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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20. 2017

고쳐쓰기

“시 읊어 한 글자를 안배하느라, 두어 가닥 수염을 꼬아 끊었네(吟安一個字 撚斷數莖鬚)”

당(唐) 나라 시인 노연양(盧延讓)의 고음(苦吟)이라는 시의 부분이다. 시구(詩句)를 퇴고(推敲)하는 괴로운 심정을 시로 표현한 재미있는 내용이다. 그 모습을 가만히 상상해 보노라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나마 몇가닥 남지도 않은 수염인데 말이다. 퇴고(推敲)란, '완성된 글을 다시 읽어 가며 다듬어 고치는 일'을 말한다. 옛 문장가들의 한시에서, 위에 인용한 시의 내용을 차운하여 퇴고의 어려움을 읊는 시구들이 어렵지 않게 찾아진다.   


퇴고에 관한 헤밍웨이의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바다와 노인'을 적게는 200번, 많게는 500번 고쳐쓰기를 했다고 전해진다. '오발탄(誤發彈 1959)'의 작가 이범선(李範宣) 선생은, “한 사람의 작가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키 높이만큼의 습작 원고를 써야 한다"라고 하였다. 한국문단에 괄목할 만한 족적을 남긴 문인들은 한결같이 '퇴고는 작가의 숙명'이라 할 정도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토로한다.


이처럼 퇴고는 글을 쓴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은 거친 옥돌을 깎고 두드리고 다듬고 문질러 빛을 내게 하여, 마침내 옥이라는 보석의 가치를 드러내게 하는 작업, 즉 절차탁마의 과정과 같다 하겠다. 창작의 과정과는 또 다른 노력과 사색의 시간을 요하는, 어렵고 힘든 일임을 알 수 있다.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말은 흔히들 하는 말이다. 참으로 그렇다. 어째튼 작가, 문인, 소설가는 참 대단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없다. 


조선 말기의 문장가 영재 선생(이건창)은 작문법을 논한 편지에서, 퇴고의 목적과 방법 그리고 그 중요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한다, "말이 뜻에 합당해야 하며, 뜻도 말에 합당해야 한다. 말이 뜻에 합당하지 않으면 그 말이 비록 교묘하다 할지라도 못쓰게 되며, 뜻이 말에 합당하지 않으면 비록 정비가 잘 되었다 할지라도 어지러워지게 되기 때문이다. 거칠어 못쓰게 된 것은 더욱 다듬어야 하고, 어지럽게 된 것은 더욱 가다듬어야 한다.... 무릇 글을 지을 때 열 번 옮겨 쓰고 열 번 읽어보아 하자가 발견되지 않을 때 비로소 끝난 것이다."(이건창, 1852~1898 ☞答友人論作文書).  


이는 글을 고치고 다듬는 것은, 외적 상황에 비추어 내용이나 관점을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드러내고자 하는 뜻을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아울러 이는 비단 시나 소설뿐만 아니라 생각을 표현하고 뜻을 드러내는 모든 형태의 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하겠다.


그런데 퇴고(推敲)라는 한자어 뜻은, ‘밀 퇴(推), 민다’와 ‘두드릴 고(敲), 두드린다’의 합성어다. 이는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말이다. 퇴고가 현재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당나라의 시인 가도(賈島)와 당송 8 대가로 알려진 한유와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그 사연은 이렇다. 


당나라의 시인 가도(賈島:779∼843)가 어느 날 당나귀를 타고 장안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불현듯 “새는 연못가 나무에서 잠들고, 스님은 달빛 아래에서 문을 민다.(鳥宿池邊樹 僧推月下門)"는 시구가 떠올랐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을 ‘민다(推)'와 ‘두드린다(敲)' 두 글자를 놓고 당나귀 위에서 고심하였다. 그러던 중 요즘으로 치면 장관급 고위관리로 장안 시장이었던 한유(韓愈)의 행차와 길 위에서 딱 마주치게 되었다. 신분이 낮은 가도는 마땅히 먼저 길을 비켜서 읍해야만 했다. 하지만 당나귀를 탄 채로 시구를 놓고 고심하느라 미처 한유를 보지 못했다. 가도는 먼저 길을 비키지 못한 까닭을 한유에게 솔직히 말하고 깊이 사죄했다. 이에 한유는 가도의 무례함을 노여워하는 대신에 잠시 생각하더니, “내 생각엔 역시 ‘민다'는 ‘퇴(推)'보다 ‘두드린다'는 ‘고(敲)'가 좋겠네."하고 오히려 충고하였다. 이를 계기로 가도와 한유는 신분의 귀천을 떠나 둘도 없는 시우(詩友)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후일 전해져 내려오는 가도의 시는 한유의 의견이 아닌 '민다(推)'로 되어 있다. 가도는 결국 남의 생각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취한 것이다. 퇴고의 고사에서 고쳐쓰기의 참된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영재 선생의 지적처럼 자신의 생각을 합당하고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노력이 곧 고쳐쓰기라 하겠다..


