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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20. 2017

장미의 이름으로

우연히 유튜브에서 숀 코네리 주연의 영화 ‘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 1986) 전편(全篇)이 보였다.  원작 소설과 영화를 각각 재미있게 읽고 본 기억이 새로워서 얼른 노트북에 담았다. 이후에  시간을 내어 시청하다가, 채 1/3을 넘기지 못했다. 잠이 들어 버린 까닭이다. 이왕 시작한 것 끝까지 보려고, 며칠 동안 여러 번을 시도했다. 결국 아직까지도 다 보지 못했다. 이내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마치 강력한 최면제로 변해 버린 듯하였다. 


오래 전 이 영화를 볼 당시만 해도, 원작 소설이 남긴 진한 여운에 이끌려 완전히 몰두해서 본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보려니 내 뜻대로 안 된다. 영화 자체에서 풍기는 중세 특유의 음습하고 무거운 분위기, 무엇보다 대사가 많이 없고 조용하니, 금새 졸음이 엄습한다. 이미 줄거리의 전개와 내용을 대충 알고 있는 것도 수면촉진에 한 몫 했을게다.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해서 꿩 대신 닭이라고 대신에 오래 묵은 책을 다시 찾았다. 특히 소설류는 속독에 꽤 익숙한 편인데도, 이제 읽어보니 과거와는 달리 책도 영화만큼 만만치는 않다. 이왕 시작한 것, 시간을 쪼개가며, 틈틈이 며칠에 걸쳐 겨우 다 읽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롭다. 내친김에 요즘 겹쳐지는 여러 잡다한 현실적인 생각들을 엮어, 서평을 핑계 삼아 몇 자 끄적거려본다.


움베르토 에코의 원작 소설 ’ 장미의 이름’은, 중세 수도원과 그에 부속된 도서관에서 발생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유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 2권(희극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을, 추리소설의 형태로 전개한다. 추리소설의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기호학자로서 움베르토 에코 특유의 언어유희, 그리고 해박한 박물관적 중세 지식의 나열 때문에 호흡을 여러 차례 고르면서 읽어야만 할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재미있다. 독자의 흥미를 끌어 댕기기에 충분한 여러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특히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추리소설 자체로 재미뿐만 아니라, 쉽게 접할 수 없는 중세의 어두운 역사, 즉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에 대해서 구체적인 지식과 정보를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세 역사가들이 감추고 싶었던 어두운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과 지식을 함께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가 무엇을 얻느냐 하는 것은, 작가 자신의 변(辯)처럼, 순전히 이 책을 읽는 독자 개개인에게 달렸다. 다만 후일 에코가 그의 창작 노트에서 제목 '장미의 이름'을 선택한 동기를 설명한다. 이를 통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미루어 추측할 만한 몇 가지 힌트를 제공하였다.


12세기 초 베네딕트파 수도승이자 시인, 문필가였던 ‘Bernard of Cluny’의 '세상에 대한 경멸(De Contemptu Mundi)“이라는 라틴어 시에 “stat Rom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고대 로마는 이름으로서 아직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의 헛된 이름뿐)“이라는 시구가 나온다.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의 결구(epigram)에 이를 차용하여,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태초의 장미는 이름으로서는 아직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이름뿐)‘이라고 인용하였다. 로마(Roma) 대신에 발음이 비슷한 장미(rosa)로 대체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라틴어 시구의 단어 로마(Roma) 자리에 어떠한 단어를 삽입하더라도, 구절의 의미는 변함이 없다. 그 의미는 '본질이 사라지고 왜곡되어 허상만 남아있는 상태'를 은근히 비틀고 있다이 소설의 주요 인물인 윌리엄 신부(William of Baskerville)는 철학 원리 '오컴의 면도날(Ockam's Razor 또는 경제성의 원리 )'을 정립했던 14세기 영국의 논리학자이며 프란체스코회 수사였던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을 실제 모델로 하였다. 오컴의 면도날 원리는 간단히 말하자면,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가지 이론이 대립할 경우,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는 쪽이 진리일 확률이 크다’는 것이다.


스토리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고대의 장서를 보관한 유서 깊은 도서관이 있는 한 수도원이 이야기의 배경이다. 작중 주요 인물은 세 사람이다. 수도원에서 도서관을 중심으로 벌어진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의 추적을 하는 윌리엄 신부가 있다. 그는 '인간의 지식과 이성으로 진리를 파악하고 그 실체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믿는 이성적 신념을 지닌 인물이다. 


