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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17. 2017

백경(Moby Dick, 白鯨)

모비딕(Moby Dick), 거대한 장벽(wall)

『Oh, lonely death on lonely life! Oh, now I feel my topmost greatness lies in my topmost grief. Ho, ho! from all your furthest bounds, pour ye now in, ye bold billows of my whole foregone life, and top this one piled comber of my death! Towards thee I roll, thou all-destroying but unconquering whale;  오! 고독한 인생 외로운 죽음이여! 오! 이제 내 가장 깊은 슬픔 안에서 나는 나의 가장 큰 위대함을 느낀다. 오! 오! 지난 내 삶 전체에 걸쳐 대적할 수도 없이 세차게 휘몰아치던 파도여 아득하고 머나먼 끝에서부터 이제 휘몰아쳐라 그래서 내 죽음의 물기둥 꼭대기까지 치솟아 올라라!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되지 않는 고래여! 그럴지라도 그대를 향해 나는 돌진한다.』


위의 대사는 허만 멜빌(Herman Melville,1819∼1891)의 ‘백경(Moby Dick: or, The Whale, 1851)'에 나오는 문장이다. 외다리 선장 에이허브가 모비딕을 눈앞에 두고 절규하는 말이다. 모비딕은 세계 해양문학의 최대 걸작으로 손꼽힌다. 허만 멜빌은 해양문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주자로 회자되는 작가다.


문학사의 걸출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소설 모비딕은 당시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허먼 멜빌 스스로도 실패한 작가로 인정하며, 생을 마쳤다. 그러나 사후 30년이 지난 1919년에 컬럼비아 대학 영문학 교수였던 레이먼드 위버(Reymond M. Weaver)에 의해 재조명되어 마침내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멜빌에 관한 전기와 작품 연구가 활발해짐으로써 극적인 반전을 가져다주었다. 이로써 일반 대중에게 멜빌은 미국 문학사에서 위대한 작가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비록 생물이지만 모비딕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가진 거대한 백경(모비딕, 향유고래), 그리고 모비딕에게 다리 한쪽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외다리 에이허브 선장의 이야기이다. 작품은 젊은 선원 지망생 이스마엘의 눈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바다라는 새로운 세상에의 도전과 모험을 이야기하고, 아울러 모비딕을 향한 광기 어린 에이허브 선장의 처절한 집념과 복수의 과정을 그려낸다.  


작중 화자인 이스마엘은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 살아갈 길이 막막한 청년이다. 그럼에도 실낱같은 희망에 바다를 향해 눈을 돌린 청년이다. 씁쓸하고 막막한 삶이 주는 무기력함과 그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청년이다. 이는 곧 사회 구조와 제도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맞닥뜨린 우리네 사회 현실의 데자뷔이기도 하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아무도 거부하지 않고 모든 것을 그저 수용하는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을 선택하고, 모험을 나선 작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작가의 모습은 그냥 주저앉기보다는, 암울한 현실 속을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향해 나아가고자 기대하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소설 모비딕은 특징적으로 작가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바다와 포경업, 고래에 대한 상상을 초월한 박물학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특히 고래에 관한 기술은 한편의 논문이라고 봐도 좋을 만큼 해박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비딕은 소설적인 재미는 물론이고, 생소한 지식에 대한 지적 욕망도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모비딕에 관한 서평과 분석은 누구나 어디에서건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독자적(獨自的)인 시각임을 전제로 하고 시작한다. 어떠한 독서에도 모범답안은 없다. 개개인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따라 그 이해와 인식의 정도가 각기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생각, 내 느낌을 그저 드러낼 뿐, 판단과 이해는 온전히 글 읽는 이의 몫이다.


작품은 모비딕과 에이허브 선장, 그리고 소설의 화자인 이스마엘, 세 개의 구도가 큰 틀이다. 모든 사고(思考)의 주요 흐름은 화자(話者) 이스마엘의 관찰자적 시각에 있다. 멜빌은 관찰자로서 청년 이스마엘의 눈을 통해 세 개의 시각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생각하고, 질문하며, 때론 충고한다.  


