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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허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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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27. 2017

허튼소리

무의미한 소리는 없다. 소리에는 어떤 형태로든 의미가 담겨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의미'라 함은 '어떤 일이나 행동 따위가 나오게 된 이유나 과정 그리고 결과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특정한다. 소리는 물체의 진동에 의하여 발생한다. 그것이 공기의 파동을 타고 전달된다. 소리는 공기의 파동이 귀에 전해진 결과물이다. 이는 소리가 발생한 원인과 과정이 있음을 의미한다. 소리는 그 결과다.


알다시피 말 못 하는 사물도 소리를 낸다. 바람이 불면 나무도 소리를 낸다. 건물도 소리를 낸다. 바다도 소리를 낸다. 손바닥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 외력의 강도에 따라, 파장의 세기에 따라, 소리의 크기나 세기도 각기 다 달라진다. 말 못 하는 갓난아이가 우는 소리에도 의미가 담겨 있다. 깜짝 놀라 부지불식간에 내지르는 비명도, 나도 몰래 내쉬는 한숨소리도 그렇다. 하지만 소리만으로는 그 의미를 드러낼 수 없다. 그 소리를 인지하는 명확한 주체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 소리가 가진 의미는 인지하는 주체에 의해서, 비로소 해석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숙련된 기계 기술자는 기계가 내는 소리만 듣고도 그 원인과 상태를 안다. 소리가 내는 의미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인 관심과 집중 그리고 경험의 결과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 


의미 있는 소리가 약속된 규칙과 체계를 갖출 때, 비로소 언어가 된다. 약속된 체계와 규칙이라 함은 언어체계, 즉 어휘, 형식, 문법 등의 규칙 등을 말한다. 여기엔 경험 그리고 감정, 정서와 같이 의미가 드러나는 느낌도 포함된다. 이는 표현되지 않는 것을 통해서도 의사전달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리가 체계와 규칙을 갖추고, 해석 가능한 느낌이나 의미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면, 의사전달 또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말이 된다. 말에 일련의 맥락을 갖춘 내용이 담기게 되면, 이야기가 된다. 맥락이란, 어떤 일이나 사물이 서로 연관되어 이루는 줄거리를 말한다. 물론 이야기도 해석 가능한 의미들의 총체다. 여기엔 개연성도 포함된다. 


개연성이란,  '절대적으로 확실치는 않으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질'을 뜻한다. 이는 인과적 관계나 연관성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논리와  관련이 있다. 경험이나 느낌을 포함하여  논리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흔히 사용하는 ‘말이 된다’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가 바로 ‘개연성이 있다', 즉 '일리가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되겠다. 개연성과 짝을 이루는 말이 필연성이다. 필연성이란, '사물의 관련이나 일의 결과가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요소나 성질'을 말한다. 정리하면 맥락은 현실성을 가지고 시간적, 공간적 또는 의미적으로  일련의 관계를 이루는 줄거리이다.  반면에, 개연성은 관계성이나 관련성과는 상관없이, 의미적 혹은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의 내용이다. 다시  말해 개연성은 비현실적일지라도 수긍할 수 있는 경우에 어울린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소설이나 드라마를 연상하면 되겠다. 잘 짜인  허구인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창작물은 개연성이 맥락과 적절하게 조합된 경우라 하겠다. 


결국 해석이 가능한 소리로 의미 전달에 막히거나 소통에 실패한 말 또는 이야기는, 그냥 ‘소리’에 불과하다. 여담으로 요즘 아이들 말로 '말이 씹히는' 까닭도, 이런 소리들에 해당된다 하겠다. 소통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무시되는 소리로 취급되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의 결여라는 인격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 아무튼 단순한 '소리'에 불과한 말들을 표현하는 우리말은 쉽게 찾아진다. ‘허튼소리’, '헛소리', ‘군소리’, '선소리', ‘별소리’, ‘큰소리’,... 등등은 표현된 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 말로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소리들이다. 반면에 ‘쓴소리’, ‘잔소리’, 등은 비록 바른말일지라도, 듣는 사람의 귀에 거슬려 십중팔구 쓸모없이 무시되거나 버려지는 말이다. 