그 대척 편에는 도서관과 신앙적 진리를 수호하는 호르헤 신부가 있다. 그는  '오직 신만이 인간의 모든 지식과 실체적 진실을 확보하고 있다. 불완전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그 실체에 도달할 수 없다. 오직 신의 뜻에 의해서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때문에 인간에게 해악을 줄 수 있는 모든 지식은 차단되어야 한다'라고 믿는 종교적 신념을 지닌 인물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신앙으로 대표할 수 있는 신부라는 사회적 신분 그리고 각자 나름의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 대조적인 두 인물 사이에서 인간의 불완전 본질과 진리에 대해 갈등하고 고뇌하는 이 소설의 화자(話者)인 아드 소,. 이 세 인물이 그려내는 세 개의 장면이 큰 틀을 이루고 있다.

『"아, 이 세상에서 진리의 정체를 판독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니까 진리가 제아무리 애매하게 보인다 해도, 또 순전히 악에 기울어진 인간 의지와 뒤섞여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진리를 밝혀 주는 징표라면 남김없이 포착해야 한다"』

주인공 월리엄 신부의 이 말은 곧 그의 신념이다. 이성 중심적 사고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대비되는 호르헤 신부의 신념을 굳이 인용하고 설명하지 않더라도, 소설 속의 등장인물, 즉 종교재판과 이단 심문관으로 명성을 떨치는 베르나르 기의 비장하고도 확신에 찬 고백은 호르헤의 신념을 사실적으로 대변한다. 이는 신중심적 사고의 전형이다.

『"나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이단의 독사가 어디 숨어 있든 이를 찾아내기 위해 고된 시련과 비천한 갈바리아의 짐을 지고 갑니다... 이단자들이 자기네 사악한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려고 이용한 여러 저서의 저자들을 나는 이단의 공개적인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

인간 이성중심의 사고와 신중심의 사고는 근원적으로 서로 합일될 수 없는 대립의 위치에 있다. 이런 점에서 윌리엄 신부는 독특한 인물이다. 물론 양쪽 어디에도 정확한 답은 없다. 


에코는 화자(話者) 아드소를 그 중간에 둠으로써 철학적 사고의 새로운 여지를 남겨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드소는 양쪽 모두를 관찰자로서 보고 있다. 그는 그 중간지점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불완전함에 대해서 고뇌하는 자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소설에서 가장 인간적인 공감으로 와 닿는 인물은 신념과 확신으로 가득 찬 월리엄이나 호르혜가 아닌 고뇌하는 불완전한 인간 아드소다.


윌리엄 신부와 호르헤 신부의 대조를 통해서, 신앙과 진리를 어떻게 접근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신념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확연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소설은 분명하게 보여 준다. 다시 말해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신앙적 열정과 소명, 그리고 신념이 어떻게 진리의 본질마저 왜곡하고 파괴할 수 있는지, 그에 따른 결과가 가져다주는 엄청난 인간의 모순과 비극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잘 시사해 준다. 윌리엄 신부는 아드소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아드소, 너는 예언자들과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해라. 이 사람들은 원래 수많은 사람을 자기네와 함께, 흔히는 자기네보다 먼저, 때로는 자기네 대신 죽게 만들기 때문이지. 』    

분명한 것은 신앙과 진리를 대하는 인간의 자세와 방법론 그리고 그 절대적 진리 주변에 함께 엮어져 보이지 않는 악의 실체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는 일단의 계기를 이 소설은 제공한다. 선의 모습을 한 악. 선과 악의 공존. 이는 기독교 신정론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들은 독자에게 쉽게 설명되지 않는 나름의 강렬한 여운들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지나 온 역사가 보여 준 중세의 역사, 종교권력이 절대 권력이었던 중세 역사가 암흑기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분명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특히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러한 중세의 종교권력이 지배하는 세상,  즉 현실세계에 도래한 인간이 다스리는 하느님의 나라는 억압과 통제와 권위와 탐욕과 불평등과 차별과 폭력과 파괴 그리고 이권 전쟁으로 점철된, 분명 악의 세력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사에 현실 역사로 기록된 하느님의 나라는 보편적인 우리들의 천국이 아닌, 곧 특별한 당신들의 천국이 아닐 수 없다.


