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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08. 2017

알아야 면장(面墻)이라도 하지

요즘 지하철 안의 풍경은 옛날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나처럼 멀뚱히 앞만 보는 사람, 또는 묵념하듯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경로석의 어르신들도 마찬가지다. 예전처럼 책을 읽고 있는 사람 찾기란 아예 보물찾기 수준이다. 스마트폰 바다에 외딴 돌섬이 따로 없다. 나는 폴더폰을 사용한다. 기본료가 없으니 매달 천 원 남짓한 통신요금이 나온다. 많아도 사천 원이 넘지 않는다. 비약하자면 몇 천 원의 넘치는 만족으로 외딴 돌섬에 사는 셈이다.


내 옆에 남학생 한 명이 걸터앉았다. 동행한 또 다른 하나는 돌섬 앞에 섰다. 시선을 딱히 둘만 한 데가 마땅찮아 눈을 감았다. 둘은 무슨 게임에 관한 이야기를 아주 짧게 나누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슬쩍 가자미 눈을 하고서는 옆을 보니 스마트폰 게임 삼매경이다. 앞에 선 친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방금 전 코앞에서 둘이 나눈 짧은 대화가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너프, 버프, 현 메타 최강...'등등, 적어도 내게는 생소하거나 또는 난해한 외래 단어들이 섞여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중에 '메타(meta)'라는 단어 때문에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일상에서 사용하기엔 부담스러운 단어로 알고 있는 까닭이다.


알량한 호기심이 발동한 터라,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을 뒤졌다. '현 메타'의 뜻은 '현재 추세'라는 뜻의 신조어라고 한다. 장난감 칼을 의미하는 너프(nerf)는 '약화하다', '근육질의 남자 또는 무언가를 지지하는 열정적인 사람'을 의미하는 버프(buff)는 '일시적으로 강화 효과를 주는 것'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주로 게임에서 사용되는 용어라고 한다. 


인터넷의 도움을 얻어 말의 조각들을 이어 붙여 번역해 봤다. "... 약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일시적으로 막강한 강화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추세로는 최강이다." 이제 이해가 된다. 돌섬에게는 우리말도 누군가가 일아 듣게 설명을 해주든지, 아니면 각자도생의 심정으로 번역을 해야 겨우 이해가 되는 셈이다.


메타(meta)라는 단어의 개념 안에는 현재 눈으로 보이는 것이 존재 가능하게 하는 것, 즉 이면에 담겨 있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어에서 기원한 영어의 접두사로 "~뒤(after), ~넘어서(beyond)"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로 논리학에서 대상을 일차원적으로 표현한 내용이나 의미보다는 그에 사용된 기호, 상징, 문법 등을 설명하거나 그 타당성을 분석 혹은 검증하는 논리적 과정 또는 그 틀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직접적으로 나타난 현상보다는 다른 차원, 혹은 그 현상의 틀을 이루고 있는 상위 차원에서 현상을 보는 것이다. 


여하튼 이를 토대로 1970년대 중반 이후, 주로 인지심리학자들에 의해 '메타 이론'이 구축되었다. 메타 이론은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컴퓨터 IT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쳐 형용사와 방향 전치사의 의미를 지닌 독립적인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현실적인 실례를 들자면, 헌법재판소가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법률이 헌법상 정당한가를 판단한다. 이때 판단의 틀이 되는 헌법과 헌법재판소의 기능이 곧 메타다.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다른 프로그램을 데이터로 삼아 각 구성 요소들이 정당한가를 분석하기 때문이다. 전자든 후자든 대상이 갖고 있는 고유한 기능의 질적 평가 내지는 역량의 판단보다는, 그 기능을 이루는 개개의 요소들 혹은 전체의 틀이 원래의 사용목적에 맞게 정당하게 적용되고 작동되고 있는 지를 검증하고 분석한다는 점에서 메타의 기능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탄핵당하여 구속 재판 중인 박의 경우, 메타분석에 의하면 마치 바이러스와 같은, 혹은 바이러스에 의해 변질된 핵심 요소에 해당된다. 그래서 당연히 제거 혹은 격리하여 치료가 필요한 대상이 된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시스템이 가진 원래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복원시켜 제대로 작동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둔한 머리로 내가 이해하고 있는 메타의 개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이나 심리학은 곧 메타 학문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개인적인 소견으로, 철학자들이나 평론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는 그들이 표현하는 언어적 표현이 어렵다는 데에 있다. 최근에는 심리학마저도 난해한 수학의 위상학, 통계학, 수사학, 논리학의 개념을 차용해 어렵기 그지없다. 외국의 학자들이 이해하는 말이라면 당연히 우리 말로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적 표현이 있을 터이다. 따라서 학문을 연구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대중을 상대로 하는 작가라면, 좀 더 언어적으로 쉽게 표현하기 위한 당연한 수고와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운 우리말로 어렵지 않게 표현할 수 있는 개념도 전혀 생소하고 어려운 외래의 개념어를 들먹인다. 최근의 현대철학이나 평론은 더욱 그렇다. 그중에서 특히 심한 것은 예술평론이다. 평론에 다양한 형태의 철학까지 더해진 까닭이다. 하물며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는 문학작가가 사용하는 언어적 표현들이 난해하거나 어렵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누군가의 설명 또는 해석이 붙지 않으면, 또는 사전 지식을 갖고 있지 않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한다. 이는 결코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단적인 증거다. 다시 말하면, 보편적인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이 결코 대중적이지 않다는 역설을 내포한다는 말이다. 특정 사람의 글을 읽고 이해하는 지식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글은 더욱 그렇다. 전형적인 '순환 논증의 오류' 에 여지없이 걸린다. 최소한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의 차원에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여하튼 개인적으로는 글이든 예술작품이든 '??' 를 남긴 채, 아예 다시 쳐다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머리에서 안개비가 내릴 정도로 난해하기 그지없다. 그리 똑똑하지 못한 까닭에, 기껏 생각한다는 게, 아마 필자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도 모르고 있을 것 같다고 애꿎은 남 탓으로 자조하고 만다. 나아가 까짓 거 몰라도 살아가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고 다독거린다. 물론 잡글을 내키는 대로 쓰는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메타라는 개념이 일상에서 논하기에 다소 부담스러운 개념이라는 전제를 깐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소통에 있다. 소통에는 언어뿐만 아니라 감정, 표정, 행동, 암시, 관심, 집중도,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친밀의 정도, 분위기와 상황 등등 여러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그중에서 언어 표현이 차지하는 비율은 10%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래서 글로써 남과 진정 어린 소통을 하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한다. 


