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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21. 2017

편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부끄러움


나는  고상한 이념(Ideologie)이나 거룩한 신앙 등의 신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 중에 속한다. 자칭 타칭 언필칭  교양인들이 마치 유행처럼 오리발처럼 내세우는 자유주의자도, 낭만주의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대단한 도덕주의자나  휴머니스트(인도주의자)도 아니고, 원칙주의자(puritain)는 더욱 아니다. 다만 보편적 상식을 지향하는 나름의 알량한  소신 정도는 가지고 있다. 거기에 특정 사회적 인간부류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또한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말과 삶이 다른 이분법적  사고, 권위주의적 사고, 겉과 속이 다른 부류들을 백안시하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그러한 편견은 어쩌면 바깥의 거울로 비춰지는,  내가 싫어하는 감추어진 내 모습일 수도 있다. 그래서 문득 마음이 발동하여 쓰고자 하는 글의 내용은, 어쩌면 누워서 침뱉기  식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와 반성의 의미로,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


편견(偏見)이란, 문자적 의미로 보면, '한쪽으로 치우쳐서 본다'라는 뜻이다. 사전적 의미는,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 이다.  한편, 편견으로 번역되는 영어는 ‘prejudice[predƷudɪs]’다.  그 어원은 라틴어  ‘프라이유디키움(praejudicium)’에서 왔다고 한다. 프라이유디키움은 '선례(先例), 전례, 판례'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이전부터 있었던 일', 또는 '이전의 결정이나 경험에 기초하여 판단하는 것', 또는 '동일한 사안에 대해 사실을  조사하고 고려하기 전에, 이전에 내려진 판단에 의거하는 것’ 등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이 영어의 ‘prejudice’로  정착되면서, ‘근거 없이 미리 호의나 혐오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으로 점차 변화되었다고 한다. 


"상식은  18세 때까지 후천적으로 얻은 편견의 집합이다". 이는 이인슈타인의 말이다.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의 의견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즉 편견은 사회·문화적 여러 요인들에 의해 형성되며, 주어진 문화·사회적 환경 안에서 다양한 사회화의 방식을 통해  후천적으로 학습되고, 또 경험되는 행동이라고 설명한다. 캐임브릿지 영어사전에서는, ‘prejudice(편견)’을,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의견 이나 느낌, 특히 충분한 생각이나 지식 없이 형성 되었을 때' 라고 정의한다. 정리하면, 편견은 동서양 공히 개인의  정서가 개입된 것으로, '특정 인물, 대상, 상황, 집단에 근거 없이 호감이나 적대감을 갖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개념적으로 이해되는 편견에서, 특히 학습과 정서와 관계 있다는 점에서 만일 올바른 사실적 근거에 직면하고, 충분한 생각이나  지식이 갖추어진다면, 편견은 언제든 바로 잡고 또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사실 또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편견보다 더 완고하여 사람을 힘들게 하고 때론 아프게 만드는 것은 '고정관념'이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을 살아  오면서, 비싼 값을 치르고 알게된 사실이다. '고정관념'(stereotype)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이는 사회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로  풀리처상(1962)을 수상한 바 있는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 '여론 Public  Opinion'.1922)이다. 그에 의하면 고정관념은 특정한 사회 집단에 대해 생각할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전형적인  그림'(pictures in our head)이다. 


고정관념에  대해 사전을 찾아 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1.마음속에 굳어 있어 변하지 않는 생각 2.(심리) 어떤 사람이나 집단의 마음속에  굳게 자리잡고 있어서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어떠한 상황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생각". 이다. 위키백과에는 고정관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정관념(固定觀念)은  심리학 용어로, 사람이 어떤 생각 또는 관념을 가질 때 그 생각이 잘못되어 누군가 설득을 하고 혹은 상황이 바뀌어도 당사자가 그  생각을 스스로 수정하지 않는 한 항상 동일하게 작동되는 관념을 가리킨다. 어떤 집단이나 사회적 범주 구성원들의 전형적 특징에  관한 신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고정관념은 사회나 인간이 지니고 있는 도식(schema)에 크게 의존한다. 여기서 도식이란 어떤  대상이나 개념에 관한 조직화되고 구조화된 신념이다. 인간은 사회화를 통해 각기 다른 문화 속에서의 신념체계를 습득하게 되고 이를  통해 문화에 대한 확고한 시냅스 연결이 뇌 속에 남게 된다. 이러한 사회화 과정 속에서 고정관념이 형성되게 된다. 고정관념은  어떤 사람의 인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고 거기에 선입견 또는 편견을 부과하기도 한다. 고정관념은 때로 분쟁이나 극단적인  인종차별 같은 여러 사회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한다."(위키백과)

사회  심리학자인 해밀턴(Hamilton,D.L)은 고정관념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 "고정관념을 갖는 것은 선천적 원인이 아니다.  학습에 의한 결과다. 이는 사회로부터 학습된 사회 관념에 대한 맹목적인 수용과 동조에 원인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회에 의해  학습되는 고정관념은 마치 고정 불변하며 당연한 것이며, 앞으로도 영원토록 변치 않을 것처럼 강요된다. 고정관념은 교육이나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서 의미화 과정을 거치며 강화된다. 이로써 우리로 하여금 고정관념이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즉 해당 구성원들은 사회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고정관념을 갖게 된다."(Hamilton,D.L.&  Sheman,J.W.(1994). 「고정관념 Stereotypes」)라고 설명한다.


