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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23. 2017

메기 효과

'메기 효과'라는 것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미꾸라지를 싱싱한 상태로 오래도록 살리려면 미꾸라지가 담긴 수조에 천적인 메기 한 마리를 넣으면 되는데, 이유는 미꾸라지들이 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피해 다니느라 활발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미꾸라지 전체집단이 오래도록 싱싱하게 살아 있다는 이득에 비하면 메기가 미꾸라지를 잡아먹음으로써 발생하는 손해는 하찮은 것이다.


일면 타당성이 있는 이야기다. 내가 아는 원래 이야기는 '북해의 청어와 물메기' 이야기다. 네이버와 다음 백과사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메기 이론은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아널드 토인비 박사가 즐겨 사용하였고, 국내에서는 1993년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경영혁신을 내세우며 인용하기도 하는 등 경제ㆍ경영 및 다양한 분야에서 자주 인용되는 신경영의 핵심이론이다.(네이버 지식백과, ' 메기론' /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다시 말해서 이는 기업경영에 적용되는 이론으로 보면 되겠다. 내 둔한 머리로 토인비가 그런 소리를 자주 했는지 확인이 안 된다.


그런데 내 기억이 아직도 녹슬지 않았다면, 수십 년 전 모 대형교회의 저명 설교가인 곽모 목사의 설교 예화에서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는 흔히 시련과 역경이 신이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을 단련시키는 수단이라는 비유로 곧잘 인용되기도 한다. 나 역시 시련과 스트레스에 관련하여, 발상의 전환 차원에서 몇 번 인용하여 써먹은 적이 있다.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러 설교 예화가 성장 발전하여 경영이론, 역사이론으로 둔갑하여 백과사전에까지 등재되었다. 내가 안다고 하는 작은 지식의 테두리 안에서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가까운 기억으로는 2012년 대선 때는 정치인들이 너도 나도 경제회생을 들먹이며, 메기론을 떠들어 대었던 시절도 있었다. 개인적인 소견으로 한국교회의 비정상적으로 성공적인 양적 성장 모델이 기업경영의 모델로, 나아가 국가경영의 벤치마킹 모델로 둔갑하여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이게도 현재 우리나라 나라 국가 채무추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2015년 국가부채 600조에 육박한다. 2014년 대비 57조원이 늘어났다. 국가재정은 38조원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단순 무지한 셈법으로 따지면, 그래도 그럴듯한 가시적인 양적성장은 이룬 셈이다. 1조라는 금액은 한 사람이 은행에 정기예금을 들었을 경우, 5000년 동안 매일 60만 원씩 써도, 원금은 1조 그대로 남아 있는 상상조차 안 되는 금액이다. 만원 지폐로 1억 장, 쌓으면 백두산 높이(2744m)의 4배가 된다고 한다. 차로 운반하려면, 5톤 트럭 22대가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 속담에 '닭 길러 족제비 좋은 일 시킨다'라는 말이 있다. 천문학적인 숫자의 채무의 증가량과 재정 적자의 속도와 현실적인 주변 삶의 질적 실태를 고려할 때, 나라의 국고에 어딘가로 돈 빠지는 구멍이 분명 따로 있다고 개인적으로 추측해 본다.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 버려  정상적으로 사물이나 상황을 올바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켜, 이 또한 약물중독이나 심리적 중독과 마찬가지로, 중독(中毒)이라고 한다. 중독 중에서 특히 종교 중독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심리적 현상이, 바로 맹신(盲信)과 맹목(盲目)이다. 해당 구성원의 맹신과 맹종(盲從)은 종교집단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종교 공동체를 유지하고 결속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종교계의 일부 혹은 다수의 유명 지도자들이 상식 이하 인간이하의 언행과 비정상적인 이분법적 사고, 사회법적 지탄을 받는 각종 비리, 비정상적인 부의 착복과 축적, 세습, 심지어는 윤리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성적 스캔들을 예사로 저질러도, 그 안에서는 쉽게 용납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종교 중독과 건전한 신앙은 반드시 구별되고 분변 되어야 한다. 


