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새끼는 욕이다. 그것도 흔하게 사용하거나, 또 어디에서건 흔하게 듣는 익숙한 욕이다. 10·20대 개새끼론, 50·60대 개새끼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지하철 애들의 대화에서도, 시장통에서도, 거리에서도, 심지어는 이웃집에서도, 기타 등등. 남녀노소 불문하고 서로 좋아 죽다가도, 심사가 조금만 삐끗 틀어져도, 어긋난 등만 돌리면 어김없이 나오는 말이 '개새끼'다. '개새끼'는 의식하든 못하든 그만큼 흔한 일상의 말이요, 욕이다.
하지만 나에겐 50·60대 개새끼론만큼은 거북하게 다가온다. 나이를 떠나서 타인을 향하여 함부로 비아냥거리고 꼰대 운운하며, 지적질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김없이 자신이 무슨 대단한 사람인 양 거들먹거리는 그 오만한 태도가 그저 볼썽사납다. 그 모양새가 마치 자아가 팽창된 중2병을 보는 듯하고, 까만 깃털 위에 형형색색의 물감으로 아름답게 색칠하고 거들먹거리는 까마귀를 보는 듯하여 그냥 헛웃음으로 가소롭게 흘려버릴 뿐이다. 사람과 달리, 개 스스로는 분명 자신의 존재가 개임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혹은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사람과 어울려 살다 보니 '지가 사람인 줄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새끼'의 사전적 의미는,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동물"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개새끼는 '강아지'의 동의어다. 개는 짐승이다. 개새끼는 '개가 낳은 어린 것'이다. 개새끼라는 단어 자체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강아지를 개새끼라 부르나, 개새끼를 강아지라 부르나 하등의 잘못된 것이 없다는 말이 되겠다. 정작 문제는 사람을 보고 말할 때다. 그것도 어떤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실 나는 개를 키우지만 않을 뿐, 주인에게 언제나 다정하고 충직한 개를 아주 좋아한다.
인터넷 사전에 '개새끼'는, "하는 짓이 얄밉거나 더럽고 됨됨이가 좋지 아니한 사람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다음 사전)"로 정의되어 있다. 네이버 사전에는, '어떤 사람을 좋지 않게 여겨 욕하여 이르는 말. 주로 남자에게 이른다.'라고 나와 있다. 즉 개새끼는 욕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남에게 욕먹을 짓을 좀처럼 하지 않은 듯하니 상관은 없다마는, 가끔 인터넷에서 '개새끼론'을 들먹일 때마다 다소 거북해지는 것은, 내가 그 특정 세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의미나 논리적으로도 아무런 하자가 없는 듯한데, '개새끼'가 왜 비속어가 되고 욕으로 변했는지 궁금했다. 평소 인터넷 검색은 구글을 이용한다. 구글에 '개새끼'에 관한 정확한 의미와 유래를 찾아보려고 검색해 봤다. 그런데 검색 결과를 보려면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전화번호까지 요구한다. 성인인증을 해야 한다고 버티는 황당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아니 개새끼에 관한 자료를 찾는데 왜? 기가 찼다. 개새끼가 비속어라서 그런가? 그래서 다음과 네이버에 검색하니 다행히 필터링이 되지 않고 바로 나온다. 여담이지만, 개인 정보가 매우 사회적인 이슈가 된 이때, 다국적 기업인 구글이 빅브라더 흉내를 내며, 점점 괴물이 되어 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구글과 우리 사회, 누가 빅브라더 흉내를 먼저 시작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자료를 좀 더 뒤져보니, 유일하게 1936년 8월 4일 자 조선일보 가십 기사에 한편의 개그 같은 유래를 찾을 수 있었다. 개새끼가 비속어로 자리 잡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 과정에 있다. 그 과정에서 강아지를 표준어로 정하면서 한편의 개그가 연출된다.