즉 사전적 의미나 연구자들의 설명을 자세히 곱씹어보면, '고정관념이란 사회적 규범이나 관습에 의해서, 사회적으로 개인이나 전체  집단속에  학습되고 주입된 일종의 신념'이다. 고정관념은 고착된 관념으로 어떤 현상이나 사물 또는 대상에 대하여 자동적으로  범주화하는 인지방식이라 한다면, 편견은 부정적인 정서, 감정, 평가 등의 직접적인 태도와 연관된다. 어째튼 고정관념은 이를 모두  포괄하는 뿌리 개념이라할 수 있다. 고정관념과 비슷한 말로 사용되는 선입관은 정서 및 태도와 관계있다는 점에서 편견에 가깝다.  젠더(성별, 즉 남성과 여성), 성(性, sexual life), 인종, 민족, 출생 지역, 혈액형, 특정직업군, 종교, 학벌,  이혼, 분리가정, 미혼모, 장애인, 전과자, 동성애자, 에이즈, 성도덕 기타 등등에 개인적으로 반응하는 정서와 태도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 


월터 리프먼의 설명에  따르자면, 제시된 특정 단어에서 연상되는 무언가가 당신의 머리속에 즉각 그려지는 '어떤 그림'이 바로 고정관념이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고정관념이나 편견은 주로 권위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 내성적인 성향의 닫힌 성격의 사람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제시된  특정 단어 이외에도 고정관념은 우리 사회에 수없이 만연해 있다. 아무리 열린 사고 열린 인간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고정관념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우리가 진지하게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대할 때 평상시에는  좋은 태도를 보이다가 기대와는 다른 예상치 못한 특정 상황 또는 일면을 보거나 듣거나 인지하였을 때 무의식적으로 평소의 태도와  전혀 다른 태도를 갑자기 취하게 된다면, 고정관념이 자동적으로 작동한 것으로 보면 되겠다. 


그렇다고해서  고정관념이 모두 부정적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고정관념이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을 이루는 바탕에 자리잡고 있는 까닭이다.  수십억 세상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다 다르고 살아 온 환경과 문화, 삶의 방식이 각기 다르듯이, 생각이나 가치관이 모두 나와 같을  수는 없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잘 못살았고, 잘못된 것이며 부정적인 것이라 일반화하여 단정지을 수는 더욱 없는 일이다. 문제는  왜곡되게 자리잡은 고정관념이며, 그것이 그릇된 편견으로 발현되는 고정관념이다. 


왜곡된  고정관념이 그릇된 편견으로 작동하면 그동안 힘들게 쌓아 올린 신뢰는 손바닥 뒤집히듯이 혐오 또는 적대로 뒤바뀔 수도 있다.  우리의 무의식속에 내재한 어두운 면, 즉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유발하는 그림자가 어두울수록 고정관념은 강렬한 확신과 신념이 되어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만큼 외부의 대상으로 뜬금없이 투사되어 폭발한다. 이처럼 왜곡된 고정관념은 공든 탑, 오랜 신뢰를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사회적, 개인적 불신을 점화시키는 도화선이라 할 수 있겠다. 감정적이든 실리적이든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신뢰라 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랑도 우정도 애정 또한 마찬가지다.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여튼 사회적 차별이나 편가르기, 혐오, 증오 등등 모두 이 왜곡된 고정관념의 범주 속에 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성서에 나오는 말이다. 사회심리학자인 브루어 & 밀러(Brewer and Miller,  'Contact and cooperation' 1988)는 "편견을 감소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은 두 집단구성원들 간의 직접적인  접촉을 강화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직접 대면하여 교류를 나누는 실질적인 접촉의 기회를 늘림으로써, 실제 경험을 통해 머리  속에 새겨진 대상에 관한 지식 정보와 그 실상은 다르다는 인식을 가질 때, 비로소 뿌리깊게 자리잡은 편견이 해소될 수 있다는  의미다. 


비록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서 잘 안다할지라도 실제로 한번 보는 것만 못하다. 아무리 수 백번 보았다 할지라도 한번 체험하는 것만 못하다. 이는  우리가 가진 좁은 인식의 확장을 하고자하는 의지를 요구한다. 확장하기위해서는 먼저 닫히고 제한된 사고방식의 문을 개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문을 열고 누군가가 나 대신에 그어준 경계선을 넘어서, 내 발로 직접 찾아가 보는 일이다. 내가 알고 이해하는  세상과  지식의 지평을 늘리는 일이다. 대상을 통해 "떠오르는 그림"으로 대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떨쳐버리고, 대상의 실체 그 자체를  직접 찾아가 보고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러할 때 비로소 고정관념이나 편견의 탈피가 가능해진다는 말이 되겠다.  