내면의 트라우마(trauma)로써 장벽(wall) 


큰 얼개는 장벽(wall)이다. 그 첫 번째가 트라우마(trauma)로써의 장벽이다. 트라우마(trauma)는 `외상(外傷)`을 뜻한다. 흔히 말하는 `정신적인 외상`은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 정신적으로 받은 상처'를 의미한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란,  '사람이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의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그 사건에 공포감을 느끼고 사건 후에도 계속적인 재경험을 통해 고통을 느끼며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는 정신질환'이다.(서울대 의학정보) 


모든 인간에게는 각각 나름의 트라우마(trauma)가 있다. 내면의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다. 상처의 아픔은 아파 본 사람만이 안다. 글의 서두에 제시한 에이허브 선장의 대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모비딕은 한 인간에게 털어낼 수 없는 마음의 깊은 상처와 한(恨)을 제공한 원인으로써 존재한다. 에이허브 선장의 삶은 모비딕이 주는 트라우마의 고통으로 온통 지배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저항하고 극복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집념과 의지를 에이허브 선장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구현된다. 에이허브 선장이 넘어야 할 장벽은 바로 모비딕이다. 모비딕은 트라우마의 근원이다.


『How can the prisoner reach outside except by thrusting through the wall? To me, the white whale is that wall, shoved near to me. Sometimes I think there's naught beyond. But that's enough. He tasks me; he heaps me; I see in him outrageous strength, with an inscrutable malice sinewing it. That inscrutable thing is chiefly what I hate; and be the white whale agent, or be the white whale principal, I will wreak that hate upon him.  죄수가 벽을 깨부수지 않고서 어떻게 밖으로 나갈 수 있겠나? 내겐 저 백경(白鯨)이 바로 벽이지, 그놈 가까이로 날 마구 밀어붙이고 있지. 때때로 난 그게 뭔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놈은 내가 풀어야 할 숙제고 또 내가 내려놓아야 할 짐이야. 그 끝을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원한(怨恨)으로 똘똘 뭉쳐진 난폭한 힘이 그놈에게 있다는 것을 난 알지. 내가 그토록 미워하는 것이 바로 그 불가사의한 원한(怨恨)이야. 그래서 난 백경의 대리인이 되고 혹은 백경 그 자체가 되어 그놈에게 이 미움을 전부 쏟아내어 그냥 퍼붓고 싶은 거야』 


에이허브 선장의 고백처럼, 백경은 인간이 결코 쉽게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다. 하지만 멜빌이 그려내는 에이허브 선장에게 백경은 복수의 대상뿐만 아니라 동시에 극복의 대상이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개인의 성장과 변화를 가로막는 장벽이라는 점에서 여러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모든 트라우마는, 어떤 형태로든 인간을 알 수 없는 고통으로 이끈다. 마음을 지배하여 인간의 건강한 삶을 위축시키고 제한시킨다. 그래서 트라우마는 극복의 대상이고 치유의 대상인 것이다. 트라우마의 근원을 재직면하고, 그것에 맞설 때 비로소 내적치유, 즉 회복이 시작된다. 그러한 재직면을 가로막는 것은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을 떨쳐내는 것은 ‘의지와 용기’ 밖에 없다. 그것은 에이허브 선장에게서 '광기와 집념'으로 실현된다. 

 

멜빌은 광기 어린 인간 에이허브를 통해서 트라우마를 재직면하는 과정과 그를 통한 극복의 과정을 처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비록 비극으로 끝날지라도 결코 정복당하지 않고 지배되지 않는 인간 정신의 승리와 극복을 말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어떠한 모습으로든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여 인간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모든 고통의 원인에 저항하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두려움마저 극복하는 ‘불굴의 정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시각에서 모비딕과 에이허브 선장(Ahab)의 대립구도는 비록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의지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과 신의 섭리', 그리고 '그에 대하여 무모한 광기로밖에 볼 수 없는 처절한 집념으로 이에 저항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의지'라고도 이해할 수도 있다. 이처럼 이스마엘의 눈으로 관찰하는 두 번째 시각은, 장벽이 외부로부터 오거나 혹은 존재한다. 


두려움의 근원으로써 장벽 


두 번째의 시각은 두려움의 근원으로써의 장벽이다. 인간은 환경적 요인에 영향받는 사회적 인간이며 동시에 관계적 인간이다. 그렇다면 인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써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정신과 자유를 억압하여 내면의 고통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심지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할 수도 있는 외부적인 요인은 어떤 것인가? 여기에는 인간이 만든 일개인의 의지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사회 구조 또는 제도’, 혹은 ‘관습’, 또는 인간을 구속하고 억제시키는 교조 교리 등을 뜻하는 학습된 '도그마' 등이 있을 수 있다. 학습된 가치관, 고정관념 등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종교도 빠질 수 없는 요인이다. 


