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에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면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함을 비유할 때 사용한다. 얼마 전엔 누군가가 술기운에 말하길, '그렇게 약게 못 사는 사람들이 바보 머저리 취급받는다'라고 자조 어린 말을 들었다. 어째튼 우리 몸의 내장 기관은 참 많은데, 왜 하필 간과 쓸개를 연결시켜 비유했을까?
그 이유는 알고 보면 분명해진다. 쓸개가 한 몸처럼 간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서 지방의 소화를 돕는 중요한 작용은 쓸개즙(담즙)이 담당한다. 알려진 바로 쓸개의 기능은 담즙(쓸개즙)을 농축하여 저장하고 간의 해독작용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쓸개즙은 이름처럼 쓸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간에서 만들어진다. 간에서 만들어진 쓸개즙(담즙)은 쓸개에 저장되었다가 필요에 따라 십이지장으로 보내져 지방을 소화시킨다. 이처럼 쓸개는 간에 붙어서 간의 기능을 보조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간담(肝膽)이 서늘하다'라는 말이나, 또한 줏대가 없고 지조 없는 사람을 가리켜, '쓸개 빠진 놈, 혹은 쓸개도 없는 놈'이라 한다. 또 '서로가 마음속을 툭 털어놓고 숨김없이 친하게 사귄다'는 뜻의 사자성어, '간담상조'(肝膽相照, 간과 쓸개가 서로 비춘다) 속에도 간과 쓸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정리해 보면 서로 중요한 기능을 공유하고 밀접한 관계로 붙어 있는 간과 쓸개는 편의에 따라 수시로 자리바꿈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결국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는 것은 그 중요도에 따라 억지로 간에 쓸개를 붙인다거나 쓸개에 간을 붙인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것이 가능해지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는 다른 주체가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면 그것은 기생충을 가리킴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 몸속에 기생하는 기생충들이 영양분을 빨기 위해 필요에 따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모양새를 가리키는 것이다. 즉 우리네 현명한 선조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 기생충들이나 하는 짓을, 사람이 하는 양태를 비아냥대는 말이라 하겠다.
약간 맥락을 달리하지만 이와 비슷한 의미를 뜻하는 심리학적 용어로 ‘처한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을 가리는 말로 상황주의(Situationism)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본질적인 것에 따르기보다는 처한 상황이나 환경, 시스템에 유리하도록 움직이고 또 그것을 합리화시키려는 심리적 경향’이 곧 상황주의다. 상황주의 심리학은 구조주의(構造主義, structuralism)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심리학과 철학에서 말하는 구조주의는 그 개념이 다소 차이가 난다. 다만 각 구성 요소들의 상호 관계성의 측면에서 전체에 작동하는 어떤 원리를 파악한다는 점은 똑같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구조주의는,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빌헬름 분트에 의해 정립된 개념이다. 분트는 인간 의식의 이루는 구조의 구성요소를 감정과 지각의 두 가지로 나누고, 각각을 분석함으로써 인간 의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구조를 이루는 각각의 구성요소, 즉 뼈대들을 분석하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나 원인을 찾아내는 방법론이다. 이는 심리학이 철학과 구별되는 과학적 학문의 토대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간혹 이를 구성주의라고 번역된 것이 찾아진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구성주의(Constructivism)는, 인간의 인지, 즉 지식이 외부로부터의 학습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이미 경험한 것을 토대로 해서 지식과 의미를 구성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세상과 상황, 현상등을 이해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주로 인지심리학과 교육심리학에서 중요한 이론적 토대로 삼는다.
