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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Jan 03. 2018

바담 풍(風)

'바담 풍(風)' 이야기는 웬만하면 한 번쯤은 들어 봤을법한 교훈적인 옛이야기다.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본다. 


"글을 가르치는 서당 선생이 혀가 짧다. 그래서 '바람 풍(風)' 한자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데, '바담풍'하였다. 이에 학생들이 따라서 '바담풍' 한다. 선생이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선생은 아이들 보고 안타까이 말한다. "나는 '바담 풍'해도 너희는 '바~다~암~풍'하거라, 알았지? 다시 집중해서 따라 해 보거라' 이에 학생들이 합창을 했다. '바담풍~!'." 


'나는 비록 잘못할지라도 받아들이는 너희는 나의 본 뜻을 헤아려 바르게 터득하라'는 의미다. 그런데 훈장 선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해가 달라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원래의 뜻은 이것인데, 아무리 강하게 주장해도 다르게 받아들인다. 답답하고 속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을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는 말도 있다. 막상 당하고 보면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물며 학생 중에 '바람 풍'이라는 글자를 이미 알고 있는 학생이 있었다면, 그 학생의 심정이 오죽할까. 헤아려 보면 마음이 까마득해진다. 아무튼 의도가 좋고 올바른 것임에도 내 본래의 허물로 인하여  전달된 것이 오히려, 내 분통을 터트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는 한편의 블랙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사자성어로 자승자박(自繩自縛)이란 말이 있다. "'자기의 줄로 자기 몸을 옭아 묶는다'는 뜻으로, 자기가 한 말과 행동에 자기 자신이 옭혀 곤란하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네이버 사전)이다.


나는 우둔한 사람에 속한다. 그럼에도 다행히 지식에 관한 욕구가 아직도 크다. 해서 내가 모르는 지식이나 혹은 의문이 드는 사실에 관해서 온전히 이해될 때까지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 섣불리 안다고 생각하는 경솔함과 어리석음을 스스로 잘 아는 까닭이다.  그래서 내가 가진 자료의 양도 그 욕심의 크기를 따라간다. 가을 다람쥐처럼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주워 모아 쌓아 놓은 것이 제법 된다. 내가 나름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무형의 자산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필요하다면 아낌없이 퍼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오늘 내가 가진 자료의 일부를 호의 삼아 건네주고선, 뜻밖의 벽에 부딪혔다. 꽤 긴 시간 동안, 압축파일 여는 방법, 문서를 편하게 읽게 해주는 문서 보기 프로그램 설치하는 방법 등등을 일러 주다가, 뭔가 이상했다. 때문에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사에 잠시 젖었다. 실상을 알고 보니, 상대가 원치 않았다. 그 와중에 문득 내가 '바담 풍' 선생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호의를 베풀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이 그렇지 않다면, 문제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것이 신뢰와 연관되어 있다면 더욱 그렇다. 신뢰의 맞은편 자리는 불신이다. 불신 상태에서는 자기중심적인 이해(利害)의 저울추만 움직일 뿐이다. 진심(眞心) 또는 진정(眞情)이 존재할 자리는 없다. 이게 내 개인적인 오랜 체험이다. 어찌 인생에 내가 생각한 대로 기대한 대로 선하고 좋은 일, 멋지고 아름다운 일만 있겠는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고 환상은 빨리 깨는 편이 낫다. 진정한 관계는 신뢰를 바탕으로 성숙된다. 신뢰는 존중과 배려라는 밭에서 싹튼다. 특히 자기중심적 사고에서는, '바담풍'처럼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다. 


지금이야 저작권 때문에 조심하는 일이지만, '지식과 정보는 공유되어야 하며, 지식에 목마른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추억의 옛 하이텔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일관된 생각이다. 하지만 시대가 많이 변했다. 지식도 감성도 정서도 심지어 감동도 사람의 몸과 마음도 돈으로 사고파는 세상이다. 모든 자료와 정보가 돈의 가치로 환산되고, 개인의 재산 권리로 자리매김한 지금은 달라졌다. 여하튼 지금 세태의 상품성 가치관에서 지식의 공유, 특히 자료의 공유는 적절한 과정을 거쳐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은 한, 자칫하면 범죄행위가 되어 버린다. 


어찌 되었건 나는 바담풍 선생의 모양새가 돼버렸다. 비록 남의 것을 훔치지 않았고, 더구나 나름의 대가를 치렀다 할지라도 말이다. '아무리 선한 동기로 시작하여 좋은 결과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 과정이 옳지 않고 악한 것이라면, 그 결과는 악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말은 개인적으로 늘 하는 말이다. 


어찌 보면 내 머릿속에 축적된 먹물의 99%는 남의 것이다. 심지어 내가 쓴 글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이미 한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짜깁기도 표절도 무심코 한다. 타인의 지식, 타인의 생각에 1%의 내 의견을 양념 치듯 살짝 뿌려서, 마치 내 것처럼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식 도둑이요, 생각 도둑이다. 관점에 따라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떤 가치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저작권이라는 현실 법 조항에 놓고 따지고 보면, 이는 명백한 범죄행위에 해당된다. 이것은 미처 생각지 못한 나의 허물이 아닐 수 없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있다. 범죄행위는 안 하면 된다. 눈으로 판단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허물이 드러나는 것은 피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자신의 눈에 잘 안보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통해 생각하지 못한 나의 허물을 본다는 것은 진정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바담 풍' 선 생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범죄자보다는 낫다. 알량한 자존심에 부끄러움보다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앞선다.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면, 마치 없었던 일처럼 깨끗이 다 지워버리고 싶다. 


배움이란 멀리 있지 않다. 하찮은 미물이나 들에 밟히는 풀에서도, 심지어 어린아이한테서도 배울 점은 있다. 그대에게서 배운다. 그대가 이중적인 사람만 아니면 족하다. 나는 정녕 선하거나 착한 인간이 아니다.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에 가깝다. 때론 본능적이며 속물적이기까지 하다. 다만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인간에 속한다. 내 비록 스스로 바담풍 선생에 졸보를 벗어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기중심적인 이해관계 (利害關係)에 따라 아침 말 다르고 저녁 마음 다른, 소인(小人)은 면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흔히 관계를 정리할 때, 나름의 이유를 찾기 마련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정리하고 이유를 찾는다기 보다는, 이유를 만들어 놓고 정리한다. 그것을 명분 삼아 자신을 다독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것을 버린다 하고, 혹자는 턴다고도 떠난다고도 표현한다. 그러나 가진 게 없으면 버릴 게 없다. 무엇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그것을 버리라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더욱이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공간과 상황에서 '떠난다'는 표현은 허구다. 해서 오늘은 내가 가진 부끄러움을 찾아내고, 글로써 부끄러움의 자리를 털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은 특정 개인의 전유물, 혹은 그 자체로 권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식과 정보는 공유되어야 하며, 지식에 목마른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 이러한 개인적인 생각은 변함이 없다.(2016.10.9/11.8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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