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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09. 2017

진짜와 가짜

“생생한 꽃들일수록 슬쩍 한 귀퉁이를/손톱으로 상처 내본다 가짜를 사랑하긴/싫다 어디든 손톱을 대본다.”


김경미 시인의 詩, ‘생화’의 부분이다. 눈에 보이는 꽃이, 눈에 들어오는 꽃이 너무 생생하고 아름다워 문득 의심이 간다. 그 의심의 이유가 오로지 생생한 아름다움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손톱으로 꽃에 슬쩍 상처를 내 본다. 아름다운 꽃이 조화인지 생화인지를 손톱으로 쓰윽 긁어 확인해 본다. 그 아름다움에 선뜻 취해 진짜가 아닌 것을, 행여 가짜를 사랑하면 어쩌나, 행여 껍데기와 사랑에 빠져버리면 어쩌나...그 심정이 헤아려진다. 드러내지 않는 시인의 상처가 마음으로 더듬어진다. 


조화는 상처도 아픔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오직 살아 있는 것들만이 상처에 반응하고 느낀다. 요즘 조화는 긁어 상처를 내면 생즙까지 나올 정도로 기술이 발전했다고 한다. 겉으로만 봐서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가 날로 더 어려워진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완벽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것은 예술작품에서나 존재한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공들여 만들었기에 그럴 수 밖에 없다. 완벽한 조화를 이룬 것은, 공장의기계로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찍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생생한 진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물건이든 사람이든 자주 가짜에 진짜처럼 속는다. 상품이든 예술작품이든 문학이든 사람이든 진짜를 능가하는 가짜들이 지천에 늘려 있다. 아름다운 진짜와 진짜보다 더 아름다운 가짜를 전문적으로 감별하는 특별한 기능이, 전문직종으로 자리매김할 정도다. 가짜가 유일하게 승부를 거는 지점은 겉으로 보이는 이상적인 조화와 정교한 아름다움에 있다. 


그중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구별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아무리 심리전문가라 자부할지라도 결과를 보고 여러 패턴들을 종합하여 설명할 수는 있을지언정, 사람의 마음을 쉽게 예단하기란 정말 힘들다. 가슴을 갈라서 열어봐도 소용없다. 아름다운 것을 무기로 하여 좋은 것을 빌미로 삼아, 칭찬하는 말, 거룩하고 고상하고 좋은 말, 사랑한다는 말, 믿는다는 말, 당신밖에 없다는 말, 변치 않겠다는 말, 기타 등등 달콤한 말일수록, 우리는 가짜의 침범에 어찌할 방도 없이 마음이 움직이고 열린다. 왜 그럴까? 왜 안다고 하면서도, 속지말아야지 하면서도 번번히 가짜에 이끌리고 마는 것일까. 의문을 가질만 하다. 


이에 대해, 연암 박지원 선생은 진짜는 겉이 아닌 속에 있는데, 겉에서 자꾸 비슷한 것을 찾는 까닭이라 단정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찌 구태여 비슷한 것을 구하려 드는가? 비슷한 것을 구하려 드는 것은 그 자체가 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천하에서 이른바 서로 같은 것을 말할 때 ‘꼭 닮았다(酷肖)’라 일컫고, 분별하기 어려운 것을 말할 때 ‘진짜에 아주 가깝다(逼眞)’라고 일컫는다. 무릇 ‘진(眞)’이라 말하거나 ‘초(肖)’라고 말할 때에는 그 속에 ‘가(假)’와 ‘이(異)’의 뜻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천하에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전혀 다르면서도 서로 비슷한 것이 있다. 언어가 달라도 통역을 통해 의사를 소통할 수 있고, 한자(漢字)의 자체(字體)가 달라도 모두 문장을 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외형은 서로 다르지만 내심은 서로 같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마음이 비슷한 것(心似)’은 내면의 의도(마음에 담긴 뜻)라 할 것이요 ‘외형이 비슷한 것(形似)’은 피상적인 겉모습이라 하겠다(心似者志意也 形似者皮毛也)."<연암집,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


연암 선생은 눈에 보이는 것은 겉모습 껍데기에 불과하니, 내가 찾고 있는 진짜와 비슷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에 속지 말라고 강조한다. 진짜는 겉이 아닌 보이지 않는 속에 있다. 완벽한 조화와 아름다움을 갖춘 것으로 보이는 것은 참이 아니다.  참이라 생각하고 바라는 것과 비슷한 것일 따름이다. 진짜는 내가 생각하는 바 외형이 비슷한 것에 있지 않다. 비록 정교하고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비록 투박할지라도 내가 바라는 것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 진짜라는 말이 되겠다. 인지왜곡이나 인지부조화 이론이 상품광고나 홍보전략, 예술작품 이해 등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누군들 아름답고 좋고 완벽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내가 가진 결함을 많이 느낄 수록, 물질과 사람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메꿔줄 완벽한 대상을 바라고 꿈꾼다. 하지만 내적 결함은 스스로 극복하거나 메워가는 것이지, 결코 나 아닌 다른 것들이 대신해서 채워 줄 수는 없다. 밖의 것으로 안을 채울 수는 없는 법이다. 특히 사람에 있어서 결함이 없는 인간은 없다. 인격적으로 완전하거나 완벽한 인간 또한 없다. 내가 원치않는 결함과 결함, 결핍과 결핍, 허물과 허물이 만나면 그 량이 배가 되거나 증폭할 따름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재래 된장처럼 사람은 오래 겪고 묵어 봐야 그 맛을 안다. 세월이 지나고 상황이 변해봐야 비로소 그가 한 말이 진심이었는지, 그 사람이 진짜였는지 알 수 있다. 나무의 뿌리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이 마음에 바로 새겨진 뜻, 진짜 정(情)은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바뀌어도 쉬이 변치 않는다. 사랑의 뿌리는 신뢰와 의리로 지탱된다. 만일 사랑이 변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수시로 변하는 욕구 내지는 욕망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랑으로 생각하고 바라고 싶었던 그 무엇일 수도 있다. 


