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Free Speech’로 번역되는 파르헤지아는 풀어 설명하면 ‘두려움 없이 진실 말하기’를 의미한다. 즉, 자신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처벌이나 후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행위와 관련된다... 파르헤지아는 타인의 견해와 믿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한결같은 용기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할 것을 요구한다. 자기 자신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자신의 눈앞에 세우는 용기. 바로 그렇기에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말하는 용기 및 실천으로서의 파르헤지아는 동시에 ‘자기지(Self-knowledge)’에 근거한 ‘자기 배려’의 시금석이다...자유로운 말하기는 진실에의 용기와 분리될 수 없다. 물론 파르헤지아가 가능해지려면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어야 하며 진실을 말해야 하고 제약 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김태원 교수, 영미어문학과, 「‘파르헤지아’, 진실을 두려움 없이 말하는 용기」, 서강학보, 2014)
생각해 보면, 나는 대화나 토론에서 말하는 쪽이 아니다. 주로 말없이 듣는 쪽이다. 안 하고 듣는 게 편하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아는 까닭이다. 단지 말 때문에 감정이 의도치 않는 정서적 갈등으로 서로 얽키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탓도 있다. 해서 말이든 글이든, 토론은 가능하면 피한다. 어쩔 수 없이 얽키면 그냥 들어주고, 어떻게 해서라도 서둘러 맺는 편을 택한다. 무엇보다 머리에 축적된 지식의 일천함도 한몫한다. 내 또래와 비교해서 가방끈이 꽤 긴 편인데도 그렇다. 간혹 내가 말이 많아지는 경우가 있다. 상대와 내가 사소한 허물이나 결함정도는 그냥 넘어가 줄 수 있을 정도로, 서로 익숙하고 친밀한 관계에 국한된다. 심지어 장난이나 실없는 농담을 예사로 걸기도 한다.
그런데 글은 다르다. 말과는 달리 생각을 충분히 숙성시켜 글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북하고 무거운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뱉는다. 이 점에서, 내겐 말보다는 글이 편하다. 한번 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다. 글은 그렇지 않다. 언제든 고칠 수 있다. 고친다는 의미는 뜻을 바꾼다거나, 생각을 고친다는 의미가 아니다. 글로 쓰고 싶은 말을 나름 충분히 생각한다. 필요하다면 다양한 자료를 토대로 논거를 갖추어 쓴다. 그래서 뜻을 분명하게 하는 데 있어서, 행여 잘못 알고 있거나 그르게 표현된 것을 바르게 잡는다는 뜻이다.
나는 내가 체험한 그만큼만, 사람을 알고 또 이해한다. 그 외에는 오다가다 주워들은 지식으로 이해한다. 솔직하게 표현하면, 아는 척, 이해하는 척한다. 이는 내가 존중하는 것만큼 상대방에게서 존중받으려는 이기심의 발로다. 사람도 상품처럼 겉모습과 속의 내용물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다. 말과 글 그리고 책도 마찬가지다. 이는 체험으로 안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국은 어디든 있기 마련이다. 진국은 '거짓 없이 참된'이란 뜻이다. '진정성'으로 이해해도 되겠다. 짧은 식견이지만, 진국의 예감은 대부분 적중한다. 어쩌면 주관적인 취향일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내게 없는 것에 끌린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아무튼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혹은 미처 생각조차 못하는 관점으로, 그 사람들이 보편성과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정리된 생각을 하고, 또 논리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지, 그저 감탄할 뿐이다. 이럴 때 마치 십년지기라도 만난 듯 반갑고 기쁘다.
그런 사람들의 글 혹은 좋은 책을 대할 때, 마치 첫사랑을 만났을 때의 그 느낌마저 들 때도 있다. 가슴이 콩닥거리며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한테선 남녀노소 불문하고 배울 점이 많다. 이들의 특징은 마음과 생각은 논외로 하더라도, 열린 마음, 열린 귀에 있다.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려 있기에,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이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이는 겸손과는 다른 듯하다. 그래서 때때로 이런 이들과 함께 나누는 이야기는 시간 아까운 줄 모른다. 심지어 자식뻘 같은 어린 사람에게서 조차 배울 것이 있다. 위대한 장수들이 치열한 전장을 치르고 난 후, 승패에 관계없이 상대 적장수에게 아낌없는 존경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심정을 이럴 때 가끔 이해가 되기도 한다.
