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허튼소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르헤시아 Dec 26. 2017

허수아비 타령

"중국의 선비가 한 기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서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아홉 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김희영역, 동문선, 2004)

위의 이야기는 롤랑 바르트의 에세이집 『사랑의 단상』, '기다림'의 글 마지막에 붙어 있는 짧은 예화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에서는 병사와 공주로 변형되어 나온다. 감독은 병사가 마지막에 포기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혹자는 감독판에 그 이유가 나온다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감독이 잔잔한 감동에 초를 친 셈이다. 어째튼 위의 이야기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려면 먼저 이 글을 쓴 인물에 대해서 이해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롤랑 바르트는 포스트 구조주의를 대표하는 현대 철학자다. 

 

구조주의는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빌헬름 분트가 인간의 의식을 분석하는 틀로 사용한 사고체계를 말한다. 분트는 의식의 구성요소를 보고 듣고 느끼는 지각(Sensations)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감정(Feelings)으로 구분하였다. 이 두 가지 구성 요소를 분석함으로써 인간의 마음과 행동의 원인을 규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전체를 구성하는 대립적인 개개의 요소를 찾아내고, 그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구조주의다. 이는 심리학의 중요한 분석틀이다. 후일 구조주의는 프랑스에서 소쉬르의 언어학과 사회인류학자인 레비스토로스에 의해 철학적 체계를 갖춘다. 철학 특유의 관념적 인식의 거품을 걷어내는데 큰 공헌을 했다. 60년대에 들어오면서 포스트구조주의(후기 구조주의)로 발전을 거듭하여,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세상과 인간, 사회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철학적 사고로 자리 잡았다. 


초기 구조주의는 하나의 현상 또는 대상을 흑과 백, 앞과 뒤, 오른쪽과 왼쪽 등과 같이 이분법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의미를 찾아내어, 전체 구조의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는 달리 포스트 구조주의는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다양하게 존재하는 의미들에 대한 해석을 허용한다. 따라서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사물 또는 현상의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이미 전제된 언어를 버려야 한다.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전제된 언어를 제거하는 것. 이것이 포스트구조주의적 사고의 핵심이다.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은 우리가 안다고 하는 대부분의 사물의 의미(시피니에)가 사회나 혹은 어떤 집단의 신화 또는 누군가의 선험 된 지식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통찰한 철학자 집단이다. 구성주의의 요점도 비슷하다. 


글쓴이가 어떠한 철학적 사고를  바탕에 두고 있는가를 이해하고 나서, 위의 기녀와 선비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저 글이 담긴 책의 해당 글 전체를 읽어보면 또 달라질 수도 있다. 바르트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자기 할 말을 하고는 글의 마지막에 그냥 툭 던져 놓았을 뿐이다. 그의 글을 생각하며 읽었다면, 기다림과 사랑과의 관계를 잠시 고민하게 만든다. 사랑에서 기다림이란, 사랑에 앞서 이미 전제된 언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전제된 언어'다. 


전제(前提)란,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을 이루기 위하여 먼저 내세우는 것'을 말한다. 바르트는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미 전제된 그것으로 '본질로서의 사랑'이 왜곡되거나 퇴색되어 있을 가능성을 열어둔다. 물론 개인적인 이해다. 결론은 글을 읽는 독자의 몫이다. 당연히 일화가 제시된 해당 글 전체를 읽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면 더 좋다. 물론 영화 시네마 천국도 마찬가지다. 사실의 부분과 관련된 전체를 놓고 본다면, 생각도 해석도 더욱 다양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인식의 주관성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인식의 주관성이란, 각자가 가진 삶의 경험 또는 가치관, 혹은 지식의 한도 안에서 대상이나 사물을 이해하고 인지하는 것'을 말한다. 동일한 대상이나 상황을 보고 그것을 인지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각자가 가진 인식의 주관성 때문이다. 즉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느끼느냐는 개인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 되겠다. 심지어 연령대와 성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인식의 주관성은 사고의 과정을 거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입각된 즉각적 반응에 가깝다. 그러할지라도 대상의 본질, 또는 실체, 혹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 인식의 주관성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주체가 되는 사람이, 보이는 대상 또는 사실에 관해 알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진실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주관적으로 진실'이라고 믿고 있을 때에만 성립된다. 다시 말해, 진실이라 믿기 때문에 인식의 주관성이 성립된다. 따라서 당연히 거짓말이나 허구는 여기에 해당될 수 없다. 사실이 확인이 되지 않는 가설이나 추측 등을 가지고, 진실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눈에 보이는 백조가 하얗다고 모든 백조가 전부 하얗다는 보장은 없다." 이 말은 인간의 경험에 앞서 관념적인 지식으로 규정지어진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의심을 품었던 철학자 데이비드 흄(1711~1776)의 통찰이다. 호주의 자연에는 백조와 꼭 닮은 검은 새가 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신기하게 여기고 그 이름을 궁금해한다. 사실 이 새는 바로 우리가 익히 아는 백조라고 불리는 고니다. 검은 새 고니는 1697년 호주 대륙을 탐험한 탐험가들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이후에 과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로는, 북반구의 고니는 흰색, 남반구의 고니는 검은색을 띠는 경향이 짙다고 한다. 이는 우리가 아는 지식이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정의되어 전제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이, 실상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는 사실 경험으로 접하기 전까지는, 설령 우리가 안다고 해도, 실제로는 모르는 것일 수도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는 '무엇을 아느냐?' 보다는 '어떻게 아느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현실적으로 인간은, 어떤 현상의 사실여부, 진실 유무를 떠나서 누군가에 의해서 주입된 틀 또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이해관계, 느낌, 직관, 추론, 허구적 상상력 등등의 주관적인 인식에 의해서, 안다고 하는 경향성을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 범주에서 벗어나면, 대부분  사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한다. 혹은 자기 생각에 맞도록 왜곡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 생각에 맞는 것만 보고 찾아다니는 경향이 있다. 최근에는 철학자들과 인지심리학자들의 오랜 통찰을 통해서, 그리고 뇌과학자 심지어 행동경제학자들까지 나서서 이를 과학적인 방식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미 전제되어 있을법한 언어를 찾아서 제거하는 것, 이것은 자칫 동굴 속에 스스로 자신을 가둬버릴 수도 있는 인식의 주관성에서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 된다. 