"작년 일월 초 조선어 표준어 사정 제일독회가 온양에서 열렸던 때의 일이다. 표준어를 사정하는 방법은 우선 유사어를 추려가지고 그것이 전연 동의어인 때에는 그중에서 표준 될 말 하나를 내세워서 표준어를 삼고 만일 동의어가 아니고 다소라도 어의 혹은 어감의 상이가 있는 때에는 각립을 시켜서 따로따로 표준어를 삼기로 하는데 해석과 의견이 구구한 경우에는 거수하야 종다수 가결을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사정하여 나가다가 “강아지”와 “개새끼”라는 동의어가 나왔는데 어느 것을 표준어로 정할 것이냐에 의견이 구구하야 거수로 결정하게 되었다. 의장 A 씨가 일어서서 큰소리로 “자 여러분 거수하겠습니다. 먼저 강아지부터 손을 드십시오” 하였다. 몇 사람이 손을 들었다. 의장은 다시 “다음에는 개새끼 손을 드시오” 하였다. 남은 몇 사람이 손을 들었다. 그런데 의장의 생각에 좌중의 이 모가 어느 편에 손을 들었는지 분명치 아니하므로 물어보았다. “이선생은 강아지지요?” 이 말에 이씨는 대답하야 “아니오, 나는 개새끼요” 하였다. 아까 거수하자 할 때의 의장의 말부터 여간 우수운 것이 아니엇지마는 어휘의 사정에만 열중한 남녀 위원 제씨는 그 말의 우수움을 깨닫지 못하고 범상히 넘기고 말앗던바 이씨가 “나는 개새끼요” 하자 그제야 비로소 깨닫고 모두들 그야말로 포복절도하야 장내는 일시 소해(笑海)를 이루엇드라 한다.』(동아일보 1936년 8월 4일 가십 기사)
개새끼의 표준어 선정 과정 에피소드에서 "나는 개새끼요"라는 대목에서 정말 오랜만에 웃었다. 오래된 옛 기억이 불현듯 소환되었기 때문이다. 해군 복무 시절 어느 한 겨울의 기억이다. 육상 사격훈련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평소 함교 당직을 이유로 항상 열외였던 나는, 대원들의 휴가로 인해 참가 인원수 부족을 채우느라 차출되었다. 사격장 교관들은 아주 깐깐하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사람의 생명이 오가는 위험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사격 준비과정에서, 사이보그 같은 빨간 모자의 조교가 M16 노리쇠 장전 시범을 보였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시범과 똑같이 행하고, 완료한 사람은 총을 치켜들고 '노리쇠 일발 장전' 복창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유독 내 총만 노리쇠가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날씨가 추워, 손가락마저 얼어붙었다. 몇 초가 마치 몇 시간처럼 흐르며 언 손으로 쩔쩔매는데, 보다 못한 교관이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친다. "어이 저기 아직도 사람 말을 못 알아먹습니까? 개새끼입니까? " 그때 바로 옆에 함께 끌려왔던 제대 말년 병장이 킥킥 킥 웃어버렸다. 그 순간 노리쇠가 철커덕 작동을 했다. 곧이어 빨간 모자의 불똥이 떨어졌다. 그 불똥은 의외로 내가 아닌 말년 병장에게로 건너갔다. 불쌍한 말년은 사격장 군기를 흩트리고 교관을 무시한다는 죄목으로, 그날 총 한발 못 쏴 보고 눈물 콧물이 다 빠지도록 빨간 모자들에게 돌아가며 얼차려를 받았다.
훈련을 마치고 복귀하는 길에 괜히 나 때문에 당한 게 불쌍하고 미안해서 말년에게 물어봤다. 말년은 김해 출신이었다. " 아~괜히 미안하네, 좀 단디 하지?" 오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걷던 녀석이 내 물음에, 그제야 피식 웃으며 답한다. "아니.. '개새끼'를 보고 '개새끼'라 하길래, 그랬다 아입니까?" 그제야 이해가 된 나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말년도 그 재수 없고 불행했던 하루를 다 잊어버리고 한참을 같이 웃었다.
좀 창피한 고백이지만, 본의 아니게 당시 군 복무 시절 내 별명이 '개새끼'였다. 거기엔 사연이 있다. 술 때문이다. 나는 원래 술이 약하다. 사건은 유류 보급차 잠시 기항한 동해안의 어느 작은 항구에서 발생했다. 짧은 외출 중 서둘러 마신 술에 필름이 끊긴 상태로 함상 복귀하면서,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간부 하나와 맞부딪쳤고, 나도 모를 시비 끝에 난동을 부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상황을 전혀 기억을 할 수 없다. 난생처음 블랙아웃을 경험했다. 나는 평소 꽤 노숙한 척, 점잖은 척하는 편이다. 내가 생각해도 참 미스터리한 일이다. 결국 쇠사슬로 결박당했다. 피해자가 6명 이상 되었던 제법 큰 사건이었다. 그나마 크게 다친 이는 없고, 다음 날 정말 다행스럽게 상급자들인 피해자(?)들이 한결같이 "남자가 술 먹고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하며 내 사과를 흔쾌히 다 받아줬다. 다만 당직 근무 중이던 갑판 주임상사에게 불려가 기절할 정도로 강력한 귀싸대기를 맞았고, 야구방망이로 엉덩이에 피가 터질 정도로 십여 대를 얻어맞았다. 평소 개인적인 함내 평판도 작용했겠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함대 영창은 면했다.