서불진언 언불진의 (書不盡言 言不盡意)라는 말이 있다. 주역(周易) 계사상(繫辭上) 편에 나오는 말로, '글로는 말을 다 표현할 수 없고 말로는 생각(뜻)을 다 표현할 수 없다.'라는 의미다. 그런데 마음에 품은 생각은 분명한데 그것이 제대로 글로 표현되지 못한 것과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뜻 모를 말을 글로 쓴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전자는 퇴고의 과정으로 극복이 가능하고, 퇴고가 뜻을 분명히 드러내고 또 그 이해를 더욱 깊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후자는 모래 위에 탑을 쌓아 올리고 까마귀에 색칠하는 것과 같은 자기기만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따름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인용한 영재 이건창 선생의 퇴고에 관한 가르침은, 역설적으로 희망을 준다. 지식이 일천하고 아둔한 내가, 얕은 생각을 어설프게 글로 드러낼 때 항상 느끼는 것이 있다. 의도하는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그 식견의 얕음과 논거의 결핍과 표현력의 부재가 그것이다. 퇴고는 이러한 내게 좌절감이 아닌 오히려 일말의 희망을 준다. 비록 어설픈 글일지라도 말이 뜻에 합당하고 뜻이 말에 합치할 때까지, 10번이라도 옮겨 쓰고 고쳐 쓰는 그 과정을 통하여 그 뜻이 보다 명확해질 때, 비로소 미련하고 아둔한 필부의 온전한 이해가 되고 식견이 되고 산 지식이 되는 글공부가 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일 지라도 천 번 생각에 한 번의 실수는 있고, 어리석은 자라도 천 번을 생각하면 한 번은 얻음이 있다(智者千慮, 必有一失; 愚者千慮, 必有一得)"라는 사기 회음후열전의 이좌거가 한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나 싶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어떤 작가가 밤새 쓴 글을 그의 아내가 읽어 보았다. " 이야.. 이런 쓰레기 글을 쓰는 사람한테 노벨상을 다 주나 봅니다?..." 하고 빈정대었다. 그러자 대수롭지 않게 작가가 말했다. " 응, 쓰레기 글 맞네. 하지만 몇 번 고쳐 쓰면 썩 괜찮은 글로 바뀔 거야...". 이는 수학자, 철학자, 역사가, 비평가이며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으로 현대 분석철학의 기초를 닦은 버트란트 러셀의 일화라고 한다이로써 무식하면 용감해진다는 말도 때론 위안이 된다는 것은, 나 같은 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라 하겠다. 


토하듯 내뱉은 글들은 널려있는데, 고쳐쓰야지 하는 마음만 늘 간절하다. 행동보다는 늘 생각이 생각보다는 말이 먼저 앞서기도 한다. 글 찌꺼기를 오물처럼 세상에 어지러이 흩뿌려놓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세월은 날 기다려주지 않는데,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는 것은 분명 게으른 까닭이다.  아둔하기만 한 내게 퇴고보다는, 어쩌면 몸에 배여 버린 오랜 게으름을 극복하는 것이 더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 알면서도 마음은 원하면서도 쉽사리 실행에  옮기지 못하니 더욱 그렇다. 돌아보면 그렇게 길지도 않은 인생, 상처뿐인 삶도 후회어린 삶도, 합당하게 만족할만한 지경에 이르도록 언제든 10번 20번 다시 고쳐 쓰고, 사람의 마음도 수시로 리셋하여 다시 고쳐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2016.10.12 다시 고쳐 쓰다.2017.12.20 다시 또 고쳐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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