만약 이 사람에게서 나는 맛이나 저 사람에게서 나는 맛이나, 그게 그거라면 가짜일 확률이 높다. 그 맛이 그 냄새가 사람의 마음을 온통 끌어당기는 완벽한 아름다움이나 이상적인 조화를 가지고 있다면, 마땅히 의심해봐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똑같이 추구하는 맛이요, 멋이요, 또한 바램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는 결코 도전하거나 모험해 볼만한 차원의 것이 아니다.  시인은 그 아픔의 참맛을 알기에 내색하지 않고 의뭉스레 미리 쓰윽 긁어 본다. 어떤 사람에게서 비록 재래식 된장처럼 보기에도 그렇고 냄새도 그렇다 할지라도, 비록 결함이 다소 드러난다 할지라도, 꾸미지 않고 우러나오는 것에서 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독특한 냄새와 자연스러운 맛이 있다면, 그는 진짜다.


하지만 속 마음에 담긴 뜻을 살핀다는 것은 시간을 요하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일일이 분석하면서 살 수는 없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사람의 깊은 정이란 시간을 두고 겪어봐야만 안다. 말로 표현한다고 글로 드러낸다고 그것을 다 알 수는 없다. 더욱이 멋지게 치장한 프로필이나 대단한 명함 혹은 인증샷 하나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진국은 끓여봐야 우러나오는 그 냄새와 맛으로 비로소 안다. 어찌 되었건 사람은 오로지 직접 겪어봐야만 알 수 있다. 정말 중요하고 깊은 것은 표현되지 않는 느낌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가슴과 가슴으로 전해져 온다. 적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 같다는 것', 쉬이 '변치 않는다는 것', 그것은 사람 마음을 진짜와 가짜로 구분하는 기준인 셈이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좌우 분간을 못하던 어릴 때 '사람의 아들'이라는 소설을 접하고 이문열의 글에 한때 빠진 적이 있다. '오적'이라는 시를 읽고 김지하 시인에게 마음이 쏠린 적이 있다. 재능과 재주는 단지 재능이요 재주일 뿐이다. 물론 한 개인이 삶을 살아가는 그만의 방식을 함부로 평가하고 판단할 수는 없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선점한 이들이 보통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다. 비록 개인적인 단견에 불과할지라도, 이전과 이후 앞면과 뒷면이 전혀 다른 부류들이 있다. 세(勢)를 이루고 이름이 알려져 있는 이런 이들은 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삶의 과정에 쉽게 지우기 힘든 씁쓸한 기억으로, 열 손가락을 펼쳐 전부 꼽고도 넘쳐날 정도로 많이 존재한다. 


또 앞뒤 분간을 제대로 못하던 시절 유영모 선생이나 그 제자 함석헌 선생을 단지 그 신앙적 신념의 차이로 백안시를 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을 답답한 심정에 참 많이도 비판했다.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들이 진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이들이 진짜 바보라는 사실을 알았다. 자기들의 결점을 감출 줄도 모르고 멋지게 자기를 꾸밀 줄도 모르고 영악한 이들의 입맛에 따라 이용만 당하는 바보들 말이다. 


세월이 제법 많이 흘렀지만, 아직도 좌우 앞뒤 분간이 안되고 있음을 자각할 때가 종종 있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혹시나 하고 끌릴 경우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안 그런 척하면서도, 비슷하다고 보이는 것에 마음이 동해 기웃거리고.  흘끔거리는 나를 가끔 보기 때문이다. 우스운 것은 가짜도 가짜를 백안시하고 진짜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병들고 아픈 사람일 수도 있다고 비로소 생각하게 된 것은, 내가 사람 때문에 한참을 비틀대다가 원래의 나로 다시 돌아오고 나서부터이다.  


어쩌면 진짜를 추구하는 나도, 누군가에게는 껍데기뿐인 가짜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일뿐이다. 다른 그 무엇이 나를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최소한 내게서 만큼은, 비록 허물투성이일지라도 남의 머리가 아닌, 내 머리로 내가 진짜임을 아는 까닭이다. 비록 양태는 서로 다를지라도, 꽃잎 한귀퉁이를 손톱으로 상처를 내보는 시인의 심정이나,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는 시인의 심사를 아주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다.(2016.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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