소설에 등장하는 종교재판이나 마녀사냥은 중세 흑역사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철저히 종교적인 소산물이다. 이는 가톨릭 교회와 교황으로 대표되는 중세의 지배권력을 수호하고 사회체제와 질서를 유지하는, 정치적이고 사법적인 강력한 장치요, 민중 통제 수단이었다. 중세는 12, 13세기의 그레고리안 개혁으로부터 대표되는 문예부흥기의 발흥으로 근대화의 태동을 위한 제반 요소들을 가일층 성숙시킨 시기였다. 그러나 역사가들의 평가는 암흑의 시대였다. 그 중심에는 가톨릭 교회의 어둡고 처참한 이단 박해의 역사, 집단 광기의 역사가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다.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였건 간에 중세에는 기독교의 성례전을 거부하거나 또는 교회권력에 대항하는 모든 사람들을 이교도 또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처형했다. 한술 더 떠서 교황 그레고리와 이노센트 시대 이후에는 모든 교회권력에 대한 저항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였다. 그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잔혹한 종교재판 과정을 거쳐 화형에 처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참혹했던 수난사가 바로 '마녀사냥'이었다. 


‘마녀사냥’은 정통 교회사에서 조차 삭제되어 있을 정도로, 서글픈 집단 광기의 흑역사다. 11세기 초 십자군 원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러한 집단 광기의 역사는, 대서양을 건너 17세기 말 미국의 세일럼의 마녀재판(1692)으로 이어지고, 현대에 와서는 히틀러의 인종청소, 그리고 매카시즘으로까지 연결된다. 


매카시즘은 냉전시대 미국 내에서 행해진 '반공사상검증(1950~1954)', 즉 '공산주의자 색출작업'을 말한다. 이는 미국을 곧바로 현대판 암흑기로 몰아넣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 하에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말살하고, 인권을 헌법보다는 여론재판의 방식으로 무차별적으로 짓밟는 독재자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미 정부에 혹은 사회현실에 비판의식을 지닌 지성인, 예술가, 문학인들은 거의 대부분, 미국 민주주의 체제를 파괴하려고 시도하는 공산주의자, 빨갱이, 민주주의의 적으로 무차별적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엄청난 사회적 압박과 멸시와 협박과 사회적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몇몇 깨어있는 지성인들의 소신 있는 저항을 통해서, 메카시즘이 민주주의의 정신을 부정하고 특정 정치인들과 이해집단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양식이 있는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점차 깨닫게 되었다. 마침내 인권과 사상과 표현의 자유의 소중함을 인식한, 깨인 시민들의 저항의 노력으로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려는 움직임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결국 진실은 드러나고 매카시즘은 오욕의 기록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 주창자 매카시는 거짓말쟁이로 판명되어, 비참하게 정치인생을 마쳤다. 매카시즘은 미국 역사와 민주주의 정치사에 큰 오점을 찍은 불행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하느님의 손은 창조하지 은닉하지는 않습니다!"...."당신은 악마입니다" "내가?" "그렇습니다. 당신은 속은 겁니다. 악마는 물질의 왕자가 아닙니다. 악마란 정신의 오만, 웃음이 없는 신앙, 한번도 의심을 받지 않은 진리입니다"』

동일한 종교적 신념, 즉 동일한 신앙을 가졌으면서도 신성과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 윌리엄 신부가 이해하는 것과 호르헤 신부가 이해하는 것은, 위의 인용한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전혀 다르다. 이는 이성과 신성의 문제도 아니고, 진리에 문제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신념의 왜곡과 뿌리깊게 고착된 신념의 문제다. 인간의 시각과 사고로 진리를 안다고 믿으며, 또 그것을 신념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게 문제다. 이것은 진리도 신성의 본질마저도 기만하는 괴물의 형태로, 호르헤 신부를 통해 소설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장미의 이름’에서 보이는 광신적으로 왜곡된 신념, 그리고 그러한 신념들이 연결된 집단 광기의 역사인 마녀사냥과 인간을 집단적인 맹목으로 이끈 매카시즘은 많이 닮아있다. 이들의 공통점이 표면적으로는 정의의 실현과 진리의 수호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정치적인 신념의 바탕에는 무한한 권력에의 욕망과 지배욕이라는 뿌리 깊은 인간 탐욕에 자리하고 있다는 그 차이뿐이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신념들이 가져 다 준 결과는 무참한 폭력과 살인과 처절한 파괴다. 동시에 참담한 비극이요, 불행이었으며, 또 암흑의 혼돈 상태였다는 점에서 또한 닮은꼴을 하고 있다. 선을 악으로 수호할 수는 없다. 악으로 수호되는 선은, 결국 선을 가장한 또 다른 악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웃음을 왜 두려워하는가? 웃음은 두려움을 없애고 두려움 없이는 신앙도 있을 수 없다. 악마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하나님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오직 신의 뜻만이 선이고 진리다. 인간의 이성에 의해 주도되고 이해되는 모든 것은 선이 아닌 악이다.』