철학에서의 구조주의란, '하나의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먼저 그 현상이 포함된 전체 구조를 설정하고, 각각의 다른 현상들이 서로 얽혀 있는 상호 관계성에서 그 전체 구조를 해석함으로,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철학적 방법론'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이 철학적 구조주의 개념 형성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구조는 체계와는 다르다. 체계는 각각의 여러 요소, 혹은 다양한 요소들로 구성된 각각의 집합들이, 짜임새 있게 관계를 형성하여 조직되고, 결합한 통일된 전체를 말한다. 반면에 구조주의에서 구조는, 어떤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과 요소들에서, 비록 표면적으로 의식되지는 않지만,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원리가 발견되는 얼개(전체를 구성하는 뼈대)'를 말한다. 대표적인 구조주의 철학자인 레비스트로스는, "구조라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요소들과 여러 집합들의 관계들 사이에 불변하는 유사점이 드러나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 구조 분석은 '어떤 일을 성립시키는 다양한 요소들 사이의 상호 기능적 연관을 분석하여, 다양성 너머에 보이지 않는 근본적이고 공통적인 특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고전적인 관념론을 벗어나 사회와 개인을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현대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 역사학 그리고 심리학과 경제학, 문학과 예술을 포괄하는 인문 경제 사회과학의 주류를 이룬다. 즉 내면적 본질보다는 상황과 그 상황을 구성하는 환경과 구조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면 상황주의 심리학(대부분의 사회심리학), 상황주의 심리학에 입각하여 사회구조 전체를 융합적으로 경제와 사회를 연구하면 행태경제학(행동경제학)이 된다. 이러한 상황주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켜 상황주의자라 부른다.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상황주의자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이기주의자라기보다는, 합리적인 개인주의자에 가깝다. 그 이유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각각의 상황과 구조를 파악하여 개인과 사회를 이해하고, 그에 맞춰 적절하게 처신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긍정적인 의미의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똑같이 상황주의로 번역되어 사용되지만 그 의미가 다른 것으로 예술의 한 사조로서의 'Situationalism'(상황주의)가 있다. 예술 사조로서의 상황주의는 구태의연하고 정형화된 기존의 체제에 저항한다. 의례적이고 일상적인 관습, 혹은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다. 이분법적인 고정관념이나 편견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다원적 사고와 진보적 사고, 즉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가 그 바탕에 깔려있다.
1968년 5월에, 프랑스 정부의 실정과 사회의 모순에 저항하여 일어난, 소위 '68 혁명'을 주도한 세력이 상황주의를 표방하였다. 이들은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거의 모든 형태의 일체의 권위를 모두 거부하였다. 소위 '억압이 없는 현실적 원칙을 관철시키고자 일체의 모든 권위에 저항하는 위대한 거부'를 하였다. 물질 만능주의를 거부하며 "더 많이 소비하라, 더 빨리 죽으리니"라는 구호를 내걸기도 했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평등하게 고르게 사람이 사는 세상, 인간다운 삶, 진정한 평등주의가 일상의 삶 속에 고루 이루어지는 생활 민주주의를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68 혁명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자본주의와 현실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상황주의 운동은, 그들이 개혁적이고 이상적인 새로운 사회주의를 모델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지만, 현실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구소련이 해체가 되고, 자본주의 비약적인 성장과 함께 아쉽게도 역사의 그늘 뒤로 숨어 버렸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예술적 사조, 그리고 정치적 이념으로서의 상황주의가 자본주의의 주류 문화체제 속에 흡수되고 하나의 경향으로 쇄락하고 만 것은, 결국 인간이 꿈꾸는 모든 유토피아가 인간의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문제의식을 인류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오랜 역사에 걸쳐서 상황주의에 입각하여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째튼 상황주의의 각 분야별 개념을 살펴봤을 때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닌 보다 나은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포스트모더니즘적 가치를 지향하는 데에 있다. 상황주의 운동이 남긴 그 정신은 오늘 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근래에 개인 혹은 대중은 “진실이나 본질보다는 처한 상황에 유리하도록 움직인다”는 심리적 상황주의로 해석하여, 포퓰리즘(대중 영합주의)의 정치적 편향을 설명한 사람은 퓰리처상 수상 이력을 가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Maureen Dowd)다. 그녀는 정치 칼럼에서, ‘포퓰리즘은 좌우 어느 쪽으로도 움직일 수 있는데, 이것은 상황주의(Situationism)로부터 기인한다'라고 보았다. 모린 다우드의 분석처럼, 상황주의가 본래의 합리적 개인주의의 신장 논리를 벗어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상황논리로 잘못 사용되어, 포퓰리즘과 같은 집단의 이익이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편향되어 버리면, 악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평범한 것이 되고 불의를 용납하고 양심을 덮어버리는 정치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심리적 합리화의 논리적 도구로 변질된다. 누구나 손가락질하는 '기생충의 생리'도 집단 심리 속에 파묻히면 정당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래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면서 '처한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상황 주의자'와 구별하여 '기생충의 생리' 적 특성을 가진 자들을 '상황론자'라고 특정하겠다.
