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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16. 2017

개주소

"개념은 어떠한 현상에 대한 지적인 이미지로서, 어떤 사물이나 활동에 대하여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 혹은 구상과 같은 것이다.  개념은 이론을 구축하기 위한 벽돌 즉, 지적인 구조물이라 할 수 있다.  개념은 언어를 통해 표현되며,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생각에 대해 의사소통하는 데 이용된다. 자신의 생각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키려고 할 때, 또는 아주 새로운 어떤 것을 정의하려고 할 때 그 개념이 정의되어 있지 않으면 의사소통 즉, 서술 및 설명에 곤란을 겪게 된다. "(Walker& Avant, 'method of concept analysis', 1995)

웬간한 사람이라면, 자기 생각이나 뜻을 말로 드러내는 데 그리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만일 이해관계를 같이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쉽다. 관계가 가깝고 친밀할수록 그와 비례하여 더 쉬워진다. 짧은 의사표현 혹은 간단한 몸짓만으로도 통하기 때문이다. 물론 외부적으로 억압된 통제 상황이나 환경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그렇다. 만약 그 대상이 나와 관계가 먼 제 3자인 개인 혹은 불특정 다수라면 달라진다.  비록 말로써 의사표현을 할지라도 내 생각이나 뜻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도 분명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글로 표현하기란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글로써 이해시킨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왜 그럴까? 마땅히 의문을 가져볼 만한 일이다. 


이러한 의문은 의사소통 이론에서 이해가능한 설명을 찾을 수 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의사소통에서 언어(음성, 문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10%에 불과하다. 의사소통의 90%가 비언어적 의사소통이 차지한다. 여기에 더하여 사회적 맥락, 환경적 맥락, 장소 및 관계적 맥락등도 의사소통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비언어적 의사소통은 대체로 동작언어를 말한다. 동작언어란 표정, 음성, 눈맞춤, 태도, 몸짓, 접촉 등등 표현에 잇따르는 일련의 행동들이다. 흔히 말하는 보디랭귀지(몸짓) 즉 신체언어다. 그 기능은 음성언어가 지식정보를 전달하고, 동작언어는 주로 감정적인 정보를 전달하는데에 있다. 특별한 경우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미세한 신체언어는 인간의 거짓말을 탐지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통상적으로 말로는 어렵지 않은데, 글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감정정보를 전달하는 동작언어와 같은 비언어적 요인이 배제된 까닭이다. 즉 의사소통의 90%를 차지하는 비언어적 요인을 문자 언어로  온전히 표현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 되겠다. 


흔히 언어를 이해할 때 가장 필수적인 것은 ‘개념(槪念)에 대한 이해'라고 말한다. 비언어적인 요인을 문자로 표현하는데에 어려움이 따르는 이유가 여기서 찾아진다. 즉 개념에 대한 이해부족, 개념의 부재에 있다. 언어를 문자로 표현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가, 바로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사물, 사건, 상황, 현상 등이 가지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단어사전이나 백과사전은 개념이해의 가장  필수적인 기본 도구라할 수 있다. 물론 관련된 다양한 글 자료의 확보 및 독서와 이해는 글쓰는 이에게 당연한 절차다.


사전을 찾아보면, 개념이란, "1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 2 .사회 과학 분야에서, 구체적인 사회적 사실들에서 귀납하여 일반화한 추상적인 사람들의 생각(사회). 3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된 요소를 뽑아내어 종합하여서 얻은 하나의 보편적인 관념. 언어로 표현되며, 일반적으로 판단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나 판단을 성립시키기도 한다(철학)."<네이버 사전>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보편적인) 지식'이 바로 개념이다. 가령 나무를 표현한다고 하자. 눈으로 보는 나무는 현상으로 확인되는 실체다. 그렇지만 눈으로 보지 않아도, 실체를 현상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을지라도, 아주 간단한 표현만으로도 남녀노소, 학식유무와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나무'라고 인지하는 것은 나무의 실체가 아닌 나무라는 '개념'이다. 비록 수식을 각기 달리할지라도 그렇다. 이러한 나무의 개념은 나무를 다른 사물과 분명하게 구별짓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개념은 어휘 (문자, 단어)속에 담겨 있는 보편적인 지식, 그리고 느낌, 생각등의 관념과 대체하여 이해할 수도 있다. 지식, 느낌, 생각, 관념등을 글로 표현하는 어휘(語彙)가 가진 개념은, '어떤 일정한 범위 안에서 쓰이는 단어의 수효. 또는 단어의 전체'를 뜻한다. 즉 대상을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각각의 단어를 포함하는 전체를 의미한다.  


말하고자 하는 현상을 적확하게 표현하는데 필요한 어휘와 보편적인 지식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즉 개념없이 말을 글로 표현하는데에 당연히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개념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의사를 글로써 남을 이해시키기란 그리 쉬운일 아니다. 역으로 타인의 생각이나 뜻을, 자기 입맛대로 왜곡하여 이해하는 인지적 혹은 논리적 오류의 덫에 빠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휘와 지식은 배우고 익히는 방법이외에 별 다른 방도가 없다. 이런 점에서 적극적 독서는 주요한 관건이 된다.


