고사도 비슷하다. 그 깨달음도 김정희의 심사와 똑같다. 인생의 말년에야 비로소 참된 인간관계의 교류, 참된 사귐의 정과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았다. 다만, 추사 선생은 사후 약방문식으로 그 깨달음을 대문 간에 보란 듯이 글로 써 붙이는 적공의 마음을 박절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제자 이상적에게 당신의 마음을 담은 그림을 선물한 것으로 미루어 추사 선생은 적공과 달리, 그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태도를 바꾸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추사 선생의 인간미가 여기서 드러난다.그렇다면 추사나 적공이나 평소의 태도는 어찌했을까? 즉, 그들의 인생에 생사고락이나 부귀 빈천 같은 굴곡짐이 없는, 상황이 평탄했었더라면 말이다.
한비자에는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가 몇 나온다. 그중에서 한비자, 세난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미자하는 위나라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다. 위나라 법에 임금의 수레를 몰래 탄 자는 월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미자하의 어머니가 병이 났다는 사실을 미자하에게 알려 주었다. 미자하는 임금의 명이라 속이고 임금의 수레를 타고 나갔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어질다고 여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효자로구나. 어머니를 위하느라 월형의 죄를 범하는 것도 잊었구나.” 어느 날은 미자하가 임금과 더불어 과수원을 노닐면서 복숭아를 따먹다가 맛이 달다고 다 먹지 않고 남은 반을 임금에게 드렸다. 임금은 기뻐하며 말했다. “나를 사랑하여 맛있는 것도 제가 다 먹지 않고 나에게 먹게 하는구나.” 그러다가 미자하의 고운 얼굴빛이 시들고 총애가 식어져서 임금에게 벌을 받게 되었다. 임금은 말했다. “미자하는 본래부터 그랬다. 일찍이 나의 수레를 내 명령이라고 속여 탄 일도 있고, 자기가 먹다 남긴 복숭아를 내게 먹인 일도 있었다.”
미자하가 한 행동은 처음과 달리 변한 것이 없다. 그런데 전에는 착하다고 했던 일이 뒤에는 죄를 받게 된 것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주에게 총애를 받고 있는 동안에는 지혜 있는 말이 받아들여져 친애함을 더하게 되지만, 군주에게 미움을 받게 되면 지혜 있는 말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죄를 받으며 소원함을 더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 제시한 여도지죄의 이야기에서 주체, 즉 왕의 입장을 가만히 살펴보면, 단순히 왕이 냉정한 사람이었거나 변덕이 심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추측케 한다. 아마도 첫 마음은 남달랐을 거다. 무언가 왕의 첫 마음을 변하게 만들만한 여러 요인들이 그 근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뭇잎에 맺혀 방울방울 떨어지는 낙숫물일지라도 바위를 뚫는다. 가랑비에도 옷은 젖기 마련이다. 그 마음이 변하게 된 것이 하루 이틀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물며 그 시작이 다른 무엇이었다면 상상할 필요조차 없다. 과연 무엇이 첫 마음을 변하게 만들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이는 단순한 인생 처세의 교훈을 넘어서서 내게로 성큼 다가온다. 비단 남의 일이 아니라. 세상의 일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일일 수도 있다는 말이 되겠다. 그것은 바로 현실의 문제와 직결된다. 미루어 추사나 적공이 인생 말년에야 비로소 첫 마음을 지키는 참된 정에 대한 깨달음을 가진 것이 얼마나 큰 성찰이었는지를 또한 짐작된다. 이중에 추사 선생의 태도 변화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세한도는 그 결과물이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로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한도가 주는 의미는 참으로 귀하고 값진 것이다. 내가 타인의 마음이나 생각을 바꾸지 못할 바에는, 나를 바꾸는 것이 합리적이다. 마음이 따뜻하고 좋은 사람을 원한다면,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이 가장 첩경이다. 그러나 이게 마음과는 달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의 깨달음은 곧 내 삶의 처절한 경험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인생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은 마음이라고 한다. 동산 위의 소나무는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서있다. 그런데 그 소나무를 보고 느끼는 것은 계절 따라 다르다. 달리 보이게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다. 이익의 경중에 따라 호불호에 따라 심리적 상태에 따라 때에 따라 다르다. 혹은 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내 속의 갈등하는 아주 다른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아주 다른 모습으로 보고 느끼게 결정짓는 것도 내 마음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역으로 ‘상대도 변한 것이 없고 상황도 전혀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똑같은 행위일지라도 내 심리 변화에 따라 반응이나 평가가 전혀 달라진다.
세한도 발문이나 적공의 고사가 세상을 향하는 눈을 통해, 참된 교정교태(交情交態, 사귐의 정과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한다면, 여도지죄의 고사는 그 눈을 나의 내면으로 향하게 만들어 자성케 한다. 누구나 세상 혹은 타인과의 소통을 간절히 원한다. 하지만 막상 진정한 소통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통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거기로부터 진정한 공감과 이해가 우러나온다.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와 존중이 없는 한,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공감이 전제되지 않은 한, 타인과 세상에 대한 진정한 신뢰도 소통도 공감도 단지 희망사항에 불과할 뿐이다. 수시로 까닭 없이 변하는 마음을 온전한 원래의 상태로 제어할 방법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신뢰와 존중이 근본적으로 결여된, 보기 좋은 허울뿐인 소통의 밑바탕에는 항상 이해(利害) 관계가 도사리고 있다. 오해도 착각도 전부 여기로부터 생긴다.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던 어제의 사람이 오늘은 적이 되고 심지어 원수지간이 되기도 한다. 하물며 사회적 관계에서의 소통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염량세태의 세속 인심을 탓하고 분노하는 마음 또한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하니 정작 분노하고 슬퍼해야 할 것은 내 마음이다. 소나무는 아무리 추워도 그 색을 변치 않고, 매화는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타인을 의식하거나 타인의 목소리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르고 참된 마음을 지키는 일,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것 같다. 이렇듯 말은 쉽지만, 어려운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물며 타인은 물론이고, 세상과의 소통은 두말할 것도 없겠다. 잠시 자신을 기만 하거나 양심을 팔거나 영혼을 파는 것보다, 마음을 지키는 일은 더 어렵다. 인생이란 무대에서 주역은 관객이 아니다. 바로 자신이 주인공이다. 나를 바꾸어야 겠다는 생각, 그 무게가 무겁기만 하다. "괴물들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의 과정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그리고 당신이 심연을 깊이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도 당신을 깊이 들여다 볼 것이다(「선악을 넘어서」)." 니체의 말이다.(2014.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