여담으로, 일주일에 한두 번 목사가 해석해주는 설교에만 의존하지 말고, 성서를 액세서리처럼 들고만 다니지 말고, 성서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최소한 10번 이상 통독할 수 있다면, 적어도 종교 중독에는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쯤 되면 인간의 말과 진리의 말씀을 분변 하고, 지가 복음과 내가 복음 그리고 개똥철학 정도는 당연히 구별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두꺼운 전문서적을 열 번 정도 반복해서 읽는다면, 생각의 머리가 트이고 관련 분야의 전문지식이 자연 형성되기 마련이다. 하물며 인류 최상의 양서라 불리는 성서는 두말할 것도 없다. 물론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이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참고로, 코헛의 자기심리학에 따르면,  종교중독은 일종의 자기애적 행동장애로 주물애착(fetish)과 융합된 것으로 본다. 주물이란, '그 자체로 힘이 있다고 믿는 대상이나 관습, 또는 비합리적인 헌신을 바치는 대상이나 관습'을 의미한다. .


종교 중독상태에선 시련이든 역경이든, 부조리한 현실이든, 온갖 비리와 범죄든, 모든 것을 신의 뜻, 신적 권위에 갖다 붙이면 다 통한다. 신의 뜻이면, 무엇이라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된다. 계시된 말씀을 초월하여 부자도 바늘구멍으로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축복의 증거가 된다. 황금송아지도 우상이 아니라 축복의 상징이 된다. '실수하는 것은 인간이고, 용서하는 것은 신이다'(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라고 말한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1688~1744))의 통찰은 대단한 역설을 내포한다. 종교 중독의 문제는 신이 아니라, 선의든 악의 든 간에 그렇게 대중을 맹목과 맹신으로 이끄는 인간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 양자에게 모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 축복과 저주, 죄와 심판, 대항할 수 없는 신적 권위의 주입식 강조 등등은 공교롭게도 동물을 조련하는 고전적인 방식인 채찍과 당근 즉 반응과 조작, 강화와 처벌이라는 행동심리학의 주요 개념들과 많은 유사성을 가진다. 요즘 유행하는 다양한 자기계발 업계에서 애용하는 긍정심리학의 바탕이 바로 이 행동심리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마틴 셀리그만으로 대표하는 긍정심리학은 주요 개념인 '학습된 무기력'으로부터 출발한다. '학습된 무기력'은 '피할 수 없거나 극복할 수 없는 환경에 어쩔 수 없이 반복적으로 노출된 경험에 의해서 자신의 능력으로 피할 수 있거나 극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상황에서 자포자기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 이 개념은 '실험실에서 통제 불가능한 전기충격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개가, 정상적인 환경에서 나타내는 반응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개념'이다. 긍정심리학은 바로 이점에 착안하여 역으로 무기력이 학습될 수 있다면, 이를 극복하는 것도 학습으로 가능하다는 가설로부터 출발한다. 


심리학, 커뮤니케이션학, 뇌 과학이 종합된 신경언어 프로그래밍(NLP)도 그 맥락을 같이한다. 긍정심리학이 개인의 행복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NLP는 개인과 집단을 망라한다. 그래서 NLP는 '인간 두뇌를 사용하여 목표 성취를 위한 모든 심리적 커뮤니케이션과 마케팅 그리고 레토릭(수사학) 기법을 총칭한다'라는 관점에서 실제로 개인 및 집단의 심리전 차원에서 많이 활용된다. 요즘 소위 흔히 볼 수 있는 SNS 워리어, 댓글부대, 쓰레기 언론들이 주로 사용하는 전형적인 여론몰이와 여론조작 형성의 이론적 근간이 되는 심리 수법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셀리그먼은 그의 긍정심리학의 주요 개념을 첫머리글자를 따서 'PERMA'로 간략하게 설명한다. 즉, 긍정적 정서(Positive emotion), 몰입(Engagement), 관계(Relationship, 대인관계, 사회적 관계), 의미(Meaning, 소속감, 기여감), 성취(Accomplishment)의 다섯 가지 요소다. 그 목표는 행복한 삶, "행복하며 풍족한 삶, 더 바랄 것도 없고 더 올라갈 데도 없고, 더 채울 것도 없는 번성한 상태"를 지향한다. 행복한 삶을 이루는 조건으로, 즐거운 삶(pleasant life), 적극적인 삶(engaged life), 의미 있는 삶(meaningful life)의 세 가지 측면에 둔다. 물론 당연히 여기에는 개인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최근에는 긍정심리학에서 좀 더 발전하여 'Resilience'(회복탄력성) 개념을 많이 강조한다. 즉 회복 탄력성이란, “곤란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고 환경에 적응하여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능력”이다. 구체적으로는 “변화하는 상황에 알맞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으로 자기조절과 대인관계 능력을 강조한다. 자기조절은 '감정 조절력, 충동 통제력, 원인 분석력'을 말하며, 대인관계 능력은 소통과 공감능력, 자아 확장력으로 구성된다. 이를 학습과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또한 개인의 행복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긍정심리학과 동일하다.


