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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16. 2017

내 안에 짐승이 산다

"내 안에 늙지 않은 짐승이 산다. 그놈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쓴다. 어떤 때는 그놈이 하는 말을 받아 쓰기도 한다. 그 놈의 다른 이름은 '창조적 자아'다."(박범신, 엡북 '힐링', 마더커뮤니케이션 2016)


마음에 욕구나 욕망이 없는 인간은 없다. 만약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몽상가 아니면 천성적인 거짓말쟁이다. 혹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흔히 욕구나 욕망을 같은 의미로 혼용한다. 내가 그렇다. 하지만 연구자들에 따르면, 욕구와 욕망을 구별한다. 욕구는 주로 생리적 요구, 욕망은 정신적 요구로 그 개념을 달리 해석하고 있음이 찾아진다. 이는 '결핍'과 '부족'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결핍(缺乏)은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거나 모자람'을 뜻한다.  부족(不足)은 '필요한 양이나 기준에 미치지 못해 충분하지 아니함'이라고 나와 있다. 


다시 말해,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생리적 요구가 바로 욕구다. 반면에 뭔가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여 그 부족함을 채우고자 하는 정신적 요구가 곧 욕망에 해당된다. 가령 배가 고프다는 것은 분명한 생리적 요구다. 그런데 배고픔을 채우는 음식의 내용과 질, 그리고 그 주변환경과 장소의 고려까지 여기에 개입된다면, 그것은 정신적 요구에 해당된다. 전자는 욕구, 후자는 욕망이다. 


그런데 결핍으로 인한 인간의 욕구는 어떻게든 충족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정신적 요구인 욕망은 그리 간단하지 못하다. 욕구는 한번 결핍을 충족시키면 결핍상태에 이르지 않는 한, 유발되지 않는다. 반면에 욕망은 아무리 채워도 만족한 상태에 이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욕구가 브레이크가 있는 열차라면, 욕망은 브레이크가 없는 열차다. 


욕망이 정신적인 요구라 함은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한, 자신이외에는 아무도 그 욕망의 내용이나 실체를 알 수가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문제는 자아가 그 욕망에 일방적으로 도덕적 가치관의 잣대를 갖다대는 경우에 발생한다. 이러한 잣대에 따르면, 내가 가진 욕망이 때로는 그냥 의식하기에는 너무나 부정적이고 비도덕적이고 사악하고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때 마음의 내면에서는 억압이라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억압은 내면의 갈등이나 문제를 의식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도저히 용납할 수도 없고 또 견뎌낼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경험이나 기억, 생각 등은 잊어 버리는 게 가장 손쉬운 심리적 회피 방법이다. 잊고 지내는 동안만큼은 최소한 내면의 갈등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주기때문이다. 더우기 술이나 기타 약물 또는 여러 중독적인 일에 자신을 내던져 몰두함으로써 잊어버리는, 극단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선택보다는 월등히 합리적이다. 심리적으로 당면한 부정적인 현실과 타협하게 하거나 또는 순응하게 한다. 이게 무의식이 연약한 자아를 보호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여기엔 문제가 존재한다. 가령 장마철에 지붕에 구멍이 나서 새는 비때문에 밤새 잠을 설쳤다고 상상해 보자. 마침내 아침에 비가 그치고 잠시 날이 개자, 간밤에 비가 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경우와 같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완전히 두뇌속에서 어떤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을 망각이라고 한다. 혹자는 망각을 신이 내린 축복 또는 진화의 결과물로 최적의 인간 생존을 위하여 설계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일반상식과는 달리, 최근 연구자들에 의하면, '어떤 일에 대한 정보가 일단 장기 기억의 형태로 저장되고 나면, 망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단 정보로 저장된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다만 뇌에 특별한 손상을 입지 않은 한 기억을 꺼집어 낼 때의 어려움은 있다.'고 한다. 


망각은, 단기기억의 상태, 즉 자꾸 되새기지 않으면  20~30초 이내에 소멸되는 일회성 기억 정보에 주로 해당된다. '일회성 기억'이라함은 시간과 공간이 맥락을 가진 사건에 관한 기억이다. 이와 관련하여 시간적, 공간적 맥락과 상관없는 것들, 가령 개념, 낱말, 지식 등에 관한 기억을 '의미성 기억'이라 한다. 예를 들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다음 날, 영화의 내용이나 당시의 느낌 등은 기억해도 옆자리의 사람이나 팝콘을 팔던 영화관 종업원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한다. 전자가 의미성 기억, 후자가 일회성 기억에 해당된다. 만약 거의 매일 가는 영화관 단골이라면, 종업원 얼굴은 기억할 수 있다. 반복된 기억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단기기억의 정보가 장기기억의 상태로 진행되려면 기억정보에 의미부여가 되고 의지적으로 상당한 시간동안 되새김(반복)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경우를 상상해 보면 되겠다. 


억압된 기억이 문제가 되는 것은, 부정적인 감정과 함께 오랜 시간 반복 축적되어, 여전히 무의식 속에 장기기억의 형태로 남아 있는데에 있다. 억압이 망각과는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기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정보를 그대로 보존하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잊어버린 듯 하다가도, 상황과 조건이 맞는 경우에 어김없이 작동한다. 무의식에 남아 있는 부정적인 감정이 현실적으로 태도나 행동에 간섭하고 영향을 끼치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현실 적응의 관점에서, 억압을  '무의식적 방어기제'라는 용어 대신에 '신경증적 적응기제'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억제다. 억제는 내면의 갈등과 모순을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적절하게 조절하고 자제하려는 심리적 적응기제다. 그래서 억제를 '성숙한 적응기제'로 분류한다. 억제와 억압의 차이는 의식하고 있느냐, 못하느냐의 차이다. 의식하고 있기때문에 자기 통제와 조절이 가능하고, 의식하지 못하기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차이다.


