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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Jan 16. 2018

어떤 환상

마음이 헛헛한 날이면 시를 읽는다. 요즘 시집은 최소 만원 한 장 이상을 지출해야 한다. 옛날이면 족히 세 권을 사고도 남을 돈이다. 시인분들한테 죄송한 일이지만, 사서 읽기가 부담이 된다. 한 권의 시집에는 마치 암호문 같은 수십 편의 시들이 담겨 있다. 그중에 마음에 와 닿는 시들은 한 두 편 될까 말까 하기에 더욱 그렇다. 다행히 인터넷 덕분에 좋은 시에 대한 갈증은 해소된다. 최근 시들은 서점을 주로 이용한다. 오다가다 서점에 들러서 주욱 훑어보는 소위 도둑 독서를 한다. 서점 주인분들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오랜 시간 도둑 독서를 하다 보니, 제법 속독이 늘었다. 속독이라기보다는 그냥 훑어 보는 편이다. 


며칠 전, 우연한 기회로 시집 한 권을 얻었다. 주로 사랑과 그리움에 관한 시가 담겨 있었다. 시집을 읽다가, 문득 몇 해 전 이름 깨나 날리는 정 xx시인의 인터뷰 기사를 메모해 놓은 것이 생각이 났다. 끄집어내어보니, 거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문: 지금까지 평론가나 독자가 알지 못한 비밀이 있는가?  답: 난 ‘거짓말’을 많이 한다. 속고 안 속고는 내 문제가 아니고...(조선일보)』


언어는 그 사람의 사고방식을 알려주는 지표다. 말과 글은 생각이 언어로 문자로 표현된  것이다. 언어는 사고능력은 물론 태도까지도 지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인간의 모든 욕구와 감정, 심지어 인간 됨됨이까지도 그 사람이 즐겨 사용하고 표현하는 언어 속에 전부 다 녹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삶 속에서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언어를 표현하는 그 사람의 진정성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다시 말해 앞과 뒤의 말, 과거와 현재의 말이 각기 다르다면, 표현된 그것은 가짜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누구나 일시적인 감정이나 정서에 젖어 들 수 있다. 그러나 일시적인 것으로 자신을 대표할 수는 없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표현된 글이 지향하는 가치와 실제의 삶이 괴리될 경우, 그 재능은 가장 기본적인 욕망을 채우고 삶을 영위하는 하나의 수단이요 기술에 불과하다. 사람의 좋고 훌륭함을 가늠하는 인격과, 재능 혹은 숙련된 기능은 별개의 차원이다. 예전에 쓴 글 ‘첨밀밀’에서 개인적인 생각을 밝힌 바 있지만, 나는 어떤 형태로든지, 일반 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재능을 표현하는 것을 직업이나 취미로 삼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그들이 표현한 그것에만 관심을 둔다. 표현된 것은 곧잘 사람을 착각에 빠트리거나 속이기도 한다.  이러한 착각과 오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중심적 사고에 익숙한데서 기인한다. 


모든 글은 어떤 형태로든 독자에게 영향을 끼친다. 다만 그 글들이 독자들의 삶에 직접 개입될 때 상황은 달라진다. 역기능이든 순기능 이든 간에 그로 인해 파생되는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있다. 원인 제공자인 글의 생산자가 사회윤리와 도덕적 제도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만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그렇다. 그 결과가 부정적 혹은 파괴적인 것이든 간에, 단지 문학과 예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대부분 면죄부를 가진다. 예술과 문학이라는 이름을 걸면, 모든 추잡한 것들과 비겁한 것들이 양해되기때문이다. 이것은 교양의 이름으로 지성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글쟁이들의 특권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사회 통념 혹은 도덕적으로 쉽게 용납될 수 없는 추잡한 애정사도 문학과 예술이라는 장르의 옷으로 갈아입으면 고상하고 아름다운 로맨스로 변모되기도 한다. 자신과 관련된 어두운 문제를 세상에 뒤집어 씌우거나, 고상하게 합리화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글은 자기를 꾸미는 최적의 도구요, 수단이다. 글을 비틀고 축약하고 그 속에 은밀한 여백을 남기는 것은 작가들의 재능이다. 숙달된 기술이다. 개인적으로, 자기합리화에 가장 능숙하고 이중적인 사람들이 글쟁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엔 나도, 그대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문제는 허구가 직접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실제의 삶과 엮어졌을 때 발생한다.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뭐." 이런 말을 믿었던 사람에게서 듣는다면, 억장이 무너지고 말문이 막히게 마련이다. 착각과 오해는 원인제공자의 문제가 아니다. 내 문제에서부터 시작된다. 