투견으로 길러진 개는 소처럼 순해 보여도, 일단 목줄이 풀리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해진다. 즉 조건과 환경이 갖춰지면 본색이 드러난다는 말이 되겠다. 주인이 통제하지 않는 고삐 풀린 싸움개는 스스로 그 천성을 버리지 못한다.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걸레다. 정말 위험한 사람은 속으로 자기 원래 본성과 감정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다. 상황논리에 따르면, 어제의 나쁜 놈, 악한 놈 지금도 여전히 나쁘고 악한 놈도 오늘의 선한 놈 정의로운 놈으로 얼마든지 변신가능해진다. 배신은 해 본 사람이 잘한다. 부뚜막에 한번 올라가 한번 고기 맛을 본 고양이는 반드시 또 올라간다. 나쁜 일도 추악한 일도 강도 도둑질도 안 해 본 사람보다 해 본 사람이 그 맛을 아는 사람이 또 한다. 상황논리는 역설적으로 대중을 우중화, 노예화시키는 설득과 세뇌와 세탁의 논리로 유용되는 정말 위험한 논리다. 악과 불의를 용납하는 자기합리화와 설득논리로써의 상황론은 기회주의적이고 자기보신적 차원이라는 점에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이현령, 비현령의 논리, 이것도 나쁘지만 저것도 나쁘다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양비론과 같은 맥락에 있다.
양비론(兩非論)이란 "맞서서 내세우는 두 말이 모두 틀렸다는 주장이나 이론"을 말한다. 얼핏 생각하면 중립을 지향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양쪽 다 잘못을 거론하는 양비론은 결코 중간적인 입장, 즉 중립이 될 수 없다. 양비론은 문제의 본질적인 잘못 보다는 문제를 겪고 있는 상황이나 대상(피해자)의 잘못까지 비판의 초점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비록 문제를 야기한 주체가 명백한 잘못이 있더라도 그가 강자일 경우, 실제적인 심리적 타격과 충격은 약자(피해 당사자)가 더 심하게 입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잘못이 더 큰 쪽에게 힘을 실어주는 형국이 된다.
“양비론을 펴는 것은 사회 발전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 토론을 죽이는 행위이다”. 홍세화 선생의 말이다. 양비론은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찬성과 반대 등의 대립구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지엽적인 것에 집중하게 만들어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아 버린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문제의 개선과 정상적인 발전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가로막아 버리는 심리적 상황론자들의 대표적 논리들이다. 이외에도 문제 해결을 위한 토론의 장에서 대안 없는 비판을 금지하거나, 대안이 있는 비판만을 요구하는 것. 또한 토론을 죽이는 행위다. 왜냐하면 토론이란 문제를 제시하고, 문제의 공론화를 통해 합리적인 대안의 모색이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비론은 문제의 본질을 분산시킴으로써 암묵적으로 강자의 불의를 정당화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논리적 토대를 제공한다.
"우리는 어느 한편을 들어야 한다. 중립은 억압하는 자만 도와줄 뿐, 억압받는 사람에게는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침묵은 고통을 주는 사람에게 동조하는 것일 뿐,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결코 힘이 되지 못한다. 때때로 우리는 간섭해야만 한다. 인간의 삶이 위태로워졌을 때, 인간의 존엄성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국가의 경계와 인간의 감성은 무관한 것이 된다. 남자와 여자가 그들이 속한 인종 때문에 그들이 가진 종교 때문에 또는 정치적 견해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되는 바로 그 장소, 그 시점이 세상의 중심이 된다." -Elie Wiesel (The Night Trilogy: Night/Dawn/The Accident)-
양비론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기저는 어디에 있을까? "중간은 '가공(架空)의 자리'이며 방관이며, 기회주의이며, 다른 형태의 방황이다" 신영복 선생의 말이다. 양비론의 밑바닥에는 그야말로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하는 기생충의 생리가 자리 잡고 있다. 즉 ‘기회주의’, ‘보신주의’라는 심리적 상황론이 그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양비론은 전형적인 기회주의로 옳고 그름의 기준이 아니라 중간자의 입장에서 향후 추이를 지켜본 후 이득이 되는 유리한 편에 서겠다는 전형적인 기생충의 생리다.