엊그제 자정이 넘어서 탄 지하철 막차에서 내 옆자리에 청년이 앉았다. 마치 머리 정수리에 또 다른 눈이 달린 듯, 들어오면서부터 자리에 앉기까지 스마트폰에서 아예 눈을 떼지 않기에 눈여겨보았다. 카톡으로 연인과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대화 중에 애니메이션 만화를 무작위로 골라가며 시청 중이었다. 그것도 가끔 킥킥 거리며... 내가 내릴 때까지 30여분 이상 2~3분의 간격을 유지하며 심각한 카톡 대화는 계속 이어졌고, 즐거운 (?) 애니메이션 시청도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감정적인 사안이 걸린 상황에서 멀티태스킹(다중작업. 성격이 다른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는 무척 신기할 따름이다. 비록 얼굴과 얼굴, 눈과 눈을 마주하는 대면 상황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이경우, 이 청년에게서 드러나는 행위의 옳고 그름보다는 심리상태나 행위의 정당성 등을 설명하거나 분석하는 시스템이나 틀이 곧 메타가 된다. 즉 다른 차원의 관점에서 이 청년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른 차원 혹은 상위 차원의 관점에서 새롭게 인식하고자 하는 메타적 접근은 여러 분야에 거의 필수적으로 취급되고 있는 추세다.  


이러한 메타적 접근으로 심리학이나 철학에서는 표현된 것에 대해서 그것이 정당하게 사용된 것인지를 언어적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메타언어'가 된다. 반면에 메타언어의 전제가 되는 말이든 글이든 행위든 실제로 드러난 것은 '대상 행위' 또는 '대상 언어'가 된다. 대상 언어는 곧 설명이 필요한 메타적 언어 표현이 되는 셈이다. 쉽게 말하자면, 의도, 본심, 동기 등이 드러나지 않게 애매모호하게 언어로 표현된 것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상황에 대한 이해, 혹은 추가적인 설명이 뒤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메타언어적 표현은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곧잘 사용된다. 예를 들면, 전후 맥락이 거두절미된 짧고 함축된 의미를 담은 언어 표현, 예를 들어 '미치겠다', '죽겠다'... 등등, 또는 상대의 속을 넌지시 떠보는 깐보는 말, 에둘러 말하는 말, 그리고 사투리 '거시기', '마', 쫌' 등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하겠다. 대부분 이런 대상 언어가 사용되는 전제는 이해관계 또는 상황인식을 같이하고 있거나, 친밀도가 있거나, 문화적 인식, 지적 수준이 비슷하거나, 또는 관심을 공유하고 있는 경우에 주로 국한된다. 대상 언어는 대부분 사회적 관계보다는 인간관계에 가까운 사람들끼리는 따로 의식하지 않고 자동적 사고로 이해될 수 있다. 요체는 대상 언어만 표현된 상태에서는, 제삼자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는 것에 있다. 이를 설명해주는 메타언어가 뒤따르지 않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러한 메타언어적 표현을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물론 문학작가들은 직업상 그럴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행여 일상의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면 곤란해진다. 어쨌든 설명이 필요한 대상 언어를 일상적인 언어, 또는 문체로 하여 습관적인 자기표현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상황에 맞게 자기합리화에 능한 사람들, 또는 자신의 의도 혹은 본심을 의식적으로 감추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주로 판단당하기를 꺼리거나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있거나, 아니면 책임의 회피, 혹은 타인을 자신의 의도대로 조종하고자 하는데에 있는 것으로 나름 헤아려진다.