필립 로스는 그의 장편소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문학동네, 2013」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좋은 사람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욕망보다 예술에 더 사악한 효과를 미치는 것도 없다."  


심리적 방어기제의 하나인 투사(Projection)는, '자기 마음속에 좋지 않은 생각과 성격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괴롭기 때문에, 그 원인과 책임이 나 아닌 외부에 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반응하는 무의식적인 행위'를 말한다. 다시 말해 외부의 대상에게 마치 자기를 질책하고 비난하듯이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을 말한다. 투사는 직접적인 말보다는 온갖 수식의 변형이 가능한 글로 하는 편이 훨씬 더 위험부담이 적다.


“난 ‘거짓말’을 많이 한다. 속고 안 속고는 내 문제가 아니고...” 정 XX시인의 말은 솔직하다. 뻔뻔스러울 정도다. 그런데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대신에 약간의 당혹감과 함께 부끄러움이 내 마음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 자리는 내 편견이다. 가끔 마광수 선생의 글을 대할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손가락을 내게로 돌리자,  내가 아닌 다른 인생, 나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또 다른 시각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가끔 영화 '첨밀밀'이나 '4월 이야기' 같은 사랑이야기들은 묻혀있던 옛 추억을 내게 다시 상기시켜준다. 비록 일시적이나마 사랑의 환상에 잠시 빠지게도 만든다. 시집에 담긴 서너 편의 시들이 그러했다. 정갈하고 담백한 시어들 때문이다. 글을 통해 느껴지는 일시적인 감상은, 어쩌면  신기루요, 착각일지도 모른다. 감성적 정서는 때때로 이성마저도 매우 교묘하게 자신을 속인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안다.


‘젊은 사람이란, 젊은 시절에 저지른 실수를 거듭해서 저지를 수 있는 용기와 각오가 있는 사람이다(오스카 와일드)’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용기와 각오를  떠나서,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사랑을 직접 눈과 눈, 가슴과 가슴을 대하여 확인하기 전까지는, 욕망과 호르몬으로 덧씌운 사랑의 허구가 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나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어떤 환상’과 기대를, 읽고 있는 몇 편의 시와 연결짓는 자신이 괜히 우스워진다. 내가 아직은 살아있는 남자요, 여전히 욕망의 충족을 꿈꾸며, 일탈을 상상하는 속물이라는 애달픈 사실을 재확인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그 어떤 환상이 신기루일지라도, 가슴 한편에 슬그머니 남겨 놓는다. 어쩌면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나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내 마음속에 갑자기 불쑥 나타난 ‘블랙스완’과 같다 하겠다. 현실에 엄연히 존재함에도 단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존재가 부정된 ‘검은 백조’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안의 어떤 욕망과 연관된 미련이나 기대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살아 있는 인간이면 마땅히 가지는 본능적 욕구에 가깝다. '생명이 있는 한, 사람은 무엇인가 바랄 수 있다' 라고 한 세네카(Lucius AnnaeusSeneca)의 말은 묘한 위로가 된다. 


나는 사시사철 제 자리를 지키는 나무를 생각한다. 머리보다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을 늘 기대한다. 바람같은 자유로운 영혼도 곧잘 꿈꾼다. 하지만, 희망사항이다. 나는 척척박사다. 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알아도 모르는 척, 보고도 안 본 척, 들어도 못들은 척, 아닌 척, 안그런 척...척하는 것이 전문인 박사다. 나이가 한 살씩 더 먹을수록, 마음은 더 좁아드는 듯하다. 자주 말랑거리고, 심지어 물먹은 화장지처럼 풀어지기도 한다. 털어낸다고 하면서도, 털어내어야만 할 것들이 갈수록 늘어만 가는 듯하다.  다시 한번 내가 시를 읽는 이유를 생각하며, 박완서 선생의 글을 표절해 본다. "나는 시를 읽는다. 내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 "(201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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