기회주의는 외부의 평가와 판단에 연연하는, 자존감의 결여로부터 비롯된다. 자존감의 결여에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의 결여와 계급성(사회적 위치와 역할)의 결여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보신주의라 함은 판단의 기준이 옳고 그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피해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황론자들은 포퓰리즘에 매우 민감하면서도, 정작 대중 속에서는 냉소적으로 방관한다. 교양과 지성과 도덕을 빙자하여 행동으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실제로는 향후 드러날 결과의 이해득실에 따라 적극적으로 숟가락을 얹고 감추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요 보신주의자들이다.
선비가 말해서는 안 될 때에 말을 하면, 이는 말로 이익을 얻으려는 속셈이고, 말을 해야 할 때에 말을 하지 않으면, 이는 침묵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속셈이니, 이는 모두 도둑질과 같은 짓이다.(맹자, 진심하)
마르크스는 "존재가 인식을 규정한다'라는 유명한 테제를 남겼다. 쉽게 말해, 현재 거하고 있는 사회적 자리 또는 사회적 위치가 한 개인의 인식과 생각을 결정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진보와 보수, 좌우를 막론하고 소위 지식인, 교양인이라 자처하는 사람이 사안(事案)의 본질적인 문제보다 양비론에 더 공을 들이고 있다면, 그가 아무리 훌륭한 철학과 학문적 성과와 사회적 명함 가지고 있더라도, 현재 그가 담그고 있는 물이 어디인가를 살펴보면 얼마든지 추측이 가능해진다. 그것이 공공연한 공개적 표명이라면, 자기만의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기때문이다. 다시 말해, 누구나 어려움을 겪는 난관과 혼란의 와중에서 결과적으로 어떤 이익을 취하고 있고, 현재 무엇을 누리며 살아왔는지 혹은 어떤 손해를 감수하고 있는지를 보면, 대략적인 추측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겉과 속, 평소의 주장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표현하는 것은 기예요 재능일 뿐, 그의 인격과 삶을 지탱하는 가치관 또한 전혀 별개의 것이다. 그의 진짜 인격과 삶의 가치관은 그가 감추고 있거나 표현하지 않는 곳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물론 한 개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 인격 그리고 가치관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그것을 평가하고 판단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다만 그 개인의 삶이 다른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주거나 침해하거나, 또는 그가 연명하는 삶의 방식이 사회와 공공의 이익을 자양분으로 하여 살아가거나, 사회적 책임을 요하는 공적인 삶과 연계되어 있을 경우에 마땅히 판단되고 평가되어야만 한다.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공자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말문을 막히게 한 역사적 인물들이 몇 되지 않는다.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살인강도 떼 도적의 괴수인 도척이다. 그는 노골적으로 공자를 위선자로 취급하고 몰아붙인다. 그는 공자 면전에서 태연히 사람의 간을 씹으며 등골이 오싹해지는 악마적 살기의 위협을 내뿜으며 공자를 다그친다. “나는 나쁘고 악한 놈이지만 나는 인간의 본능적 추악함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여 속과 겉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추악한 본능을 속에 감추고 위선을 떠는 너와 비교하면 내가 더 나았으면 나았지 너보다 못한 것이 없다. 나는 악하고 나쁜 놈이지만 너는 속과 겉이 다르니 나보다 더 비겁하고 나쁜 놈이다.". 도척은 소위 피장파장론에 양비론까지 들먹이며, 자기의 악함을 정당화하고 합리화 시켰다. 그러나 비록 타당하고 바른 말이긴 하지만, 도척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섬뜩하게 뿜어나오는 사악한 죽음의 살기(殺氣)는 공자가 벌벌 떨며 한마디도 못할 정도로 공자를 침묵시켰다.