위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이야기의 판을 깨트리는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된다. 주로 무거운 주제를 나누는 이야기의 중간에 끼어드는 사람들 중에 많다. 대부분은 논의하는 이야기 자체의 주제나 성격을 아예 이해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그냥 토론의 중심에서 관심을 촉발하고, 자신을 뭔가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데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다. 다양한 견해를 말하는 듯하지만, 결국 비슷한 말을 계속 반복할 뿐이다.. 결국 토론의 흐름을 끊는다. 오직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데만 관심이 있을 뿐, 이야기 주제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는 빠져 버린다.
한편 이와는 다르게, 주로 말발로 버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나름 사색과 통찰을 통한 자기만의 정리된 생각이 없다. 물론 담론의 주제나 성격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한다. 관심도 있다. 하지만 소위 주워들은 풍월, 카더라 통신 등, 남의 생각을 마치 자기 생각인 것처럼 읊조리는 사람들이다. 말끝마다 타인의 논리를 자기 생각의 근거로 삼는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들의 머리 속에 있는 경험이나 사고의 지도안에 없는 것이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들은 일단 거부한다. 자신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해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총동원한다. 필요하다면, 다소 궤변에 가까운 억지논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만일 상대가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면, 일단 개념 없는 사람으로 단정 짓고 본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의 것에 그냥 동화된 것이다. 때문에, 그것에 대한 지식만 있을 뿐, 정리된 자신의 생각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에게 교양과 지식은 아주 중요하다. 학벌을, 외부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표지로 삼는다. 외부의 것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표지로 삼는 것은 내면의 열등감에서 비롯된다. 열등감은, 간단히 말하면, 외적인 비교우위를 통해 '자신이 그것만 못하다'라고 생각하는데서 드러나는 감정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허세 철학 또한 가지고 있다. 자기 나름의 논리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래서 말하는 입은 있어도 듣는 귀가 없다.
이들은 논제를 떠나서, 자기가 모르거나 또는 이해되지 않는 것을 말하는 타인이 거북하다. 표정이나 태도에서 불편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낸다. 자기보다 잘나 보이고 똑똑해 보이는 것이 싫다. 혹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에 비판이라도 가하면, 그들의 숨겨진 열등의식이 곧바로 발동한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이 무시당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상대를 소위 '잘난 척'하는 사람으로 단정 짓는다. 그리고 그 잘난 척하는 것이 싫다는 일념 하나로, 그 담론의 주제보다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결국 말꼬리를 잡고는 담론의 장을 감정적으로 이끌어 가버린다.
또 한편으로, 자신의 신념과 생각이 온통 이해관계에만 집중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 부류는 자기들과 다른 생각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예 부정한다. 이들은 남을 가르치기를 좋아한다. 학벌을 포함하여 사회적 지위를 중요시한다. 또 의식 자체가 서열화된 권위의식이 있다. 즉 아래로는 귄위를 즐기고, 위로는 스스로 알아서 낮게 기는 사람들이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의견은 일단 동조 혹은 순응한다. 그 외엔 독선적인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평소에는 성인군자인 듯하다가도, 이해관계에 관련된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이야기, 혹은 비판이 나오면, 피가 역류한다. 만일 자신보다 낮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나 서열 혹은 학벌, 또는 자신보다 만만해 보이는 이가 아킬레스를 건드리는 다른 생각을 말한다면, 논리의 시시비비에 관계없이 어김없이 나오는 말이 있다. " '네가 감히', '얻다대고', '내가 누군지 알고', '어디 건방지게 가르치려고 하나?'" 등등. 이 시점부터는 아예 말이 안 통하게 된다. 이들 역시 담론의 장 자체를 감정적으로 이끌어 간다. 심하면 친밀한 관계일지라도, 한순간에 원수지간으로 바뀐다. 심지어 주먹다짐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후일 모두가 까맣게 잊고 있을 때라도, 이들은 이 충돌의 기억 때문에 반드시 뒤통수를 치고 복수한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권위의식을 타인들에게 과시하려는 성향이 많이 보인다. 다소 비약적인 여담이자만, 이를테면 계 모아서 동남아 골프, 도박 관광, 거기다가 필수옵션으로 딸린 보신·회춘 관광, 혹은 은근한 일탈이 므흣한 해외여행을 다녀와서는, 천사의 미소가 담긴 인증 사진 몇 장으로 '자유로운 영혼...' 운운하며 화려하게 포장한다. 혹은 거룩한 외유로 기막히게 자기를 과시한다. 이 같은 행위를 통해, 이 시대의 마지막 휴머니스트요, 군자인 척한다. 사실 여행은 스스로 찾아서 가는 고생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행이 즐거운 것은 그나름의 이유가 분명 있기 마련이다.