현대의 뇌·신경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인식하고 경험하고 기억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추측한 것들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오감 즉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을 통해 입력된 신호를, 이와 관련된 다른 정보들과 조합하여 추측한 것을 인식하고 경험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실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식하는 것 또는 경험한 것 등 모두가 실재하는 현실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감정, 기대, 희망, 환상 등등 또한 두 말 할 것도 없다.


여하튼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은 마냥 부정할 수만은 없는 현실의 생생한 경험이다. 심지어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실제로는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의 얼굴도 몸도 칼을 대어 인위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세상이다. 포토샵은 그야말로 마법의 거울이다. 하물며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이야 말할 것도 없겠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을 아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고 제자들에게 강조한다. 세상에는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있다. 글도 마찬가지다. 가능하다면, 문학을 이해할 때, 먼저 그 작품을 쓴 작가의 연륜을 헤아리고,  살아온 삶과 가치관, 철학 등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과정 중의 하나다. 문학. 예술도 그렇지만 특히 인문학. 사회과학에 관련된 이론이나 책을 이해할 때, 이 과정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무엇을 보고 읽고 무엇을 느끼느냐는 개인의 몫이다. 정답은 없다. 왜 그렇게 느끼느냐고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따지고 분석할 이유 또한 없다. 분석해야만 할 이유는 오직 본인에게 있다. 단지 내가 느끼는 그것으로 사람이나 사물을 그렇다고 속단하고 확신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자의든, 타의든 전제된 언어를 제거한다는 것은 오갈 수도 없는 상황, 빼도 박도 못할 심리적 상황에서, 새로운 시각과 이해를 여는 훌륭한 단서가 된다. 


홀로 고상함을 떨기에는 요즘 사회 현실이 수상하고 역겹기까지 하다. 얼마 전, 이성부 시인의 시집을 훑다가 '허수아비'라는 시를 마주하였다. 작금의 사회 현실과 맞물려 내 심정을 건드렸다. 이성부 시인은, 역사의식과 현실 참여적인 문제의식이 분명한 민중시인으로 이해한다. 물론 개인적인 소견이다. 시인에 대한 이런 이해는 내가 당신의 시를 대하고 느끼는 감정이나 감상에도 직접 혹은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어쩌다가 지극히 개인적인 내 심사도 허수아비와 함께, 실타래 얽히듯 덤으로 얽혀 버렸다. 


엉뚱하게도 나는 시인의 '허수아비'를 통해, 단 하루를 남겨놓고 의자를 들고 미련 없이 일어서는 롤랑 바르트의 선비를 연상한다. 선비는 아마 99일 동안 전제된 관념적 언어들을 하나씩 지웠을 게다. 그 고통스럽고 힘든 99일의 인고(忍苦)를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는 것은, 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 헤아려 본다. 진실로 사랑하는 이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다. 사랑을 해 본 자만이 안다.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바로 고통이다. 선비의 처절한 99일 동안 기녀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 생략된 여백은 생각하는 자의 몫이다. 아픔을 느끼는 것은 비단 육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짐승도 사랑은 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선물이다. 이 특별한 선물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행위로 드러났을 때, 비로소 그 진정성의 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어떤 대상에 대하여 전제된 관념, 환상, 환영, 기대, 희망, 언어 등을 다 지웠을 때, 오롯이 남는 것은 현실이다. 현실은 냉정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현실은 지울 수도 없다. 전제된 언어를 다 지워버렸을 때, 현실로 내게 남는 것은 '허수아비'다. 허수아비를 생각하니 오늘 또 걸려 오는 게 김선태 시인의 '허수아비 타령'이다. 이(李) 시인이든 김(金) 시인이든 그들이 하나같이 열어 놓은 것은, 공교롭게도 쓸쓸한 희망이다. 돌아서 가는 선비의 손에 들린 의자가 그렇게 말해주는 듯하다.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을 통해서 외롭고 쓸쓸한 나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씁쓸한 일이다. 하물며 의도한 바 없이 누군가에게, 자신이 초상집 개(喪家之狗)로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느낀다는 것은 씁쓸하고도 처량한 일이다. 타인으로부터 내 생각, 내 정서가 재단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참 처량하고도 거북한 일이다. 더구나 보이는 자기를, 타인에게 읽히는 자기를 일일이 설명한다는 것은 초상집 개만큼 구차하고도 거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자처럼 그냥 인정하며, 호탕하게 웃어 넘기지도 못하는 졸보이기에 더욱 그렇다. 가끔은 부끄럽기도 하지만, 적어도 내게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내 속과 밖에 짓누르는 무게로 얹힌 전제된 언어들을, 밖으로 밖으로  하나씩 토해내며 지우는 작업이라 자위해 본다.


따뜻한 사람의 가슴이 그리운 계절이다. 지금 여기의 실존하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야말로 '허수아비'가 딱 제격이라 하겠다. (2016.10.2 쓰고 10.3 정리, 15일 또다시 고쳐 쓰다. 2017.12.26 다시 고쳐 쓰고 정리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쳐쓰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