화자인 이스마엘은 서두에서 밝히기를, 자신이 바다를 향해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막막한 삶이 주는 무기력함과 그 악순환’에서 벗어나고자 함이며,  '바다는 아무도 거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수용하기 때문이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무기력과 악순환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소설의 첫 문장 나를 ’ 이스마엘로 불러라 ‘ 이 말에서 그 상징적 의미를 추측할 수 있는 그림이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이는 성서에서 찾아진다. 성서에서 이스마엘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아버지의 의지에 의해서 친모와 함께 황량한 죽음의 사막 한가운데로 내 쫓겨진 인물이다. 


『Call me Ishmael. Some years ago- never mind how long precisely- having little or no money in my purse, and nothing particular to interest me on shore, I thought I would sail about a little and see the watery part of the world. It is a way I have of driving off the spleen and regulating the circulation.  나를 이스마엘로 불러라. 몇 년 전, 정확히 얼마나 오래 동안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지갑에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 신세에 육상에선 특별히 흥미를 끄는 어떤 것도 없던 그런 시절, 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배를 타고 세계의 바다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우울하고 의기소침한 감정, 그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한 방법이었다.』 


멜빌이 살았던 19세기의 상황은 계몽이라는 명분 아래 경쟁적으로 팽창하던 제국주의의 전성기였다. 이를 바탕으로 산업자본주의의 무자비한 확장은, 식민지배와 폭력을 통한 자본의 노동착취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노예제도에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이러한 시대적 패러다임은 사회 경제적 강자의 모든 논리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자본과 경제력이 인간의 모든 기본 인권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지배하고 군림하던 시기였다. 결국 미국 사회에 심각하게 치우친 경제적 불균형과 극심한 빈부격차를 가져왔다. 이러한 시대에 멜빌이 작가로서 위대한 것은 그러한 빈곤하고 궁핍한 현실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잘못된 시대정신에 저항하고, 고뇌하며 또 그것을 바로 잡고자 비판하는 작가정신의 순수한 본령(本令)을 지켰다는 데에 있다.  


멜빌은 그의 여러 작품들을 통해 당시 미국 사회에 통렬한 비판적 성찰을 요구했다. 작가로서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에 대한 회의와 자기반성을 시도하고, 미국 사회를 우화적으로 강력하게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멜빌의 신념은 화자(話者)인 이스마엘의 관찰자적 시각을 통해 여러 상징적 의미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모비딕, 외다리 에이허브 선장, 선주(船主), 피쿼드호, 선원들, 퀴이커그, 포경산업, 교회, 설교를 듣는 실업자 혹은 청중들, 성경 설화, 바다, 기타 여러 등장인물 등등이다. 이는 비록 스스로 모험을 나셨지만, 실상은 정상적인 사회로부터 쫓겨나다시피 한 이스마엘의 눈으로 그려진다. 바다는 이스마엘의 도피처요, 절실한 희망의 장소다.


각각의 상징에 대한 해석은 독자가 찾아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대립적인 구도 안에서 대표되는 여러 상징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역할이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는 패러독스를 이 작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선과 악이 뒤바뀔 수도 있고, 선과 악이 공존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경계의 구분 없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신과 인간,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과 인간, 포경업과 고래, 선주와 선원들, 모비딕과 에이허브 선장, 모비딕과 피쿼드호, 피쿼드호와 에이허브 선장, 에이허브 선장과 피퀴드호와 선원들, 1등 항해사 스타벅과 에이허브 선장, 이스마엘과 퀴이커그, 이스마엘과 퀴이커그의 목관 등등이다. 특히 퀴이커그의 목관은 죽음을 상징성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또 다른 면으로는 굳이 메플 목사의 요나에 관한 설교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대다수의 평론가들은 흔히 이 작품에서 신과 인간, 또는 선과 악의 대립구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다. 이러한 구도 안에서 모비딕은 악의 화신, 혹은 신의 섭리를 상징한다. 이러한 관점은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구약성서의 인물들의 이름으로 인용되고, 종종 등장하는 요나 이야기와 함께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에이허브는 아합(Ahab), 구약성서의 대표적인 사악한 왕이다. 이세벨이라는 사악한 왕비와 함께 우상숭배와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선지자 엘리야에게서 여호와의 저주 예언을 듣고서야 회심한 인물이다. 왕의 회심으로 저주와 재앙은 그 자식대로 미뤄졌고 그의 피를 개가 핱아먹으리라는 예언과 함께 실행되었다.(열왕기상). 이스마엘은 이스마엘( Yishma'el),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아브라함은 유대민족의 조상으로 불리우는 인물이다. 아브라함과 본처인 사라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생기지 않자, 사라의 권유로 여종인 하갈에게서 낳은 아이다. 후일 아브라함이 99세 되던 해에 본처인 사라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삭이다. 이스마엘은 어린 동생 이삭을 괴롭히다가, 그 벌로 친모 하갈과 함께 빈털터리로 메마른 사막으로 쫓겨났고, 후일 아랍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전해진다(창세기). 이스마엘이 출항 전에 만나는 예언자 일라이자는 아합 왕의 우상숭배와 악정에 유일하게 대항하였던 이스라엘의 영웅, 선지자 엘리야(Elijah, 열왕기상)에서 인용되었다.  