토론의 태도를 떠나서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엉큼한 꼰대들, 지킬과 하이드 같은 극명한 두 개의 얼굴을 훈장처럼 달고 사는 사람들도 대부분 여기에 포함되는 듯하다. 여행이나 일탈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감추어두어야 할 그늘진 묵계들을 그럴듯한 권위와 가식으로 화려하게 혹은 멋지게 포장하여 드러내 자랑한다는 데에 있다. 자기과시적인 방식으로 타인으로부터 대접받고자 하는 이중성에 있다. 자신이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인 스타일이다. 정말 놀랍게도 여기엔 남녀 차이가 특별히 없다.
마지막으로, 무지(無知)할뿐만 아니라 자기 생각마저 아예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가장 무섭다. 이들이 무서운 것은 힘 있는 개인, 혹은 유력한 다수의 논리에 무조건적인 맹신을 하기 때문이다. 달을 해라고 해도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담론의 장(場)에서 자진하여 소통을 가로막는 벽(壁)으로 등장하는 부류가 바로, 이 다수의 생각 없는 혹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앞서서 예를 든, 사람들이 열등감의 노예, 권위의 노예라면, 이 사람들은 생각의 노예다. 외부로부터 길들여진 생각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사회적 집단 심리에 함께 편승하게 되면, 놀라운 파괴력을 가지게 된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자기 눈에 비친 하늘 그것밖에 보지 못한다. 터널 속에 있는 사람은 입구에 비치는 빛밖에 볼 수 없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것이, 오직 누군가가 가리키는 한 방향으로만 정해져 있는 사람들이다. 이는 길들여져 있다는 점에서 신념과는 다르다.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가장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다.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게 있다. 담론의 판을 깨트리는 특정된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이다. 그래서 이러한 생각을 어떻게 일반화하느냐 하는 것은 내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선과 악, 아군과 적군, 좋고 나쁨, 등으로 딱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차원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확실하게 밝혀둔다. 왜냐하면 담론의 장에서 삶의 장으로 따로 분리해놓고 보면, 이들 모두가, 개개인으로는 마음이 따뜻한 좋은 사람들, 아주 평범하고 선량한 우리의 이웃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부류들 속엔 때론 다양한 얼굴을 갖고 살아가는 나도, 어떤 얼굴을 내미느냐에 따라, 예외가 아닌 까닭이기도 하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나는 겉과 속이 항상 일치하지 않다는 점에서 세 번째 그룹의 경향이 있는 듯하다.
미셀 푸코에 의하면, '파르헤시아(parrhesia 파루시아)'란, 이러한 여러 부류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담론의 장(場)에서 '진실을 말함으로써 화자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수도 있는,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푸코의 지적처럼,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파르헤시아'는 '위험을 각오한 진실되고 솔직한 직언'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배권력의 정치가 경제 자본의 이해관계로 융합된 특이한 사회다. 자본의 우산 아래 있는 문화와 언론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기획되고 통제되는 폐쇄적인 사회다. 종교와 교육도 마찬가지다. 자유로운 발언이 억압되며, 꼰대형, 승자 독선의 권위와 사회적 지위와 학벌을 중요시하고, 체면치레를 중시하는 사회적 담론이 지배하는 닫힌 공간이다. 거의 모든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최종 종착점은 경제적 헤게모니(주도권적 권력)로 집결된다. 헤게모니(Hegemony)는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개념 지은 말이다. 그 뜻은 '어떠한 일을 주도할 수 있는 권력 또는 권한'이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 지배적인 권력이나 사회적 집단 권위의 이해관계에 의해 공개적이고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제한되는 사회라는 말이다. 이런 사회적 환경에서 이야기나 토론의 판이 곧잘 감정적인 싸움 혹은 갈등으로 번지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일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행여 어떤 사람이 주류의 집단 혹은 지배세력에 반(反)하거나 뚜렷하게 위협이 되는 존재로 낙인 찍힌다면, 그 시점부터 그 사람의 사회적 삶의 행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험난해진다. 심하면 개인의 인생마저 파괴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침묵 혹은 방조 혹은 암묵적인 동조를 하는 가운데서, 불이익 혹은 큰 위험을 각오하며,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가리켜 '파루시이스트'라 한다. 파르 헤시아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우리 사회가 '진실에 대하여 스스럼없이 말하는, 용기'있는 파루시이스트들의 소리를 경청하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규정되고 해석된 사실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실체적 진실에 관심을 갖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리라 생각한다.