'무식한 인간이 소신과 신념을 가지면 위험해진다'라는 말이 있다. 굳이 도척의 예를 더 장황하게 들지 않더라도 부정하고 사악한 자가 논리와 명분을 가지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상황논리를 갖춘 명분은 추구하는 목적이 비록 그 과정이 아무리 사악하고 부정한 것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인정할 만한 결과만 보장된다면, 그것이 합리적이고 가능한 것으로 탈바꿈된다. 늑대가 양으로, 악마가 천사로 얼마든지 변신 가능해진다. 하지만 동기와 목적이 아무리 선하다할지라도 그 과정이 악하다면, 결국 선을 가장한 악일 따름이다.
인류의 위대한 정신은 환경과 시스템에 영향받거나 환경에 굴복하고 권세에 타협하거나 굴종하며 생존본능에 순응한 80%가 아니다. 끝까지 굴복당하지 않고 이성과 인간다움을 지킨 20%의 사람들에 의해 지탱해 왔다. 이처럼 이기적이고 자기 본위적인 상황주의는 약육강식의 동물적인 본능 충족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윤리 도덕적으로 가능하도록 자기를 합리화시키고, 나아가 인간을 설득시키는 논리적 장치가 되기 때문에 사악하고 치명적으로 위험한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정치에서 상황론과 양비론이 기승을 부린다. 부패한 정치권력은 갈수록 더욱 사악해지고 기생충보다 더 심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도 타락한 위정자들과 관리들, 그리고 사회지도층들이, 자신들의 수치가 드러나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방귀 뀐 놈이 더 성낸다고 자신들의 이중성과 부끄러운 그늘들이 백일하에 드러날수록, 오히려 비판과 책임의 화살을 돌려 국민대중에게 더욱 더 치밀하게 도덕성을 요구한다. 그럴수록 더욱 엄격한 법과 정의의 잣대를 들이대며 대중을 겁박한다. 법도 정의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빙산은 보이는 부분이 보이지 않는 부분의 1/10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키워드는 사랑, 행복, 소통, 공감, 웰빙 등등 희망과 기대에 관련된 것들이다. 우리가 거북해하고 불편해하는 혐오감, 차별, 불공정, 불평등, 불신, 좌절, 불안, 무기력, 무관심...기타등등의 키워드가 빙산의 일각 같은 전자의 키워드들을 지탱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조선조의 한 왕이 정승들에게 "광풍이 몰아치는 벌판에서 초가삼간을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영의정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방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광풍이 쇠잔해지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이 얘기는 우리나라 지도계층의 철학을 잘 보여 준다. 사방의 문을 열어 놓으면 초가집은 무너지지 않겠지만, 방 안에 있던 민초들은 다 어떻게 될 것인가? 모두 바람에 날려가서 죽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끈질기게 버텨왔다. 7년 전쟁에서 절반에 가까운 민초들이 사라진 임진왜란이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이면우, 2004 월간조선 칼럼).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세 가지 부류의 사회 공적(社會公敵)에 대해 이면우 교수(서울대 산업공학, W이론)는, "1. 무식한 사람이 전문직에 앉아 있는 경우 2. 무식한 사람이 소신을 갖고 있는 경우 3. 무식한 사람이 부지런한 경우"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에 개인적인 사족을 더하자면, "4. 사악한 사람이 명분(신념)과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경우, 5. 유식한 사람이 양비론을 가지고 있는 경우, 6. 생각 없는 사람이 상황론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 하겠다. 덧붙인 사족의 잣대로 보자면, 아무 생각없이 그저 남의 생각, 남의 논리에 따라 사는 보통 사람도 결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사회공적' 이 되는 셈이다.
"인간은 세 종류가 있는데, 첫째가 남의 잘못에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우둔한 사람', 둘째가 남의 잘못에서 배우는 현명한 사람, 셋째가 '실수 없이 자기 길을 찾는 천재'다." 탈무드에 나오는 글이다. 또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자신을 의롭다 여기는 죄인들과 다른 하나는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는 의로운 자들이다." 이는 파스칼의 통찰이다.
