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격물치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르헤시아 Dec 18. 2017

첨밀밀(甜蜜蜜)

사람은 누구나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가족 구성원, 사회 구성원으로서, 각기 주어진 사회적, 가정적, 혹은 인간적 관계 역할에 따라 적든 많든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사람 사는 곳이 그런 가면들을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가면들은 때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짜 자기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혼동을 줄 때도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가장 근접한 가면이 홀로 있을 때라고 한다. 하지만 이 또한 학습된, 혹은 가장 익숙해진 가면(거짓 자아) 일 경우도 있다. 때론 그걸 뻔히 알면서도 속고 또 애써 모른 척하며 서로 속아주며 산다.


이래저래 인간이란 게 복잡한 동물임에는 분명하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어찌 남을 감히 안다고 할 수 있으랴?...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개인의 삶을 통해서 우러나오는 그 삶의 열매들 혹은 표현된 언어 혹은 행동양식들을 보면 대충 짐작은 가능해진다. 자기와 관계없는 주변사람들을 무심코 대하는 일상의 태도등에서도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것은 일관성의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굳이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자식이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며 열매다. 부모의 실체적인 모습은 그 자식을 통해 그대로 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볼 때, 눈과 눈을 마주하고, 가슴과 가슴을 마주하면, 그것은 좀 더 분명해진다.


주변에 그들의 탁월한 끼와 재능, 혹은 업적으로 사회적으로도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거의 대다수는 그들이 이루어 낸 업적과 공헌을 통해서 추측되는 인격과는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남에게 보이는 삶의 미학을 추구하는 보통 사람들도 예외는 없다. 실제로 주변에서 자주 본다. 그야말로 '목후이관'의 고사가 무색할 만큼 그렇다. 종교인도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멋진 환상만 보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뼈저리게 안다. 환상은 언제나 예고도 없이 현실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어느 순간, 물풍선처럼 무참하게 깨져 버린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 또한 아주 가끔은 자신의 거짓 자아(예를 들면, ‘나는 정말로 인간적이고 괜찮은 사람이다’)에 깜박 속을 경우가 참 많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영화 ‘첨밀밀’은 남녀의 사랑이야기들을 그리 과하지 않게 담담하게 그려낸 영화다. 나이가 많든 적든지 누구나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아마 그 환상을 죽기 전까지 포기 못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에 대한 편견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딜레마이다. 또 편견과 취향의 문제는 별개의 것임을 잘 안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첨밀밀’은 보이는 사람과 사랑에 대한 편견을 깨고, 나도 몰래 내 가슴 깊이 잠자고 있던 환상을 다시 건드렸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옛말이 있다. 불가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의 실제 의미를 곰곰이 숙고해보면, 우리가 익숙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과는 약간 달라진다. 옷깃의 사전적 의미는 ‘저고리나 옷 따위의 목에 둘러대어 앞에서 여밀 수 있도록 된 부분’을 말한다. 한복에서 동정을 대는 목 근처의 부분이 바로 옷깃이다. 이 옷깃이 스치려면 동정과 동정이 만나야 한다. 목과 목이 서로 스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이는 몸이나 목을 서로 껴안거나 맞대어 비벼야 가능하다. 바꾸어 말하면, 서로를 껴안을 수 있을 만큼의 가까운 스킨십이 자연스레 이루어져야 옷깃 스침이 가능하다는 말이 되겠다. 이 정도면 보통의 관계에서는 웬만하여선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 곧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 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을, 특히 남녀 간의 관계로 놓고 잠시 생각해본다면 다양한 상상이 가능해진다. 비약해서 ‘남녀 간에 같이 하룻밤을 자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옛 어른들의 말에 슬쩍 빗대어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책임이 수반되는 인연’으로 말이다. 결국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에서, 유교적 도덕과 윤리를 중시했던 옛사람들의 지혜가 읽힌다. 므흣한 남녀 간의 사귐에 불교적 의미를 담아서 점잖게 에둘러서 표현한 말로 나름 헤아려지는 까닭이다.


여하튼 이런 점에서 누구나 흔히 숱하게 겪을 수 있는 그냥 ‘옷자락 스치는’ 것과는 다른 의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세상을 조금 살아보니, 옷깃 스침의 인연, 즉 책임을 져야 할 만큼 소중한 인연들이 따로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너도 나도 사랑에 죽고 사는 듯이 한다. 하지만, 남녀 간의 사랑, 만나고 헤어짐을 마치 휴대폰 배터리 갈아 치우듯이, 사랑을 일회용 휴지 사용하듯이, 가벼이 남발하고 배설하는 요즘 세태에서는 한 번쯤은 돌이켜 생각해 볼만한 말이다.


첨밀밀에 나오는 여러 연인들은 ‘옷자락 인연’이 아닌, 이 ‘옷깃 스침의 인연’들이 아주 무심한 듯한 현실로 반복된다. 마치 담담한 꿈결처럼 표현된다. ‘옷깃 스침의 인연’은 껍데기가 아닌 서로의 속을 쑤욱 찔러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인연이다.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절실하게 원하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벽은 환상만을 허용할 뿐이다. 환상은 막연한 그리움으로 그들의 가슴속에 담기고 무심한 세월과 함께 무르익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환상이 현실과 환경과 시간을 극복하고, 운명처럼 이루어지는 과정을, 담담하고 잔잔한 감동으로 감독은 그려낸다. 