어제 영화 '곡성'을 봤다. 오래전, 영화 '살인의 추억'을 보고 우리 영화의 비약적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새로웠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그려진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그림들은 꽤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영화가 뭔가가 꼬여서 난해해졌다. 그 이유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개연성의 결여가 중후반부에 줄거리의 흐름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마치 잘 돌아가던 톱니바퀴에 무언가가 끼어, 삐걱대는 소리만 내다가 결국 멈춰버리는 것과 같다 하겠다.  내심 실망이 컸던 이유는 '살인의 추억'과 같은 수준의 어떤 기대감을 가진 까닭이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어떤 거북함이나 불편함보다는, 그야말로 불쾌함만 가득 남았다. 보고 즐기는 상업 오락영화라는 점에서는, 외국의 C급 공포영화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 시사회에서 일부 관객들이 중도에 나가버렸다는 반응도 수긍이 되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은 유독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닌 듯하다. 이 같은 부정적 시각에 대해,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서 설명하기를, '독자에게 이중적인 퍼즐을 던져주고, 관객의 다양한 해석을 유도했다'라고 한다. 한마디로 유치하고 비겁한 변명으로 느껴졌다. 내 생각에 그렇다는 말이다. 개연성이 없는 퍼즐은 단지 난센스 그 자체에 불과하다. 아름답고 훌륭한 옥돌을 가지고 한번 쓰고 버리는 이쑤시개를 만든 격이다. 물론 '곡성'에는 의미 있는 소리, 의미 있는 이야기가 분명 존재한다고 나름 생각한다. 예를 들어, 사람의 인지나 지식 혹은 경험으로는 결코 쉽게 파악할 수 없고, 함부로 단정하기 조차 힘든 선과 악의 본질적 실체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관심은, 미국의 사회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의 '복종 실험(Obedience experiments)', 짐바르도(Philip George Zimbardo)의 '루시퍼 효과'(Lucifer Effect), 그리고 독일의 정치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등과 그 맥락을 함께 한다. 다만 감독이 그것을 개연성 있게 제대로 풀어내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영화 '곡성'처럼 분명한 사회적 인문학적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나 글에 종종 이끌린다. 남다른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면 요점이 애매모호하다. 심지어 난해하기까지 하다. 이런 말과 글들을 요즘 흔치 않게 접한다. 칼럼, 사설, 논설 등은 산문과는 달리, 자신의 의견을 논거를 들어 주장하여 타인을 설득하는, 목적성을 가진 글이다. 개연성, 추측, 의문 등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남을 설득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물며 논거도 없이 단지 개연성에 의지하여 타인의 감성과 정서를 건드리고, 그에 호소하여 설득하고자 하는 글은 '허튼소리'에 불과하다. 소위 '미문(美文)의 악취'다. 대중을 상대로 한 기성 언론매체에 공개된 글들은 대체로 이와 비슷한 양상이다. 


마치 어수선한 현실 사회를 대변이라도 하는 듯하다. 거미가 거미줄을 쳐놓고 먹이를 기다리듯이 그 패턴이 한결같다. 불특정 독자의 불특정 해석을 그야말로 불특정적으로 기대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아마도 A를 이야기하면서 B나 C의 의미로 인정해주고 또 그렇게 수긍해 달라고 하는 듯하다. 세상의 시류에 아부하는 곡학아세는 다반사다. 아침 생각 다르고, 저녁 생각 다르다. 어제 한 말 다르고, 오늘 한 말 또한 다르다. 심지어 자기가 한 말도 모르쇠다. 그래도 "대 놓고 '허튼소리'나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그 이유는 현실이나 현상의 본질을 호도(糊塗)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호도(糊塗)라는 한잣말은, '풀을 바른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종이에 풀을 발라서 덧 씌운다'는 뜻이다. 국어사전에는, '명확하게 결말을 내지 않고 일시적으로 감추거나 흐지부지 덮어 버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호도를 순우리말로 바꾸면, '물타기' 가 여기에 해당된다.


'무의미한 소리는 없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의미를 담고 있는 소리도 체계와 규칙을 갖추지 않고 낸다면, 그냥 소리에 불과하다. 그 의미가 애매모호하다면 더욱 그러하다. 물론 말과 글로 표현된 것과 내용은 다를 수도 있다. 표현되지 않는 것들 속에 담긴 의미는 표현된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삶을 통해 경험되고 공유된 감정이나 정서에 자연스레 연결된다. 이런 경우엔 느낌으로도 금방 알 수 있다. 느낌이 통하면 굳이 말로 글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공감되고, 어렵지 않게 이해가 다가온다. 하지만 거기에 맥락과 어울릴 수 있는 어떤 개연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비록 의미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허튼소리'에 불과하다. 


 때때로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하고 서툰 글에서 큰 감동을 받는다. 상투성이나 기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 아이만이 표현할 수 있는 진정성과 솔직함 때문이다. 여기엔 개연성도 포함된다. 어린아이들에게서 종종 배운다.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대신해서, 진솔한 나를 표현해 줄 수는 없다. 나는 나일뿐이다. 나는 의도된 공감과 소통을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곧잘  '허튼소리'를 습관적으로 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뜻이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 애매하거나 모호한 것을 습관적으로 싫어하니, 그야말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보면 영화 '곡성'을 핑계 삼아, 지금 나는, '누워서 침 뱉는 허튼소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한번 뱉은 말은 돌이킬 수는 없다. 하지만 흠 있는 옥석을 마음에 들 때까지 깎고 다듬듯이, 글은 드러내고자 하는 뜻이 분명하도록, 잘못된 것은 수시로 고쳐서 바로 잡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여하튼 내가 아무렇지 않게 쓰는 말과 글들을 한 번쯤 돌이켜 생각해보는 습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201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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