우리가 흔히 듣고 보는 숱한 종교적 메시지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동일한 맥락 선상에 있다. 다만 그 적용 방식이 다를 뿐이다. 역경이나 시련이 개인에게는 분명히 견디기 힘든 고난이다. 그러나 오히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그것이 개인 성장의 발판이 될 것이라는 긍정적 사고는,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위로와 격려의 차원에서 시련이나 역경에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자는 말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긍정적 사고로 무장하여 희망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시련과 역경과 실패가 멈추지 않고 계속 반복되는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 실패의 원인까지 무분별하게 개인에게로 돌리는 일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다. 


사회적 성공의 기회에 있어서 비록 그 경쟁의 과정은 불가결한 것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보편성과 기회의 균등성은 주어져야 한다. 즉 능력이 부족하다면,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그 결핍을 채우고 성공의 조건을 충족할 때 마땅히 그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성공과 실패가 어떤 특정 기준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면, 행복과 불행이 이미 결정론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이는 분명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렇듯 구조적 시스템의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마저 개인의 능력, 개인의 책임에 그 소재를 두고 그렇게 몰아가는 것 또한, 종교적 맹신과 맹목을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한 맹종의 강요는, 누구나 간절히 원하는 행복의 기회마저 박탈하는 부조리한 시스템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시켜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메기 효과로 돌아가 보자. 앞서 말했듯이, 메기 효과가 청어가 미꾸라지로 둔갑되어 기업경영의 혁신이론으로, 더 나아가 국가경영이론으로 벤치마킹되고 있다고 지극히 개인적인 추측을 해 본다. 종교적 맹신주의와 같이 사회적으로 집단적인 맹신과 맹종을 이끌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메기 효과를 집단관리의 차원에서, 집단의 경쟁력을 넘어 사람 개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입장을 바꾸어 미꾸라지 개개의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 해보자. 문제가 보다 뚜렷해진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끔찍한 공포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미꾸라지를 사람 개인으로 대입해 보면 더욱 끔찍해진다. 잠시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더욱 명백해진다. 어찌 보면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집단이 아닌 사람 개인에게 적용될 때는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말 그대로 적자생존, 약육강식, 생존과 도태라는 동물의 법칙들이 모양을 달리하여 고스란히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경쟁과 도태라는 신자유주의의 성장 원리를 더욱 활성화하는 경제원칙이기도 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조건 정신없이 뛰어야 한다. 생각할 틈이 없다. 


이러한 원칙은 지배그룹, 경제 권력을 이미 확보하고 행사하는 경영자 또는 관리 그룹에게서는 그야말로 황금 채찍이 아닐 수 없다. 복종과 충성, 더 나아가 종교적 맹신과 같은 맹종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수단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미꾸라지를 수조에 담은 원래의 목적을 생각하면 더욱 뚜렷해진다. 애니메이션 한국영화 '사이비'는 종교적 맹신이 뿌리를 내리는 생태적 심리적 환경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종교적 맹신과 맹종으로 이끄는 방법론이, 국가경영철학의 한 수단으로 접목된다면, 지도자가 개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리는 예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시 생각을 바꾸어 청어든 미꾸라지든, 싱싱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애를 들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적절한 환경으로 보다 넓게 보다 크게 개선시켜 주는 것이다. 적절한 환경이란, 자연 그대로의 상태가 가장 좋지만, 최소한 그에 가깝게 하여 충분한 양의 산소공급, 최적의 온도 유지, 맑고 깨끗한 물을 계속 순환하여 공급하는 일 등등이 되겠다. 미꾸라지를 활력을 되찾을 수 있게 만드는 다양한 개선들이 올바른 해결책일 것이다. 