‘무소용치(無所用恥)'라는  성어가 있다. 맹자 진심편에 나오는 말이다. “부끄러움을 쓰는 바가 없다.”라는 뜻이다. 즉 '부끄러움을 앎에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를 존재선생(위백규, 1727~1798)은 이러한 병의 뿌리는 바로 ‘스스로 속임(自欺)’, 즉  '자기기만'에 있다고 보았다. 자기기만은 위선자의 특징이다.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자기기만'을 공고히 하는 탁월한 심리적  사고(思考) 장치가 된다. 자기 '부끄러움' '수치심'을 감추는 훌륭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집단 속에 묻혀있을 때 집단의  이름으로 더욱 탁월해진다. 


맹자에  공자가 향원(鄕原) 즉 위선자를 비평하는 글이 있다. 내가 가진 편견을 스스로 정당화하고 또 합리화하는 근거로 자주 인용하는  글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비슷하나 속은 완전히 다른 것을 미워하노니, 가라지를 미워함은 벼 싹을 어지럽힐까 걱정해서요, 말재주  있는 자를 미워함은 의를 어지럽힐까 걱정해서요, 말이 많은 자를 미워함은 진실을 어지럽힐까 걱정해서요, 정나라 음악을 미워함은  정악(正樂)을 어지럽힐까 걱정해서요, 간색(間色)인 자색(紫色)을 미워함은 정색(正色)인 주색(朱色)을 어지럽힐까 걱정해서요,  향원을 미워함은 진정한 덕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해서이다."《맹자, 진심 하(盡心下)》.


옛  농부들이 알곡과 쭉정이를 걸려낼 때, 키를 사용한다. 적절한 충격과 바람을 이용하여 키로 걸러낸다. 신뢰를 손바닥 뒤집듯 하고, 화장실 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고, 아침 마음 다르고 저녁 마음 다르며, 봄 다르고 겨울 다른 이런 류들이 나는 싫다. 사회적  가면을 쓰고 뒤로 점잖게 호박씨 까는 동리자, 북곽선생류는 더욱 싫다. 진실과 시시비비를 어지럽히는 이중적인 향원류들은 정말 싫다. 다만 경험 상 드러내어 싫은 내색이나 태도를 취하지 않을 뿐이다. 왜 이런 편견이 내게 그토록 고착되어 있을까? 글을 정리하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저러한 향원류의 특성들이 내 속에서, 나만의 그림자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심리적으로 내가 가진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나 어두운 정서가 외부 대상에 투사된 직접적 결과가, 바로 내가 가진 편견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하는 염려 또한 강력하게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굳이 다른  현실적 이유를 붙이자면, 특히 내가 가진 특정부류의 사람에 대한 편견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에 의한 것으로 일반화하기엔 아주 애매한 것들이다. 그래서 때론 깨어지기도 하고 더욱 강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상을 보고 머리속에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어떤 그림"에 의존할 정도로 어리석거나 무례하지 않다. 실제로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결함도 많고, 실제로 어리석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와 존중은 가능한 한 잊지 않는다. 이는 가면이  아니다. 진심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스스로 존중받고 배려받기 위한 소심한 나름의 이기심이다. 내가 존중받기 위해서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상대의 인격을 가늠하는 나름의 이기적인 척도이기도 하다, 때론 진짜와 가짜, 진심과  가심(假心)을 분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내 편견이 깨어지는 것은 주로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만남이나 배움들 덕분이다. 내 편견이 깨질 때, 나는 언제나 부끄러움을 느낀다.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아는 것은 인간됨의  중요한 바탕이다. 더 넓은 인간이해로 나아가는 발판이기도 하다. 허물과 결점이 없는 완벽한 인간은 없다. 정작 부끄러운 것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양심이 있고, 또 부끄러움을 알기에 인간이다. 짐승은 아무리 거룩하고 고상하게  치장해도 부끄러움이 뭔지를 모른다. 자기 실존을 알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감화시키려 찾아 온 공자를 면전에서 꾸짖고  비난한 살인자 악인의 대명사 도척도, 성인에 버금가는 지당한 논리를 내세운다. 공자가 도척에게 기가죽어 벌벌떨며 도망친 것은,  도척의 옳은 논리때문도 아니다. 양심의 부끄러움때문도 아니다. 사람의 간을 씹어먹는 도척에게서 느껴지는 살인자의 살기(殺氣)  때문이다. 혼비백산하여 창백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공자에게서 한 보통 인간의 모습을, 나는 느낀다. 야구방망이는 스포츠 용구로 그 용도가 분명하다. 칼도 그렇다. 다만, 누가 그것을 쥐고 또 어떻게 흔드느냐에 따라 그  실상은 판이하게 달라지기도 한다. 


자기의 위세를 의지하여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이기적인 사람을 가리켜 관을 쓴 원숭이로 비유한 목후이관의 고사는 현실의 삶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 한자성어로 염불위괴(恬不爲愧)란 말이 있다. 이는 "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다. 알량한 편견에서 자주 미적대고 있는 나는, 후회하는 것도 많고 스스로 부끄러운 것이  많다. 그냥 묻고 싶다. 그대는 무엇을 부끄러워 하시는가? 당신에게 묻는 말이다. 내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기도 하다.(2016.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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