이처럼 개념은 서두에 인용한 문장의 표현처럼 '지적구조물' 이요, 머리속에 새겨진 '지적 이미지' 다. 언어로 문장을 표현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사고의 틀’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학술논문에서 주장하는 바 이론을 설명하기에 앞서, 이론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여러 특정 개념들, 즉 용어의 정의(正意) 부터을 가장 먼저 세세히 고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념은 그냥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배움이나 경험 등을 통해 구체화되고 체계화된다. 


그런데 개념이 '보편적인 지식'이요, 의사소통의 중요한 한 구성 요소요, 수단이며, 또 자기를 표현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사고의 틀'이라면, 왜 사람들마다 천차만별의 다른 의견, 다른 표현, 다른 생각을 가지는 것일까? 의문을 가져볼만 하다. 그 이유는 개념이 확정적인 것, 또는 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개념을 기본 틀로 하되 어떻게 표현되는가의 문제는 그 개인의 자유의지와 학습된 지적역량, 다시 말해 식견에 좌우되는 까닭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떻게 알고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같은 단어인 자유를 떠올리면서도, 각자의 관점, 가치관, 세계관, 사회적 시대적 추세와 경향, 정서, 취향, 이해관계등에 따라 여러 다른 생각, 해석들이 있을 수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개념이 바르게 정립되지 못한데에 있다. 


"지역마다 적당량의 개념을 주입해 주는 개주소(개념주유소) 시설이 있었으면 좋겠다. 개념이 없는 인간들이 인터넷에 접속하면 자동으로 하드가 절명해 버리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었으면 좋겠다."(이외수, '하악하악:이외수의 생존법', 해냄출판사, 2008)


흔히 젊은 층에서 '개념없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본다. 이는 개념이 가진 본래 의미와는 달리, 주로 예절, 에티켓 등과 연관하여 '버릇이 없다'는 말로 사용된다. 인용한 이외수 작가의 글도 마찬가지다. 만일 어느 정도 학식이 갖춰진 사람으로부터 이 말을 듣게 된다면, 이는 '무식하다'는 뜻으로 더하여 이해해도 된다. 여튼 개념정립은 부단한 배움과 익힘 이외에는 왕도가 달리 없다 하겠다. 이 글도 개념정립을 위한 나름의 발버둥이라 하겠다. 


요즘 가끔 책을, 거기다가 인터넷상의 남의 글을 읽으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글들이 의외로 많이 보인다. 내 알량한 글취향 탓도 분명 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몇 문장의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애매모호한 짝퉁 하이쿠류의 글들은 건성으로 본다. 때문에 여기에 문제는 없다. 한 눈으로 보고 '아하!' 하곤, 금새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해하기 그지없는 시(詩)들과, 생소한 외래어들의 비문(非文)으로 가득찬, 어려운 문학 평론 글들은 아예 보지 않는다. 이해를 도와주어야 할 해설이, 비평이, 평론이 모호하거나 난해한 것에 대해선 두말 할 것도 없다. 때론 이들의 글을 가혹하게 평론하고 싶은 마음도 들긴 한다.  


문제는 내 지적호기심과 관심을 이끄는 내용과 주제의 깊이 있어 보이는 글들이다. 이런 글들은 대부분 숙독을 시도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글들과 종종 마주친다. 특정 사상이나 이론의 이해된 사전지식이 없으면 납득이 잘 안되는, 일종의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순환논증의 오류)'에 막혀 버리기도 한다. 글을 통하여 작가 혹은 필자 의견이나 감정 혹은 정서를 수용하거나 공감하고 배움을 갖기 이전에, 드러내고자 하는 말의 주된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 자체가 애매모호하니 문제라 하겠다. 뜻이 궁금한 어려운 단어를 애써 사전에서 찾았는데, 더 어려운 단어와 글로 설명된 해석과 맞닥뜨린 경우와 같다 하겠다. 이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내가 개념이 없기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태생적으로 내 머리가 둔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배움과 익힘은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아둔한 머리로도 잘 안다. 어쩌면 누워 침뱉기일지도 모른다. 글로써 내 생각을 남이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쉽게 표현하는 것은, 내게는 늘 어려운 까닭이다. 게다가 남의 글마저 쉽사리 이해할 수 없으니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의 '개념부재'로 원인을 돌린다. 솔직히 말하자면, 타인의 정서 생각 등에 대한  '공감력의 결여' 라는 소시오패스를 연상케 하는 표현, 또는 스스로 '무식하다'고 인정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튼 인용문으로 내세운, 이외수 선생의 짧은 푸념에 공감이 간다. 공감이 가는 것은, 작가가 그동안 겪었던 실상을 여러 매체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아는 까닭이다. 그런데 개주소가 절실한 것은, 때로 개념이 없다고 여겨지는 나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알량한 내 개념 밑천이 바닥이 드러났을 때, 수시로 개념주입을 할 수 있는 편리한 개념주유소 말이다. (201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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