귀는 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다. 귀를 열어도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공감은 단지 상상의 느낌에 그칠 뿐이다. 개인이든 사회든 자정(自淨)의 능력은 열린 귀와 열린 마음에서부터 출발한다. 미국의 여류 수필가 레슬리 제이미슨은 '공감이란, 타인의 아픔에 스며드는 여정이며, 여전히 나의 슬픔이 깊을 때에도, 타인의 아픔을 듣겠다는 선택이다(「The empathy exams, 2014」)'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에 체험적인 깊은 공감을 한다. 타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곧 공감의 시작이다.
공감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정신에 바탕을 둔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존중받고 있다는 그 느낌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이처럼 인간을 인간답게 여겨주는 것, 내가 소중한 만큼 타인을 소중한 존재로 여겨주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것의 의미는, 인간을 도구나 수단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는 곧 자신이 도구나 수단으로 취급당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의지이기도 하다. 이는 자기에 대한 배려와 관련된다. 자기 배려는 미셀 푸코의 후기 철학적 관심을 이루는 주요 개념이다. 자기 존중과 자기 배려는 자기 자신의 이해에 바탕을 둔다. 나를 이해하기 때문에, 나는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나는 당신의 삶을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알지는 못하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 상대를 인정하고 차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러한 인간 상호 존중과 배려의 태도가 사회적 공감대로 형성되지 않는다면, 사회적 자정(自淨)의 문화는 단지 꿈꾸는 자의 희망에 불과할 것이다.
탁 깨 놓고 있는 그대로의(unvarnished) 진실을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파르헤시아의 장(場)을 다시 생각해 본다. 파르헤시아의 의미가 그러하다면 과연 나는 어떤가?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왜냐하면, 나도 파르헤시아의 판을 깨트리는 부류일지도 모른다는 자기 인식 때문이다. 정의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정의를 애타게 찾는다. 자유가 없기 때문에 자유를 노래하고 꿈꾼다. 용기가 없기 때문에 용기를 강조하고 독려한다. 곤고하기 때문에 희망을 이야기한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을 갈구하며 찾는다. 이러한 단순한 인생의 이치가 내게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조목조목 따지고 판단하는 만큼 나도 판단당할 수 있다는 삶의 경험적 이치도 마찬가지다.
돌이켜보면, 나는 너무 정직해서 손해 볼 때도 많았다. 꼭 해야 할 말도 못 하고, 꼭 하고 싶은 말도 차마 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이래저래 '그러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는 때도 많았다. 그런데 글은 하고 싶은 말이 제약 없이 가능하다. 타인을 의식하는 자가검열장치도 가동되지 않는다. 단지 논거의 검열장치만 가동될 따름이다. 내겐 글이 말보다 편하다. 글은 언제든 진실된 방향으로, 수시로 고치고 가다듬어 바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말보다는 머릿속의 생각이 활자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글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어쩌면 나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스스럼없이 말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나 홀로의 공간에서, 글로써 나마 파루시이스트(the parrhesiastes)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2014/4/15)
※Parresia [par-uh-see’-ah 파루시아]: boldness to tell the truth, a Greek word that mean freedom in speaking, unreservedness in speech; openly, frankly, without concealment; free and fearless confidence, cheerful courage, boldness, assurance (Strong’s Concordance)
※Parrhesiastes [par-uh-see’-ist 파루시이스트]: one who boldly tells the tru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