다만 미꾸라지를 왜 수조에 담아 두고 있느냐? 하는 목적을 고려한다면, 주인 된 사람의 입장에서는 위의 해결책과 더하여 수조에 메기를 투입하는 방법이 합리적인 이론으로써 그 정당성을 갖는다. 따라서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경영이나 집단의 경쟁력 강화와 지속적인 동기부여의 차원에서는 어느 정도 타당성을 있으며, 나름의 탁월한 효과를 이루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것을 보편화, 일반화하여 특정 경제집단의 구성원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 무분별하게 적용을 시도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경우, 과연 '이론으로써 타당한 과학적 근거를 갖느냐?' 가 관건이 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일시적인 충격요법은 될 수 있을지언정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과학적인 근거마저 불투명하다. 교훈을 얻을 수는 있다. 기업의 경쟁력 향상에 도음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정신 메커니즘은 청어 혹은 메기와 비교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교훈을 추출하든, 이론을 추출해 내든, 맹목적으로 맹신하기 이전에 마땅히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흔히들 이론이라 하면, 사실을 근거로 하여 논리를 갖춘 '짐작'이나 '추측' 또는 일시적인 아이디어 같은 걸로 생각한다. 그래서 논리적 타당성이 있어 뭔가 그럴듯하게 이해된다면, 특히 거기에 권위라는 것이 개입되어 있다면, 그게 뭐가 되었건 별다른 의문이나 이견을 갖지 않는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맹신은 맹목적인 권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실 많은 책, 특히 자기계발서, 기업경영이론, 상업적인 목적의 대중성을 목적으로 하는 가벼운 심리학 서적 등등과 이와 연관된 강연들에서 갈급한 일반 대중에게 이런 오해를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 이들 앞에 어김없이 붙는 '전도사'라는 명칭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론이란 게, 대중적으로 합리적이고 훌륭한 것으로 인정되면 법칙이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즉 불완전한 이론일지라도 갈고 다듬어서 그보다 더 중요한 무엇, 즉 법칙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생각이 논리적 지적설계에 의해서 나온 이론과 과학적 이론에 대해 많은 혼란과 오해를 낳는다. 


하지만 과학에서 말하는 '이론' 이란 다른 의미를 가진다. 과학에서 말하는 사실은 흔한 그 무엇으로 그 자체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실은 현상 속에 드러나 있는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은 현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이란 관찰 결과로 입증된 것이다. 그 사실들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 가설이다. 가설을 실험으로 입증하여 나온 것이 법칙이다. 이러한 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설명 구조를 이루는 것, 이것이 바로 이론이다. 즉 과학적인 이론이란, 사실, 가설, 법칙 등을 기초로 나오는 통일된 '설명'을 의미한다. 


따라서 과학적 사실이 단편적인 특정 지식이라 한다면, 이론은 그 사실들을 하나의 체계로 갖추어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보편적 지식을 의미한다. 보편적 지식이라 함은 어느 한쪽에만 통하는 단편적 지식이 아니라 두루 통하는 지식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이 반드시 참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학은 비록 현재는 보편적으로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틀렸다고 증명하는 새로운 반증을 통해서 계속 진보하고 발전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론은 과학적 검증을 거치고 통일된 설명을 통해서 객관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건너뛰고 추측과 짐작, 그리고 결과론적인 한정된 경험만으로 잘 꾸며지고, 특정 조건이나 상황에 한해서 적용이 가능한 지적설계는 비록 논리적 타당성을 갖는다 할지라도, 최소한 과학이론으로써는 자격을 상실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딱 잘라서 옳은 것, 또는 틀린 것이라고 반박하고, 증명할 수 있는 여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적용이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말이 되겠다.