내면적인 갈등이 양심 또는 외부적인 것과 갈등을 일으킬 때, 누구나 억압과 같은 신경증적 적응기제를 부지불식간에 선택한다.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 또는 가치관이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 수록 사람들은 누구나 신경증적인 적응기제를 사용하기 마련이다. 여기엔 예외가 없다. 내적 갈등에 대처하는 쉬운 심리적 대응방식은 의식적으로 무시하거나 부정함으로써 현실 상황에 자기를 맞추는 일이다.  


하지만 내면의 갈등은 여전히 감정과 함께 존재한다. 이러한 까닭에 신경증적인 적응기제에 익숙한 사람들의 모습은 경직되어 보이기 마련이다. 어쩌다가 자기 몸에 맞지 않은 불편한 옷을 입고 공개적인 모임에 나갔다고 가정해 보면, 상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째튼 그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상태는 오직 본인만이 안다. 감정은 적절한 방식으로 제대로 표출되고 해소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 무의식적인 방어기제 혹은 신경증적 적응기제가 작동함으로써 문제를 축적시킨다. 


정리하자면, 억압은 스스로 금지하고 차단시킨 욕망이나 감정, 충동을 무의식 속에 감추어 놓고 마치 없는 것처럼 아닌 척 행동하는 것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동시에 의식적으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억제라 하겠다. 따라서 억압과 억제는 한 개인의 정신적인 건강을 가늠하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 


월초에 꾼 꿈이 하도 생생하여,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다. 해서 억압에 관한 이론적인 배경들을 찾고 나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꿈은 내게 말해준다. 다름아니라 신경증적인 적응기제인 억압에 내가 익숙하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내가 가진 충동, 감정, 욕망 등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하고 있다고 가리킨다. 이는 현재 내가 정신적으로 그리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하나의 반증이기도 하다. 정리하는 글이 일관되게 말하고자 하는 방향도 그렇다. 내 문제가 욕구보다는 욕망에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더욱 그렇다. 결핍보다는 부족함을 채울 수 없는 것에 있다. 하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있는 까닭이다. 


내가 가진 욕망으로만 따지자면, 나는 그리 선하지도 그리 도덕적인 인간도 그리 좋은 인간도 아니다. 또한 그리 정의롭지도 못하다.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인 인간은 결코 못된다. 다만 바라는 것을 척할 뿐이다. 단지 욕망할 따름이다. 안 그런 척 속이고 감추는 것은 의식적으로 일상의 내가 한다. 그러할지라도 끊임없이 적나라한 내 실체를 드러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내 무의식이다. 나는 속이고 감추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내 무의식만큼은 정직하고 솔직하다. 내가 세상과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내가 나를 속인 다는 것은 단지 착각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내게 남겨진 숙제는 무의식에 휘둘리는 '억압'이라는 신경증적 적응기제를, 스스로 조절 통제할 수 있는 '억제'라는 성숙한 적응기제로 어떻게 자리바꿈할 것인가에 있다. 내가 때때로 맺힌 것들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이러한 잡글로 풀어내는 것도. 어쩌면 내 나름으로 가지고 있는 자기억제의 한 방법이 아닐까 애써 자위해 본다. 어쩌면 평생 풀어가야할 숙제일지도 모른다.


서두에 인용한 글을 다시 눈여겨 살펴 본다. 인상적인 글이라 그 부분만 옮겨왔다. 서두의 인용글에는 생략했지만 문장의 뒤에 이어지는 짧은 글과 연관지어야 비로소 저 문장이 이해가 될 수 있다. 이어지는 글이 포함된 전체는 이렇다.


"내안에 늙지 않은 짐승이 산다. 그놈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쓴다. 어떤 때는 그놈이 하는 말을 받아 쓰기도 한다. 그 놈의 다른 이름은 '창조적 자아'다. 스탕달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 나는 오로지 "살았다, 썻다, 사랑했다"라고 너무 오만한가." (박범신, 엡북 '힐링', 마더커뮤니케이션 2016)


결국 서두에 인용한 문장은 얼개만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자아개념을 차용했을 뿐이다. 내면적 갈등의 적나라한 자기 고백과는 하등 상관 없는 말이 되겠다. 나름 생각하기로는 작가가 오히려 자기가 욕망하는대로, 즉 작가라는 '창조적 자아'로 마음껏 살았다는 자아팽창적인 자기고백 내지는 자기변명으로 이해해 본다. 자아팽창과 창조적 자아는 얼핏 비슷한 내용인듯 하나, 실제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개념이다. 자아팽창은 요샛말로 중2병을 연상하면 되겠다. 하지만 나는 역설적이게도 노(老)작가의 수사학적인 저런 오만에 냉소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부럽게만 여겨진다. 이게 내가 가진 욕망의 한 단면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렇듯 욕망은, 모습만 달리할 뿐 끊질기고 집요하다.


공부를 핑계삼아 이왕 의식의 바깥으로 내 욕망을 에둘러 드러낸 김에, 인용한 문장을 표절하여 내 나름의 심정으로 다시 표현해 본다. 


"내 안에 짐승이 산다. 

그 놈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써 딴 데를 보곤 한다. 

그래도 귀는 열려 있어서 

어떤 때는 그 놈이 하는 말이 솔깃할 때도 있다. 

그 놈의 다른 이름은 '욕망' 이다."(2017.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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