자신의 진심을 표현하지 않는데, 상대가 자신의 마음이나 심정을 제대로 알아줄리는 만무하다. 하물며 자신의 진심마저 잘 모르는 오락가락하는 상태라면 오죽하겠는가. 설령 언어로 표현했다 할지라도 메타언어가 필요한 대상 언어라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오해와 착각을 몰고 다니는 경향성이 다분하다. 긴가 민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호불호가 불분명하고 태도가 모호하여 진정성을 넘어 진실성마저 의심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과의 어쩔 수 없는 인간관계에서는 자칫하면 바보로 몰릴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각오해야 한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경우의 수도 마땅히 염두에 둬야만 한다. 때로는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심지어 역으로 전혀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들에게서 뜬금없는 지탄과 원망과 증오와 혐오의 대상으로 찍히기도 한다. 


상대가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라 생각되면, 섣부른 추측이나 판단, 왜곡, 착각하는 실수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따라서 더욱 귀를 기울여서 듣는 적극적 경청의 자세가 필요해진다. 내용을 반복함으로 확인하고 질문하여, 상대가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설명하는 메타언어를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없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 경우, 경청의 자세와 확인의 절차는 상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위한 것이 되는 셈이다.


최근에는 메타언어가 필수적인 사설, 논설, 칼럼 등에서 마저도 그렇다. 일관되게 전후 맥락이 거두절미된 단문 형태의 대상 언어로만 구성된 글이라면 더욱 그렇다. 주장은 있는데 그것을 납득시킬만한 충분한 보편적 논거, 논증, 설명 등이 결여된, 즉 메타언어가 빠진 글들이다. 특히 논설과 사설, 칼럼은 논증과 논거가 보편성을 갖지 못하고 불분명하거나 논리적 오류로 점철된 글은 잡글 소설류에 불과하다. 더욱이 주장이 모호하여 독자의 지적 수준에 그 판단과 책임의 결정을 은근히 미루어 여러 추측과 예단을 부추기는 글은 쓰레기 글이다. 이럴 경우엔 관심이 있는 상황이나 대상에 대해서 만큼은 각자도생 하는 공부 이외에는 대책이 따로 없는 듯하다. 


옛 글에 '알아야 면장(面墻)이라도 한다.'는 말이 있다. 이 경우에 담벼락을 뜻하는 ‘면장(面墻)’을 공무원 면장(面長)으로 흔히 착각할 수도 있는데, 이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이 말은 '아는 게 있어야 담벼락을 대하고 있는 것과 같은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가 되겠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면 그와 관련된 지식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어린 남학생들 그리고 청년과 조우한 지하철의 일이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들이 행여 잊힐까 봐 나오는 대로 두서없이 장황하게 기록한다. 책을 뒤져가며 인터넷까지 뒤져가며 퍼즐 맞추듯이 생각 또한 나름 정리해 본다. 어째튼 내가 외딴 돌섬 같다는 느낌이 꽤 강렬하게 남아 있다. 사람들의 쉽게 표현하는 말도,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예사로 사용하는 어려운 개념어들까지도 쉽게 알아듣지 못하는 듯하니 그렇다. 일상적인 소통의 대화 조차 번역과 해석이 필요한, 없는 용기를 쥐어 짜내어 애써 질문하지 않으면 이해도 할 수 없는 듯하니 그렇다. 다른 차원의 관점 즉 메타적 접근으로 봐야 겨우 인정이 되고, 그나마 이해가 가능해지니 더욱 그렇다. 불행히도 세상은 내 중심으로 내 아는 바 생각대로 굴러가지는 않는다. 메타언어의 중요성, 각자도생의 이유를 스스로 여기서 찾아본다. 


어려운 개념어를, 그것도 외래어를 일상의 짧은 대화로 쉽게 소통하는 아이들이 부럽다. 한편으로 감정적인 상황에서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감정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앞에선 울고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는 곧바로 키득이며 웃을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는 게 더욱 놀랍다. 직업이 아닌 일상의 삶에서 자신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특정 개인에게든 불특정 다수에게든 예사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것이 불가능하게만 느껴지는 나는, 최소한의 의사소통마저 해석과 설명이 필요한 나는, 그야말로 이끼 낀 외딴 돌섬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에 잠시 젖어 본다. 그 쓸데없는 생각 속에는 매달 통신요금 천 원 한 장이 주는 쩨쩨한 만족감도 곁들어 있다. '알아야 면장(面墻)이라도 한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2017.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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