에이허브 선장은 피쿼드호의 기름통이 새는 걸 걱정하며 그에게 보고하러 온 1등 항해사 스타벅에 이렇게 말한다. 


『And I was not speaking or thinking of that at all. Be gone! Let it leak! I'm all a leak myself. Aye! leaks in leaks! not only full of leaky casks, but those leaky casks are in a leaky ship; and that's a far worse plight than the Pequod's, man. Yet I don't stop to plug my leak; for who can find it in the deep-loaded hull; or how hope to plug it, even if found, in this life's howling ale?  난 결코 그걸 걱정하거나 말하지 않을 거네. 그냥 가게나! 그냥 새게 내버려 두란 말이야! 내 모든 것이 새고 있다네, 그렇지! 새는 건 다 새지! 새는 건 전부 통만이 아니야. 새는 통을 실은 배도 새고, 온통 새는 피쿼드 호보다 더 비참한 사람도 샌단 말이야. 하지만 내 몸이 새는 것을 막거나 하지는 않을 거네. 선창 저 아래 깊이 숨어 있는 물이 새는 구멍을 누가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찾아냈다 한들 이 인생의 울부짖는 격랑 속에서 어떻게 그걸 막을 희망이 있단 말인가?』 


선장 에이허브의 이 말은, 어찌 보면 다가오는 어떤 두려움에 대한 체념 혹은 수용일 수도 있다. 백경이 준 트라우마로부터 오는 두려움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이허브 선장은 고래잡이 40년 세월 동안 땅을 밟은 것은 3년도 채 안 된다. 이 말은 그야말로 격랑의 거센 대양에서 평생을 살아온 늙은 선장의 인생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말이란 것을 헤아릴 수 있다. 여기에서 피쿼드호와 구멍이 나서 새는 통들에 어떤 사회적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또 모비딕이 무심한 바다에 펼쳐 놓은 처참한 죽음의 잔해들을 바라보며, 에이허브 선장이 전의(戰意)를 불태우며 광기(狂氣)로 선원들을 몰아붙이는 동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노련한 고래잡이의 달인 1등 항해사 스타벅은 죽음의 예감을 감지한다.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이렇게 탄식한다. 


『Accursed fate! that the unconquerable captain in the soul should have such a craven mate!  저주받은 운명이여! 결코 정복될 수 없는 영혼을 가진 선장이 나를 겁쟁이 사관으로 만들어 버리는구나!』  『I will have no man in my boat who is not afraid of a whale. 내 보트에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태우지 않을 것이다.』 


스타벅의 두려움 또한 보편적인 의미의 두려움과는 또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에이허브 못지않은 고래잡이 달인인 1등 항해사 스타벅의 고래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에이허브가 시종일관 백경에 대해 느끼고 저항하는 두려움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두려움이 없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 두려움이 성장과 변화의 원동력이 되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좌절과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 외부에 장벽으로 존재하는 것, 그 존재 자체가 두려움의 근원이 되어 인간의 삶을 통제하고, 자유로운 인간의 고귀한 정신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 이것들 역시 극복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관찰자 이스마엘의 눈으로 본 두려움은 무시하거나, 아니면 수용하거나 혹은 맞서 싸워 저항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백경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고 또 내려놓아야 할 짐’의 상징이다. 인간의 삶을 제한하고 또 인간을 옭아매고 있는 모든 ‘증오와 두려움의 근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반드시 풀어야만 될 숙제라 하겠다.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써 장벽, 그리고 역설 


마지막으로 이스마엘이 보는 시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서의 장벽이다. 그리고 인간의 숙명은 온갖 역설이 존재한다. 이는 우리가 선듯 이해하기 힘든 신의 섭리일 수도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에이허브 선장의 주변에 있는 선원들에게 모비딕은 공포 이전에 일종의 경외감일 수도 있고, 반면에 그들의 눈에 비치는 외다리 에이허브 선장은 결코 넘을 수 없는 또 다른 장벽일 수도 있다.  


