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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09. 2017

우연과 필연

"허구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 허구가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지식은 양심에서 나오지 않고, 그 양심이 다루는 환경에서 나온다. 사람들이 정보의 원칙에 따라 행동할 때, 그들은 사실을 찾아내고 지혜를 사용하려고 밖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들이 그 원칙을 무시할 때 그들은 스스로 내부로 들어가 그 안에 있는 것만 찾는다. 지식을 늘리는 대신 자신의 편견을 갈고 다듬는 것이다."-월터 리프먼, '여론'(1922)-

우리 속담에 '제 버릇 남 못준다'는 말이 있다. 중국 속담에도 '개가 똥 먹는 버릇 고칠 수 없다(狗改不了吃屎)'라는 비슷한 의미의 말이 있다고 한다. 최근 안타깝고 염려되는 국가적 사회적 정치적 사건 사고들을 대하는 일부 언론들의 보도 행태들을 접하면서, 문득 떠오르는 말들이다. 


논리적 오류에서, 무작위로 발생한 데이터에서 유사점을 보이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집어내고, 잘못된 추리를 전개하여 부정확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을 가리켜,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라고 한다. 그 비유로 헛간의 판자에 무작위로 총을 쏜 후 총알구멍이 밀집된 곳을 중심으로 과녁을 그려놓고, 자신이 명사수라 과시하고, 허세를 부리는 텍사스의 시골 카우보이를 예로써 비유한 것이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믿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심리적 경향에서, 작위적으로 우연을 필연이라 확신하고 또 착각하는 대표적인 논리적 오류다. 특히 역사인식이나 사회인식에서 이러한 오류는 마땅히 걸러져야 하고 경계해야 한다. 


영국의 정치가로 역사학자이기도 한 E.H 카는,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라고 말한다. 우연과 필연은 분명 다르다. 사전을 찾아보면 우연은,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한다. 필연은,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는 일. 틀림없이, 꼭.'이라고 나와 있다(다음 사전).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사전적인 의미만으로도, 우연과 필연은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다. 다만 필연의 의미에는,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가 전제되어 있음을 기억할 필요는 있다. 


그런데 막연하게 인과관계로 필연과 우연을 구분하려 시도한다면, '세상 사물에 원인 없는 결과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숙명론 또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식의 진위여부를 명확하게 판가름할 수 없는 전형적인 불가지론에 걸리고 만다. 필연은 단정 지어 정의할 수는 있지만, 우연은 그렇지 못하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의 존재 여부가 항상 뒤따르기 때문이다. 


우연과 필연을 가르는 가장 분명한 경계선은 '반드시'라는 전제에 있다. 어떤 상황에든지 '반드시, 틀림없이, 예외 없이' 등의 서술형 부사를 붙여서 뜻이 통한다면 그것은 필연이다. 필연은 이렇듯 분명한 메타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령, '사람은 죽는다'는 필연이다. 사람은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반면에 원인과 과정에 따라 결과가 이럴 수도 있거나 아니면 저럴 수도 있는 수많은 가능성 또는 변수가 있을 수 있는 상황이나 현상은 '필연'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가능성을 지닌 우연을 필연으로 믿고 싶어 하는 심리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쩌면 필연은 텍사스 명사수처럼 각자가 바라는대로 만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을 만난 것은 필연이다.' 이런 말은 흔히들 하거나 혹은 듣는다. 특별한 관계라 생각되는 지점에서 특히 그렇다. 이렇게 생각하고 싶은 것은 보통 사람의 심리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갈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한갓 스쳐가는 수많은 인연 중의 하나, 혹은 필연적으로 혐오하거나 미워할 수밖에 없는 추한 인간 군상들 중의 하나에 불과한, 뜻밖의 우연이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렇듯 필연과 우연의 가름은, 인과관계보다는 오로지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하느냐는 자기 의지에 달려 있다고 이해해도 되겠다. 


유시민은 그의 책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이야기'(푸른 나무, 2010)에서 '필연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에서 '필연성'이란 어떤 현상이나 사건 사이의 '불가피한 인과 관계'를 의미한다. 어떤 현상이나 사건이 '반드시' 다른 현상이나 사건을 불러일으킬 때 우리는 앞의 것을 '원인'이라 하고 뒤의 것을 '결과'라 하여 둘 사이에 인과관계를 세운다... 지나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역사적 사건의 진짜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외면하려고 하는 사람들일수록 '우연의 역사'를 신봉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를 우연한 사건의 연속으로 파악하는 한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서 일반적인 인과관계, 다시 말해 어떤 사건이나 현상이 반드시 다른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초래한다는 법칙을 찾을 수 없다."라고 논한다. 특히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에 익숙한 사람들의 심리적 기저를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는 진짜 원인과 전개 과정을 아예 무시하고 단지 결과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나온 맞춤형 결과물이다. 그 본질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대로 우연을 필연으로 믿고 싶고, 또 그렇게 보고 싶은 데에 있다. 텍사스 명사수들의 총질은 그 과녁이 오로지 한 방향에 집중하지만, 정작 총알은 불판에 팝콘 튀듯 사방으로 어지러이 난무한다. 어제 말 다르고 오늘 말 다르다 할지라도 오직 과녁을 멋지게 그리는데 집중할 뿐, 총질하고 입질하고 또 삽질까지 하는 명사수 카이보이에게 자기반성 혹은 성찰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자기의 양심보다는 세상의 눈을 더 의식하고, 자기가 가진 총의 위력을 더 과신하는 까닭이다. 


