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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17. 2017

사물을 보는 눈

"사물을 보는 눈은 관(觀)과 견(見)의 두 가지 눈이 있다. '관의 눈'이라함은 상대방의 생각을 간파하는 마음의 눈을 말하며, '견의 눈'이라함은 육안으로 상대의 현상을 보는 것을 이른다. 싸울 때는 관의 눈을 크게, 견의 눈을 작게 뜨고서 먼 곳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가까운 곳의 움직임을 통하여 대국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미야모토 무사시, '오륜서' 양원곤 옮김/미래의 창 2002).


어릴 적 기억이다. 한동안 무협지에 빠져 있다가 우연히 일본의 전설적인 낭인검객, 미야모토 무사시에 관한 소설을 읽게 되었다.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 마음이 풍선 부풀어 오르듯 팽창된 적이 있었다.  덕분에 야마오카 소하치의 장편 대하소설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大望)도 접하게 되었다. 무협지의 재미와는 분명 달랐다. 당시의 흐릿한 기억으로는 어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소설을 통해 생사를 초월한 듯한 담백한 마음을 본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아더왕 이야기'에 나오는 기사들의 무용담을 읽고도 비슷한 느낌에 휩싸이기도 했다. 기사 이야기에는 명예와 충성과 의리가 짙은 감동으로 더해졌다.


좌우를 겨우 분간할 정도로 나이가 어느정도 든 이후에는 기사도와 무사도에 대한 생각이 약간 달라졌다. 특히 일본 무사집단에 관한 것은 조선의 국모인 민비시해사건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이다. 여튼 기사도와 무사도에 관련한 멋진 이야기들이, 역사상 실존인물로 그에 관한 자료가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즉 실제 역사라기보다는 설화에 기반한 것으로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가공되고 미화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부터다. 어찌되었건 간에 이러한 인식은 실제 역사와 기록된 역사에 관심과 의심을 가지면서부터 비롯된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 네 옛 선인들, 특히 선비에 관한 부정적 선입견은 그들이 남긴 저술을 직접 접하므로써 달라졌다. 옛 선인들, 특히 조선 선비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의 뿌리는, 비록 공부는 뒤에서 세는 것이 훨씬 빠르지만, 내가 어릴 적 받았던 교육에 기인한다. 나는 국민교육헌장 세대요. 유신독재시대의 교육을 받은 세대다. 


이제와서 다시 정리해보면, 어린 시절의 내가 그렇게 감동을 받았던 이유는 충분히 납득이 가능해 진다. 중세유럽의 기사도와 일본의 무사도는 봉건체제라는 특수한 지배체제에 의해서 대의명분의 목적으로 만들어지고 미화된 정신인 까닭이다. 사실의 진위, 허구를 떠나서, 감동적으로 잘 쓰여졌기 때문에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록된 역사는 실상을 보여준다. 그들이 명예와 충성을 모토로 자기를 희생 헌신하는 것은 그들 지배체체와 자신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지, 오늘 날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결한 인류애나 고귀한 정신의 발로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미화된 정신일지라도 새롭게 재해석되어 바람직하게 계승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또한 좋은 것을 본받는 것은 마땅히 권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무작정 숭모하고 흉내낼 것이 아니라, 그 실상을 어느 정도 알 필요는 있다. 실제 봉건지배체제하에서 민초의 역사적 삶은 인간이하로 취급되는 비참의 극을 보인다. 실제 역사는 소설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역사의 사실들을 통해 알게된 바는, 역사 속에 드러나 있는 기사와 무사계급의 실상은 지배 권력의 완장찬 마름들로서 살인과 폭력이 마치 면허처럼 법적· 정치적으로 허용된 자들의 집단이다. 오늘 날과 비교하면 사설 용병집단, 권력과 결탁한 조폭 양아치, 청부 폭력· 살인집단에 가깝다. 물론 사람 나름으로 그렇지 않는 훌륭한 이들도 있겠지만, 정치적으로 허가된 인간말종들이 대다수다. 직접적으로 손에 더러운 것이나 피를 묻히기를 싫어하는 지배계급이 쥐고 있는 채찍이요, 당근으로 읽혀진다.