영화 속의 연인들은 구태여 자신을 서로에게 설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굳이 애써 알려고도 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안타까움과 애절함을 불러일으킬 뿐, 과장된 감정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자신의 추억과 그리움, 그리고 아픔과 상처까지도 담담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설령 그 상처와 아픔들이 서로가 주고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그것들이 그들의 삶을 통제하거나 그들의 외로운 마음을 지배할 자리를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상처와 아픔 대신에 그냥 서로를 가슴에 담고 묵묵히 바라만 볼뿐이다. 다만 그 속마음을 과장되게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래서 보는 이가 가슴으로 느낄 따름이다.


‘사랑, 그리고 만날 사람은 운명처럼 만난다.’


그러나 실제의 삶은 그렇게 호락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잠시 생각해 볼일이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운명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고 해야 적확한 표현이다. 이 세상의 숱한 만남에서 운명처럼 생각하여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저 사람이 나의 운명, 나의 사랑이 되었으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정말로 내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다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내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 이게 바로 우리네 삶이다. 로마의 사상가 세네카는 '생명이 있는 한, 사람은 무엇인가 바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말인가. 정말 다행스럽게도 꿈꾸고 환상을 가지는 것은 자유다. 게다가 착각마저 자유다. 다행히 보여주는 예술과 문학은 그 심리적 욕구와 욕망과 환상을 대리해 준다. 잘 짜인 소설이나 영화는 어떤 환상이든, 어떤 운명이든, 어떤 욕망이든 실현 가능하게 만든다. 인간이 꿈꿀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려낼 수 있다. 


사랑의 이면에는 언제나 고통이 있고 인내가 있다. 또 책임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곧잘 잊어버린다. 누리기만 하는 사랑, 직간접적으로 육체적 정신적 감각으로 느껴지는 아찔하고 달달한 사랑, 이 얼마나 멋지고 달콤한 사랑인가. 하지만 모든 인간사에는 어김없이 원인이 있고 과정이 있다. 또 그에 따른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그 속에는 온갖 것들, 미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 과정 없는 결과는 없다. 우리는 알면서도 곧잘 속는다. 만일 설명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결과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미처 인지 못한 무지의 결과일 따름이다. 분명한 것은 환상을 가슴에 품고 아무리 오랜 세월 기다린다 할지라도, 시간은 결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충이 껍데기를 탈피하지 않고서는, 꽃에 앉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나비의 날개짓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물며 향기도 없고 꿀마저 없는 꽃이, 제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할지라도, 쉽사리 나비를 불러들일 수는 없는 법이다.


첨밀밀(甜蜜蜜)은 '달콤한 꿀'이란 뜻이다. 감각으로 느껴지고 확인되는 사랑은 몸으로 체감하는 사랑이다. 먹어보고 그 맛을 아는 사랑이다. 몸의 감각은 일시적인 것이라, 언제든 변하기 마련이다. 더 강하고, 더 자극적이고, 더 좋은 맛을 추구하는 것은 차마 거부하기 힘든 인간의 본능인 까닭이다. 욕구는 채워지면 그뿐이고, 욕망은 마치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와 같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욕구와 욕망을 넘어서는 변치 않는 정이요, 의지다. 달콤한 것뿐만 아니라 온갖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정이요, 의지다. 꽃은 지고, 잎도 떨어지며, 육체는 시들기 마련이다. 하물며 동물적인 느낌만으로 감각적인 느낌만으로 가면이나 껍데기를 변치않고 사랑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 때의 일시적인 달콤한 사랑은 있을지라도, 영원히 달콤한 사랑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의 요체는 서로의 몸과 마음이 하나로 엮어지는 신체적 정신적 합일에 있지 않다. 독립된 서로 다른 인격이 상호 존중과 배려의 바탕 위에서, 변함없는 진정한 관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에 있다. 그래서 혹 변치 않는 신뢰와 의리 혹은 영원한 우정 혹은 따뜻한 사랑은 있을지라도, 변하지 않는 달콤한 사랑은 없다. 그러기에  더욱 '사랑은 달콤한 환상'이라 할 수 있겠다. 


영화 ‘첨밀밀’은 그 달콤한 환상을 대리 만족시켜준다. 때로는 달달하게, 때로는 안타깝게, 때로는 담담하게, 결국은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르도록 말이다.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의 눈치 볼 일도 없이, 마음으로 그릴 수 있는 달콤한 사랑의 환상은 언제나 좋다. 나는 과하지 않게 달콤한 것이 정말 좋다. 영화 첨밀밀이 좋고, 장만옥도 좋다. ‘첨밀밀’ 노래도 좋다. 노래의 제목처럼 노래의 가사처럼, 영화 ‘첨밀밀’의 장만옥이 비록 잠시 뿐일지라도, 내 달달한 환상을 일깨워 주기때문이다. 세네카의 말이 다시 머릿속을 맴돈다. '생명이 있는 한, 사람은 무엇인가 바랄 수 있다' (2014/1/19)     

매거진의 이전글 백경(Moby Dick, 白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