이는 곧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상황, 사건, 사고의 본질적인 문제나 진짜 원인을 분석하고, 거기에서 교훈을 찾고, 반성하고, 성찰하고, 또 실질적인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참된 지성을 찾아보기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참된 지성을 찾는다는 것은 마치 백사장에서 잃어버린 반지 찾는 것과 다름없다. 


아무리 논리가 그럴듯하고 옳은 것 같을지라도, 실체를 확인하고 검증할 방법이 없는 추상적인 것 또는 앞과 뒤가 다른 것, 우연을 필연으로 끼워 맞추는 것, 사실과 허구를 뒤섞은 것, 혹은 말할 수 없는 것을 사실로, 진실이라 확신하며, 진리를 안다고 주장하거나 강요하는 부류들은 분명 사이비일 가능성이 크다. 내가 어릴 적 만들어 놀던 공기 딱총이 생각이 난다. 그 총알은 입으로 잘근 잘근 씹어 만든 종이 총알이다. 맞으면 따금하긴 해도 구멍은 커녕 자국조차 나지 않는다. 과녘은 중요치 않다. 딱총의 백미는 명중률보다는 예상할 수 없는, 깜짝 놀랄만한 큰 소리에 있는 까닭이다.


사이비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듯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주 다른 것'이라는 뜻으로 '진짜처럼 행세하지만 실제로는 진짜가 아닌 가짜'를 의미하는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속 빈 강정 같은 알량한 소갈머리에 불과한 나도 결코 사이비의 범주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알량한 내 주제를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다만 배움에 욕심을 부릴지언정,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것들,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확신이 안 서는 것들과 믿지 않는 것들을 타인에게 함부로 강요하거나 가르치려들지 않는다는 그 차이일 뿐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서경(書經) 열명(說命)에 이르길, '배움이란 뜻을 겸손히 갖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겸손은 오직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시작은 그럴듯하게 옳고 아름답고 훌륭해 보이지만 마지막의 결과가 다른 것, 처음과 끝이 어긋나는 것을 가리켜 '이단'이라고 한다. 사이비와 이단은 궁합이 아주 잘 맞는 듯하다. 특히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전 우주가 나서서 다 같이 도와준다"라고 공언했던, 503의 주변에 알게 모르게 정치적, 종교적, 사이비와 이단들이 파리 떼와 구더기처럼 들끓듯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가끔은 우연을 필연으로, 심지어 필연을 우연으로 착각할 때가 더러 있다. 아예 '필연'이라 믿으며 여지껏 살아 온 것들도 허다하게 있다. 헛 다리, 헛 발질도 곧잘 한다. 때론 나홀로 헛물도 켜고 착각도 하며 심지어 오해도 곧잘한다. 대부분 생각만으로 그쳐서 그나마 다행일 따름이다. 


'자연법칙에는 '우연'이 들어 설 자리는 없다'라고 한다.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 어쩌면 우연과 필연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인간 스스로 믿고 싶은 대로, 혹은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그 자리를 수시로 바꿔가며 이용할 뿐이다. "원칙을 무시할 때 그들은 스스로 내부로 들어가 그 안에 있는 것만 찾는다. 지식을 늘리는 대신 자신의 편견을 갈고 다듬는 것이다."  이 말은 20세기 초 미국의 언론인이며 정치평론가로 풀리처상을 수상한 월터 리프먼의 통찰이다. 리프먼의 일침이 따끔하게 내게 다가온다. 어쩌면 나 역시도 어설픈 텍사스 카우보이와 같이, 때때로 필연을 창작하고 때로는 우연을 가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기 때문이다. 


작금의 현실에서 사회라는 과녁에 총질하며 '우연' 혹은 '필연'을 제 입맛대로 재단하고 창작하는 자칭 텍사스 명사수 제위들에게, 지금 내가 배설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백무산 시인의 시구절로 대신한다. "저 개는 지가 개가 아닌 줄 아는 모양이다 /개에게는 저 짓이 생존의 방식이라지만/ 개는 자신이 개임을 부정해야 개밥 먹을 수 있다지만/ 이런 인간들이 도처에서 콩당콩당 뛰고 있다"(백무산詩, '뒤에서 바람 부니' 부분). (2017.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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