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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09. 2017

대안 없는 비판

몸이 아픈 사람을 환자라고 한다. 환자가 병원을 가고 의사를 만나는 것은 그 이유와 목적이 분명하다. 스스로 병을 고칠 수 있다면 병원을 찾아갈리는 만무하다. 병의 치료는 병의 원인과 근원을 분명히 알고 있을 때에 비로소 가능해진다. 가능해진다는 것은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적절한 치료법이나 약제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바른 의사는 진단에 자기 능력나 진단도구의 한계를 인지하면, 시설이 잘 갖춰진 보다 큰 병원에 위임하는 게 정상이다. 비록 전문가일지라도 자기 능력의 한계를 느낄 때, 다른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고 위임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다. 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 없이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를 가리켜, 우리는 돌팔이라 부른다. 


흔히 "대안 없는 비판은 하지 마라"라는 말을 듣는다. 이 말은 곧, "문제제기를 하지 마라"라는 말과 다름없다. 비판에 대한 사전적 정의나 델파이보고서같은 전문가들의 합의된 진술을 보아도, 비판은 "현재의 상황이나 사안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현재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면에 대안은 "그래서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미래의 바람직한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의지인 까닭이다. 물론 궁극적인 목적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데에 있다.  따라서 비판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비판에 "굳이 대안까지 필요한가?"라는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닌 근거다. '문제제기'라는 전제 없이 대안을 모색할 수는 없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대안 없는 비판"은 비판을 단지 불평불만이나 비난으로 왜곡하여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수사학적 표현에 다름없다.  갈등과 반목 행위로 쉽게 몰아가는 정치적인 말장난과 같다. 혹은 비판의 개념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생긴 오해일 수도 있다. 언어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소통과 표현에 있어서 중요한 사항이다. 거의 모든 착각, 왜곡, 편견, 선입견, 오해, 혼동이 여기서부터, 다시 말해 올바른 개념 이해의 여부로부터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가당착적인 논리적 오류에 빠지는 것, 역시 개념부재에 있다. 어떻게 대안 혹은 해결책을 먼저 마련해 놓고 문제를 파악하고 제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답을 정해놓고 문제를 만들어 가는 것과 문제를 파악하고 답을 찾는 것은 별개의 차원인 까닭이다.  


비판에 '부정적(否定的)인' '건전한 등의 수사를 붙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는 '불편한, 거북한, 듣기 싫은' 혹은 '듣기 좋은, 마음에 드는, 긍정적인' 등의 말로 바꿔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거북하고 불편하고 듣기 싫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비판의 수식은 '올바른, 적절한, 정당한' 등이 어울린다. 비판의 핵심이 호불호나 이해관계보다는 근거의 올바름, 정당성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올바른, 적절한, 정당한'의 대치어가 될 수 있는 것은 "잘못된, 부적절한, 옳지 않은" 등이 되겠다. 이렇듯 조금만 의문을 가져보면, '대안', 즉 보다 바람직한 해결책을 찾고자 하면서 '문제제기를 하지 마라'는 소리는 모순 그 자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 비판을 하면서 대안, 즉 문제의 해결책까지 모색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문제는 누구나 찾아낼 수 있다. 그럼에도 남들이 다 보는 문제를 찾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주의와 관심이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심리적 경향성으로 '주의력(기억력) 착각' 또는 '인지적 착각'이라 부른다. 또는 '인지 편향'이라고도 한다. 여하튼 문제를 찾아내고 그것을 제기하는 것은 누구나 마땅히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해결책까지 제시하기를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따라서 "대안 없는 비판은 하지 마라"는 말은 "쥐뿔도 모르면서 괜히 아는 척 나서지 마라"라는 말과 다름없다. 비판은 보다 바람직한 해결책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과정이지, 결론 그 자체가 아니다. 잘못은 누구나 찾아낼 수 있다. 또 고치면 된다. 내 이름의 철자를 잘못 표기했다는 것을 알면, 고쳐 쓰면 된다. 이것이 지식이나 식견을 요구하는 일이라고 논리를 펴서 주장한다면 뭐라 할 말이 없다. 실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한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잘못을 잘못인 줄을 모르는 데에 있다. 그런데 잘못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지를 하든 안 하든 여전히 잘못의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문제다.


"그래서 어쩌라고?...(네가 뭔데?... 그런데 너는?... 네가 감히...)..." 대화나 토론 중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이런 느낌의 말을 어렵지 않게 듣는다면, 그만 할 말이 없어질 수밖에 없다. 소통은 물론, 더 이상의 대화나 토론은 무의미해진다. 대신에 선언된 "대안 없는 비판"의 의도된 의미는 더욱 뚜렷해진다. 