위의 문장은, 소설 속의 인물, 웃음에 담긴 비밀을 영원히 안고 불속에서 장렬히 산화한 호르혜 신부의 신념으로 축약되는 문장들이다. 이 문장들을 막상 적어 놓고 보니 왠지 많이 익숙하다. 움베르토 에코가 그러했듯이 ‘웃음’, ‘신앙’, ‘하나님’, ‘신’, ‘인간의 이성’, 대신에 독자가 연상할 수 있는, 각각의 다른 단어를 대입해 보면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물론 그 연상과 이해는 각자의 몫이다.


“태초의 장미는 이름으로서는 아직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이름뿐.“ 아마도 움베르토 에코는 ‘정의는 존재한다. 다만 이름으로서만 존재할 뿐’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그렇게 대입하고 싶다는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물론 개개인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소설 ‘장미의 이름’, 마녀사냥 그리고 매카시즘 현상은, 거룩한 신앙이 확고한 신념의 왜곡된 모습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권력과 물질에 대한 무한한 욕망 또한 정의를 가장한 왜곡된 신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신념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상이나 생각을 굳게 믿으며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허구를 굳게 믿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허구란, '사실에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만든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허구를 사실처럼 굳게 믿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주장하는 것은 신념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어떤 의미에선 허구와 연결된 신념은, 단지 신념을 가장한 지독한 편견이나 고질적인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 만약 이것이 집단으로 의식화 되어, 사회적으로 집단의 광기와 연결된다면, 사회전반에 걸쳐 엄청난 불행과 비극을 초래한다는 것 쯤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다.


여하튼 어떤 양태로 든지 진리의 이름을 빌리든, 정의의 이름을 빌리든, 신념의 이름을 빌리든, 혹은 신념 그 자체 이든 간에,  그것이 개인을 넘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거나 타인에게 강요될 때, 그것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많은 사람들의 불행과 비극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에코의 소설이 가르쳐주는 교훈이며, 또 실제 역사가 그렇다고 증언하는 교훈이기도 하다. 과연 내가 가진 신념은 어떤 모습으로 내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을까. 소설은 한번 쯤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화두를 건내는 듯하다. 그리고 이야기의 말미에 가서야, 비로소 에코는, 이야기 전반에 걸쳐서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하는, 마치 이야기의 결론과도 같은  진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윌리엄 신부의 입을 빌어 마침내 드러낸다. 

"아마도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사명은 사람들이 진리를 향해 웃도록, 진리가 웃도록 만드는 데 있을 거야. 유일한 진리는 진리에 대한 광적인 정열에서 우리가 해방되는 길을 배우는 데 있기 때문이지". 

어쩌다 보니 서평이 다소 무거운 방향으로 흘러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다시 읽더라도 탁월한 이야기꾼인 에코 특유의 잘 짜여진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의 재미는, 지적호기심과 더하여 여전히 변함이 없는 듯하다. 


소설이 그려주는 이야기는, 양태만 달리 한 채,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이 많이 닮아 있다. 중세의 암흑시대를 관통하던 집단의 광기와 매카시즘의 광풍은 모양만 달리 한 채, 신부 호르혜의 모습으로 때론 이단 심문관 베르나르 기의 모습으로,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망령처럼 떠돈다. '장미의 이름으로' 


(2014. 2. 8 쓰고 2017.12.20 고쳐쓰고 다시 정리하다)


※며칠 전 영화를 다시 봤다. 그것도 한 번에 주욱...겨울 밤이 유난히 춥고 길었던 덕분이다. (2017.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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