글을 맺기 전에 다시 사회 공적에 대해 잠깐 더 생각해 보자. 일반 대중들이 정치를 혐오하고 불신하며 무관심과 무기력에 빠지면 그 반대급부로 이익을 취하고 기득권을 향유하는 자가 누구인가? 그 불의하고 부패한 기득권에 기생충처럼 붙어서 그들의 마름을 자청하며 떡고물을 햩고 빠는 자들이 누구인가? 주권을 가진 보통의 시민으로서 기생충이 아닌 온전한 인간으로 대접받으며 살고 싶다면, 온전한 인간으로 제대로 살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스스로를 기만하는 상황론에서 양비론적 시각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마땅히 고민해야만 할 것이다.
아무나 다 평론가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을 헤아리고,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이 세상을 헤아려, 올바른 선택과 결단을 하게 하는 지적 균형감각은 절실한 것이다.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남의 생각에 의존하거나 누군가에 의해 잘 학습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나의 선택과 결단에 의해서 나뿐만 아니라 타인들까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불행해지고 비참해진다면, 한번 쯤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아무리 절박하고 불행하며 피곤한 삶일지라도 인간이 기생충처럼 삶을 연명하거나, 혹은 누군가로부터 소나 닭, 개· 돼지같은 가축 취급을 받으며 노예처럼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은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또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다. 특히 사람은 꼭 좋은 놈과 나쁜 놈만 존재하지 않는다. 싫은 놈, 괜찮은 놈, 선한 놈, 잘난 놈, 못난 놈, 똑똑한 놈, 멍청한 놈, 징그러운 놈, 악한 놈, 사악한 놈, 추악한 놈, 기분 나쁜 놈, 재수 없는 놈, 깨끗한 놈, 더러운 놈, 냄새나는 놈, 이상한 놈, 수상한 놈, 기타 등등 거기에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시각에 따라 감정에 따라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따라, 조금, 약간, 아주, 매우, 심하게, 약간 더 심하게, 아주 심하게... 등등 양과 정도를 나타내는 부사와 형용사를 어떻게 추가하고 조합하느냐에 따라 그 양상과 양태가 전부 다 달라진다.
내가 현재 어떤 자리에 거하고 있는가? 자신에게 정직하지 않고서는, 거울과 같은 다른 대상이나 사물을 통해서 자신을 비추지 않고는, 결코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자기의 진면목을 비추고 헤아리는 대상이나 사물은 매우 다양하다. 단지 우리가 미처 생각하고 있지 않거나 모르고 있을 뿐이다. 홍세화 선생은 한 방법을 제시한다.
"극좌에서 극우에 이르기까지 선을 긋고 그 선 위에 스스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자리를 분명히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적어도 정치평론이나 사회평론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좌표 분석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 좌표 선상에 자신의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양비론에서 벗어날 수 있고, 평론에 필요한 균형감각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나는 정치적 이념이나 신념으로 따진다면, 분명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그렇다고해서 중도도 아니다. 또한 그리 도덕적이거나 그리 양심적이거나, 그리 정의롭지도 못하다. 혹자의 말을 빌리면, 나는 단순한 '생계형 소인'에 가깝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인 척' 하는 향원형 속물의 범주에 해당한다. 많이 무식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닌 척' 시침떼며 살아가는 일개 필부에 불과하다. 다만 사람다운 삶의 기준으로써 인간의 도리와 상식과 원칙에 대해서 늘 생각할 뿐이고,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 줏대없이 부화뇌동하지 않으려고 애써 의심하며 경계할 뿐이며, 아무 생각없이 그저 남에게 휘둘리며 살지않으려고 애써 노력할 뿐이다.
불현듯 궁금해진다. 내가 한 손으로 무언가를 손가락질할 때 손가락의 방향은 어김없이 두 갈래로 나눠진다. 무언가를 향한 한 손가락, 그리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나를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 손가락이 이구동성으로 가르키고 있는 지점이 어디일까? 홍세화 선생의 지적처럼, 극좌에서 극우로, 극진보에서 극보수로, '아주 나쁜' 에서 '아주 좋은'으로, '아주 악한'에서 '아주 선한'까지 선을 긋고 내 좌표를 남몰래 찾아 본다. 역설적으로 내가 스스로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사실이, 어쩌면 내게 다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시 해 본다. 다른 이의 좌표는 내 관심 밖이다. (2015.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