이와 비교하면 굳이 섣부른 민족의식, 소위 국뽕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네 선비정신은 그 격을 달리한다. 선비정신은  조선시대의 500년 지배체제를 유지, 존속 가능하게 한 실체적인 정신이었다. 실상이 그렇고 역사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우리  근현대사에는 지배체제의 필요에 의해 미화된 인물, 심지어 날조된 인물의 역사, 왜곡된 역사가 꽤 존재한다. 선비정신은 있을지언정,  양반정신이라는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양반은 사회 계급 신분의 호칭을 이르는 말인 까닭이다. 양반이라고 해서 모두가 선비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회계급적 의미를 지니는 양반과 인격적 자질적 의미를 내포하는 선비는 엄연히 다르다.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유교와 타락하고 무능한 양반과 썩은 선비들은 누구나 다 상식처럼 알지라도, 1919년의 파리장서 사건, 즉 이  땅의 참 선비들이 파리평화회의에 목숨을 걸고 유림의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사건은 수많은 우리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이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수많은 참 선비들이 옥고를 치르고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나라의 위기 때 마다 게급과 신분의 구별없이 어김없이 등장하는 수많은 순국선열지사들, 가까이는 김구선생, 안중근 의사 등 숱한 충열애국 독립지사들이 참 선비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출처는 잘 기억 나지는 않지만,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 不如一見)이요, 백견이 불여일각(百見而 不如一覺)이며 백각이 불여일행(百覺而 不如一行)이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즉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낫고, 백번 보는 것보다 한번 깨우침이 나으며, 백번 깨우침보다 한번 행함이 낫다"는 뜻이다. 남의 머리, 남의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직접 접해 봐야 비로소 그 실체의 진면모를 알기 마련이다.


권위에 의해 해석된 사실은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일반대중에게, 종종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진실이 가려지고, 실체가 미화되거나 곡해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온갖 선입견과 편견이 생성되는 지점 또한 여기다. 뿌리깊은 나무 바람에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무가 오랫동안 물에 잠겨 있으면 뿌리가 썩는다. 산불이 나면 나무만 불붙는 것이 아니라 땅도 불붙는다. 이때 나무의 뿌리도 타게된다. 마침내 물이 빠지거나 산불이 그치면, 물불을 다 견뎌낸 아름드리 나무라할지라도 웬간한 바람이 불어도 맥없이 쓰러지게 마련이다. 흙을 품어 나무를 지탱해 주는 뿌리가 상하고 썩은 까닭이다. 


뿌리깊은 식민사관 혹은 오리엔탈리즘 등의 일방적인 권위주의에 젖어 우리 것을 알려고 하는 일말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 태도는 위험하다. 아무런 비판의식없이 함부로 폄하하고 멸시하는 것은 마치 나무가 자기를 서있게 하는 뿌리를 스스로 물에 잠기게 하여 썩게 하고, 스스로 불을 붙여 타버리게 하는 것과 같다 하겠다. 뿌리가 없는 나무는 그저 도구나 재목에 불과할 따름이다. 조선 선비 정신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과 선입견은 과거 일제와 군부 독재 지배체제에 의해서 일반대중에게 강요되어 각인 되다시피한 일방적인 관점에 기인한다. 이른바 조선망국 책임론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나심 탈레브는 그의 특출한 책, 『블랙스완』에서 통찰하기를, '예측불가능한 일이 실제로 발생하면, 사람들은 온갖 이론들을 가져다가 마치 예측이 가능한 일인 것처럼 여기게 만들기 시작한다'고 하였다. 드러난 결과를 놓고 원인과 과정을 평가하고 판단하기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야말로 사후약방문이 아닐 수 없다. 총을 쏘고 난 뒤 총흔을 중심으로 과녁을 그리고는 스스로 명사수라 우기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다름없다. 