그 사건은 곧바로 함내 전체 병사들에게 회자되었다. 이후 내게 미친 '개새끼'란 별명이 붙여졌다. 창피한 이야기다. 이후 제대 휴가에서 필름이 또 끊겼다. 술집에서 우연히 합석한 사복의 해군 보안대 때문에 사고를 친 것이다. 그가 거들먹거리는 것을 아주 못마땅해 한 것만 기억한다. 이때는 럭비 선수 버금가는 덩치의 두 친구가 방패막이로 나서지 않았다면, 술집을 관리하는 어깨들에게 아마도 나는 맞아 죽었을게다. 두 친구가 나 대신 싹싹 빌은 덕분에 살았다. 사복은 복도의 2층 창문으로 나비처럼 날아서 부리나케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블랙아웃 현상은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이 일 이후로 술을 철저하게 자제했다. 더 이상 '개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개새끼를 개새끼라고 부르면, 뜬금없이 옆에서 듣는 사람이 불쾌하게 여기며 욕으로 알아듣는 세상이다. 사전적 정의도 그렇다. 연유야 어찌 되었건, 나도 과거엔 개새끼라 불렸다. 물론 당시에도 지금도 그렇지만, 직접적으로 대놓고 나를 '개새끼'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비록 남모르게 개보다 못한 짓을 아주 가끔 할지라도 말이다.
각설하고, 처음의 개새끼론에 대한 생각으로 다시 돌아가자. 콩 심은 데서 콩 나고 팥 심은 데서 팥 나기 마련이다. 이른바 개새끼론은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공히 '개'라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비로소 논리적인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감정에 복받쳐서 하는 욕이 아닌 하나의 사회적 담론으로 인간을 개 취급하고, 또 그것이 타당한 여론으로 수용될 수 있는 사회는 정말 불행한 사회다. MB 정권 이후 진보든 보수든 상업 언론이 제기하는 사회 정치적 여론 혹은 담론은 온전하게 믿을게 못된다. 반드시 사실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구체적으로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개새끼론은 누워서 침 뱉으면 제 얼굴에 떨어진다는 간단한 이치를 상기시켜주는 일례다.
잘못된 선택과 그릇된 행위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 똑같은 판단, 똑같은 감정을 지닌 사회, 혹은 그렇게 강요하는 획일적인 사회는 전제주의의 독재 체제밖에 없다. 비록 감정적으로 흥분하여 욱하는 성질에 욕은 할 수 있을지라도,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정서가 다르며 이념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고 사람을 무턱대고 개 취급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물며 자기 부모뻘 되는 사람을, 자기 자식뻘 되는 사람을, 법적이건 도덕적이건 간에 명확한 사실 근거도 없이 그저 일반화하여 개 취급하는 것은 정녕 이성을 가진 사람의 도리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시기 눈엔 거시기만 보인다고 했던가. 최근 크게 소리 내어 " 야~! 이 개새끼야~!"라고 욕하고 싶은 비열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부쩍 밟힌다. 내 입에서 절로 욕을 부르는 사람들이다. 솔직하게 말해, 저 인간 같지 않은 이들의 면전에 대고 마음껏 소리 내어 욕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나도 오래전 한때 내 별명이 '개새끼'였다는 기억을 아주 잊고 살았다. 문득 쓸데없는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개새끼가 애당초 표준어로 선정되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강아지'처럼 '개새끼'가, 아끼고 사랑하는 이를 가리키는, 만인의 애칭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내 입으로 함부로 내뱉지는 못할지라도, 지금의 감정에서 '개새끼' 대신에 내가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할 수 있는 욕은 과연 무엇일까? 아울러 행여 지금이라도 누가 내게 '강아지'와 '개새끼' 둘 중에 표준어로 적합한 것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전자의 경우엔 일단 패스하고, 후자의 경우엔 당연히 "나는 개새끼요"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것이다. (2014.3.16 쓰고, 2020.4.2 다시 끄집어 내어 문맥을 가다듬고 고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