때론 죽음의 예감을 감지하고 에이허브에 저항하여 선상반란을 모색해 보기도 하지만, 결국 노 선장의 광기에 굴복하고 그 광기에 길들여진다. 마침내 예감대로 그들 모두를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비극으로 몰아간 것은 에이허브 선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허브 선장의 처절한 집념과 의지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한다. 그것은 광기(狂氣)로 집약된다. 그 광기는 거대한 장벽 너머에 존재하는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숙명마저도 돌파해 버린다. 그 극복의 힘은 고통에 굴하지 않고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저항의 의지이며, 두려움을 뿌리치고 거대한 장벽에 직면하고자 하는 용기이며, 죽음이라는 숙명마저도 어찌할 수 없는 강한 집념이다. 


『Towards thee I roll, thou all-destroying but unconquering whale; to the last I grapple with thee; from hell's heart I stab at thee; for hate's sake I spit my last breath at thee. Sink all coffins and all hearses to one common pool! and since neither can be mine, let me then tow to pieces, while still chasing thee, though tied to thee, thou damned whale! Thus, I give up the spear!"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그럴지라도 난 그대를 향해 돌진한다. 내 마지막까지 그대와 맞서 싸울 것이다. 지옥 한가운데서 그대를 찌르고 내 증오를 위하여 내 남은 마지막 숨결까지도 남김없이 그대에게 뱉어주마. 모든 관들과 묘비들도 모두 한 구덩이로 가라 앉혀라! 그것 중에 어느 것도 내 것이 될 수 없을지라도, 내가 그대에게 묶여서라도 그대를 추적하는 동안 나를 산산조각 내거라! 저주받을 고래여! 그래서 난 창을 포기한다!』 

 

또 하나의 역설이 있다. 모비딕과의 첫 사투에서 노잡이 3명의 실종은 수습 선원 이스마엘이 에이허브의 이물(선수) 노잡이로 나설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 기회는 이스마엘이 코앞에서 모비딕을 직면하게 만들었고 지옥과 같은 극한 공포의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만들었다. 이스마엘이 탄 보트는 모비딕 앞에서는 바로 죽음으로 가는 급행열차와 다름없다. 하지만 그 보트는 이스마엘에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는 생명의 길로 가는 통로가 된다. 


그 역설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퀴이커그의 목관에 있다. 이스마엘의 목숨을 구한 것은 난파 현장에 떠올랐던 그 목관이다. 타인의 죽음들, 죽음을 상징하는 관이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의 극적인 반전. 비록 그 대미(大尾)가 비극이었지만, 관은 곧 죽음인 동시에 생명이요, 또 다른 의미의 새로운 출발이요, 희망의 상징이 된다. 이것 또한 역설이다. 일라이자의 예언대로라면 이 역설은 이스마엘에게 피할 수 없는 신의 섭리요 숙명이었다. 


성서에서도 황량한 죽음의 사막으로 내 쫓긴 이스마엘은 죽음의 고비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극적인 생명의 구원을 받고 활 쏘는 자로 성장하여 마침내 한 민족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극적인 반전과 역설은 우리네 인생사에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가? 이 역설은 에이허브 선장의 삶과 대비하여 생각의 여지를 많이 남겨준다.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자면, 앞에서 열거한 세 개의 큰 시각이 작품 전반에 걸쳐서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화두는, ‘장벽’이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극복하느냐 하는 것은 개개인의 시각에 달려 있고 독자 스스로의 몫이다. 작가인 멜빌 스스로도 이 소설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을 보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작가에 의해 보류된 여백 안에서 모비딕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독자들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몇 개의 중요한 질문들을 던진다. 


완벽하거나 완전한 인간은 없다. 누구나 넘어야 할 벽은 있다. 인간의 내면과 외부에는 어떤 형태로든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벽이 존재한다. 그 장벽이 바로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그것들은 각자가 생각하고 고민할 일이다. 생각의 힘은 변화와 성장의 동력을 제공한다. 다이제스트나 가십이 아닌 양질(良質)의 독서는 생각의 힘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내겐 저 백경이 바로 벽이지』
『내가 아무리 몸부림친다고 해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밧줄의 한 쪽 끝뿐...』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게도 나 자신을 포함한 많은 장벽들이 있고, 여전히 넘지 못한 어떤 벽이 분명히 있다. 책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에 있어 내게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요즘처럼 ‘사실보다는 가십 또는 왜곡’이, '진실보다는 거짓'이, '진짜보다는 사이비'가, '인간의 도리나 정의보다는 이념'이, '알갱이보다는 껍데기'가, '양심보다는 물질'이, '정의보다는 불의와 불법'이,  '원칙보다는 이해관계'가, '상식보다는 비상식’ 이 사회의 거의 모든 가치관 위에서 군림하는,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 사회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2014.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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