오늘 날, 외국의 기사도나 무사도가 명예롭고 고귀한 정신의 표상으로 미화될 수 있었던 그 이면에는 소수의 훌륭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무턱대고 부정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얼마든지 추측 가능한 일이다. 그 덕분에 다수의 실체적 민낯이 가려졌다고도 볼 수 있다. 그 반면에 우리 네 선현들의 고귀한 선비정신이 한낱 허례허식과 체면치레와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찬 썩은 양반정신으로 왜곡하여 매도되고, 지탄받는 대상으로 전락되고 만 것은, 다수의 무능하고 타락한 양반 계급 혹은 소수의 썩은 선비들이 크게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이렇듯 비슷한 사안을 놓고도 어떤 틀에서 어떤 방식으로 보고, 어떻게 이해하며 또 무엇을 부각시키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극과 극으로 달라진다. 이것을 '세상을 보고 읽는 틀', 다시 말해 '프레임 또는 프레이밍'이라고 한다. 선택심리학자인 쉬나 아이엔가(1991)는 ‘현실에 대한 여러 다양한 시각 중에서 특정 측면을 선택하고 특정한 관점으로 부각시키는 도구'가 바로 ‘프레이밍’라고 설명한다. 70년대 이후 사회과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생활에서 일상으로 접하는 것이 바로 매스미디어의 '뉴스프레임'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악용될 경우, 의도적인 선택과 강조라는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집단세뇌의 좋은 도구가 된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기사도와 무사도 정신 그리고 선비정신에 대한 모든 선입견 혹은 편견들이 지배세력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미화하기 위한 정치 문화적 프레임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씁쓸한 역설 중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중에서 더욱 역설적인 것은 그토록 우리 네 선비정신을 비하하고 폄하하면서도, 소위 실학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특정 선비들을 추앙하고 미화한다는 사실에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으로, 오늘 날 실학의 대표주자로 모두가 추앙하는 다산 정약용이 풍기는 사람 냄새와 율곡 이이, 퇴계 이황, 성호 이익, 남명 조식, 무명자 윤기, 존재 위백규, 영재 이건창, 연암 박지원, 혜환 이용휴, 청장관 이덕무, 추사 김정희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조선의 참 선비들의 글에서 풍기는 사람 냄새는 뭔가 다르다. 삶의 행적과 정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들이 남긴 글을 두루 살펴 볼 때, 개인적으로 느끼는 바가 그렇다는 말이다. 이런 저런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원리 원칙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마음에 품은 바른 뜻이 고귀해지는 것은 지행일치, 즉 삶의 실제적 행위로 드러나는데에 있다. 아울러 어떤 형편과 상황에 처할지라도 그 뜻이 일관성을 가지는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적어도 내 소견으로, 다산은 걸출한 천재 지식인, 특출한 지성의 표상은 될지언정 참 선비의 표상은 아니다.


어찌 되었건 간에 발에 채는 흔한 돌이 있어 보석이 비로소 가치를 가진다. 썩은 선비들 때문에 참된 선비들이 더욱 빛나게 마련이다. 자신이 세운 바른 뜻과 인간됨의 도리를 지키고자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물며 의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마저 아낌없이 내어주거나 포기하는 일은 더욱 그러하다. 썩은 선비들에게서 참된 선비정신을 찾는다는 것은 산속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격이다. 썩은 선비들때문에 참 선비들이 가려져서는 더욱 안된다. 

눈을 아래로 깔고 헛기침을 하며, 달을 해라 하고, 사슴을 말이라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예나 지금이나 사회가 썩어 부패하는 원인은 한결같다. 과거나 현재나 썩은 인간, 썩은 선비, 소인과 사이비는 사회의 암적 존재로 공공의 적으로서 존재하는 것 또한 한결같다. 백문이 불여일견, 즉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아무리 눈에 힘을 주고 부라린다 할지라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 덕분에 오늘 날의 경우, 지식의 영역은 과거처럼 특정 지식인들에게만 속한 폐쇄된 영역이 아니다. 누구든, 무엇이 되었건간에 알려고만 마음을 먹는다면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말이 되겠다. 지식이 개방된 공유의 영역으로 그 깊이와 폭이 날로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이 무지한 졸보에게는 정말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설같겠지만 어릴 적 한 때, 어린 자아가 풍선처럼 팽창되는 것을 느끼게 한 미야모토 무사시의 소설을 다시 떠올린다. 앞서 인용한 글을 복기해 본다. 

"사물을 보는 눈은 관(觀)과 견(見)의 두 가지 눈이 있다. 관(觀)의 눈'이라함은 상대방의 생각을 간파하는 마음의 눈을 말하며, '견(見)의 눈'이라함은 육안으로 상대의 현상을 보는 것을 이른다." 


고개를 빳빳히 치켜든 꼰대 향원들이, 요즘 남녀노소 무론하고 자주 보인다. 자신이 사회 경제적으로 특별한 사람이라, 사람 위에 군림하며 좀 더 많은 사회적  권리를 누리고자 하는 양반정신이 대세인듯 하다. 그러나 선비정신을 가진 참 사람, 참 어른을 보기가 힘든 세상이다.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가 수두룩하다. 이렇듯 워낙 세상 사회 현실이 복잡 다난 난해한지라, 사물을 보는 두 가지의 눈 모두가 필요한 시대가 아닐 수 없다. 내 스스로를 돌이켜 볼 때, 참 사람은 커녕 참 어른도 못된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그럴지라도 이 땅에서 더 이상 관념형이든 이념형이든 실용형이든간에 썩은 선비들과 북곽선생같은 향원류들이 알량한 양반행세를 하며, 득세하는 일은 부디 없으면 하는 신기루같은 바램을 가져 본다. (20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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