어째튼 혼자서는 고칠 수 있는 잘못이 있는가 하면, 혼자서는 고치기 어려운 잘못도 분명 허다하다. 물론 아예 고칠 수 없는 것도 있다. 이는 딱히 해결책이 없거나 대안이 없을 경우도 존재한다는 의미가 되겠다. 그러나 세상사에는 정답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상상이 힘들 정도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경우의 수와 변수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여러 사람들의 이해관계, 이념, 신념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공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이럴 경우의 대안은 연관된 지식 혹은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다수의 합력과 합심의 의지가 필요한 영역이다. 여럿이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바람직하고 가장 합리적인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다수의 전문가에게 위임해야 하는 전문적인 영역에 국한시킬 수도 있다.


"대안 없는 비판"은 지난 10여 년간의 부패한 정권에서 흔하게 듣던 말이다. "대안 없는 비판"에 대해 인터넷을 검색하면, 여지없이 503도 자주 애용했던 말로 찾아진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모두가 애꾸눈인 나라에서는 두 눈의 정상적인 사람이 비정상일 수도 있다. 심지어 장애인으로 취급될 수도 있다. 비정상이나 몰상식도 익숙해지면, 그것이 정상이나 상식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는 것은 삶의 씁쓸한 체험이다. 유체이탈이 상상되는 503이 그러하니, 소위 지성인을 포함하여 보통 사람들조차도 "대안 없는 비판"에 온갖 논리를 가져다 붙이고서 부정적으로 들먹이는 것이 쉽게 찾아진다. 받아쓰고 베껴 쓰고 소설 쓰기에 능숙한, 금권 자본과 권력의 시녀가 되어버린 언론들은 아예 말잔치를 벌였다. 


지난 정권과 과거 정권에서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면, 여지없이 '종북' 또는 공산주의 빨갱이의 완곡어법인 '좌빨'로 몰았다. 좌빨은 이념의 문제니 그렇다 치더라도 종북의 뜻이 '북한을 추종한다'는 뜻이다. 최소한 그 뜻을 안다면, 민주시민으로서 보통의 상식을 가진 정상적인 사람의 입에서 결코 쉽게 들먹일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당연히 '좌빨'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이와는 반대로 현정권의 적폐청산과 개혁의 의지을 지지하고 옹호하면서 전정권과 전전 전전 정권의 부역자들과 적폐 집단을 비판하면, '문빠, 문베충, 문슬람'에 거기에 더하여 '종북', '좌빨'로 몰아가니 기가 찰 노릇이다. 저들은 '사슴을 말'이라고 우겨댔던 희대의 역신 조고와 그에게 빌붙었던 사람들과 다름없으니 더욱 그렇다. 온갖 권력을 동원하여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강제했던 이들이 오히려 표현의 자유, 정의 운운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로 남불'이라는 아이들 은어나 '적반하장도 유분수'에 '후안무치'라는 말들이 바로 이런 이들을 가리켜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망각도 저 정도면 심각한 병적 수준이다. 저들이 정권이 바뀌고도 멀쩡하게 존재하고 또 주객을 전도시킨 동일한 프레임으로 여전히 행세하고 있다는 것은 가히 민주주의 체제와 법치주의의 사회가 내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본론으로 돌아가 나름 정리해 보자면, 뚜렷한 대안이 없다고 해서,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당연시하고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대안은 비판의 과정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모색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비판은 근거가 분명하고 정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나의 대안이 없을지라도 다른 누군가가 대안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잘못이 아니다.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될 이유 또한 마땅히 없다.


굳이 여러 학술인들의 견해를 들먹이지 않아도, 비판은 성찰 또는 반성과 연관된 개념이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사고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궁극의 목적이 '잘못된 것을, 완벽이 아니라 온전한 방향으로 바로 잡고자 하는데에 있다'라고 나름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안에 맞지 않는 부적절한 비판', '보편적인 표준에 어긋나는 옳지 않은 비판', '근거가 빈약한 비판', '불평불만 등의 사적인 감정 혹은 이해관계에 치우친 비판', '결점과 허물을 트집 잡고 비난하기 위한 비판' 등은 마땅히 분변 되어야 하고, 또 경계해야 하겠다. 


그럼에도 비록 대안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할지라도, 설령 그럴만한 역량을 미처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옳은 것이라면,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함이라면, 비판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대안은 나보다 더 지혜롭고 더 똑똑하고 전문적인 식견과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위임할 일이다. 필요하다면 그 대안마저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비판을 하든, 수용을 하든 그것은 언제나 나의 몫이고 또한 당신의 몫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저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일러준 그대로, 사슴을 말이라고 인정하고 오독하며 남의 머리로 살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나와 당신이 함께 공동의 노력으로 무엇이 옳은가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칼 포퍼의 말이다.(2017.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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