서점에 들러보면, 거의 대부분의 자기 계발서들이 빠짐없이 이구동성으로 긍정심리, 긍정 철학을 외치고 있다. 그야말로 긍정을 강조함에 지나쳐 긍정을 강요하는 것만 같이 여겨질 정도다. 거의 모든 매체들에 의해서 행복이 끊임없이 강조되고, 그 행복을 위해서는 물질적 사회적 성공이 마땅히 부각되고, 그 성공을 위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떨치고 긍정적인 사고를 부단히 계발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렇지 못하면 낙오자, 부적응자, 패배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단계 회사와 이단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주로 사용하는 거의 세뇌에 가까운 교육 방식과 아주 흡사한 것은 예사롭게 볼 일이 아니다..  


어째튼 이처럼 긍정과 행복이 시대적 패러다임으로 적극적 강조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의 삶이 불안정하고 부조리하다는 하나의 반증이다. 그것은 경제적 불안과 함께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한 전망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특성상 사회 구성원 각자에게 필연적으로 야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문제다.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쟁사회에서는 실패, 빈곤, 고난, 역경은 개인의 능력과 관계된다. 따라서 불안하고 불확실한 경쟁사회에서 행복을 추구한다면, 당신들의 능력을 바꿀 수 없으니 당신들의 생각을 바꾸라는 말이다.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시스템적 상황은 어쩔 수도 없고 피할 수 조차 없다면 그 상황을 시스템 탓, 세상 탓으로 돌리지 말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옷이 몸에 맞지 않다면, 다이어트를 해서라도 옷에 몸을 맞추라는 말이다. 만약 다이어트를 해도 옷이 몸에 맞지 않다면, 생각을 바꾸어 그것은 내 능력 탓이니 그렇게 맞춰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아라는 말이다.


자의든 타의든 부단한 학습과 세뇌로 이뤄지는 긍정심리는 마약과 흡사하다. 사회는 시스템에 의해 움직인다. 문제의 요인이 시스템에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종교적 맹신과 맹목과 같은 긍정심리로 잘 조장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시스템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지적하거나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세상 탓이나 하는 사회 무능력자, 부적응자, 실패자의 부정적 사고로 일방 매도해 버린다. 자칫하면 종북으로까지 내몰리기도 한다. 이렇게 매도되지 않으려면, 자가 검열 장치를 돌려서라도,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자기 몸에 옷을 맞추기 위해서는 일개미처럼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끊임없이 자기를 긍적정인 사고로 채찍질하여, '할 수 있다', '힘내라'라고 외쳐야 한다. 그것마저 약빨이 먹히지 않으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 '시련과 역경은 특별히 사랑하는 자를 더 튼튼하게 만들기 위한 신의 뜻'이라고 들은 풍월로라도 자기를 다독거려야 한다.


물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가 아니라 절망이다. 절망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의지를 꺾고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실패는 누구나 한다. 실패는 쓰라리지만 유익한 경험이 된다. 하지만 절망은 다르다. 절망은 상실을 초래하는 까닭이다. 절망을 이기게 하는 힘은 바로 긍정적인 사고에서 나온다. 긍정적 사고는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그 불행 앞에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아 있게만 하지 않는다. 불행과 시련 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케 하고, 그 가능성을 향하여 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삶을 살다 보면 너무 막막하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긍정적인 생각, 긍정적인 희망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도 분명 있다. 이처럼 시련과 역경을 이기게 하고, 불가능한 상황을 역전시키는 힘은, 삶에 의미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인간이 가진 위대한 정신이기도 하다. 건강한 믿음, 혹은 건전한 신앙도 여기 속한다. 


정상적인 인격과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면 우리 사회가 분명히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단지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침묵할 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사회적 분위기에 중독되어 있어서 알려고도 하지 않거나, 피부에, 마음에 와 닿는 그 느낌마저 무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생존하고 번식하는 본능에 의지하여 하루하루 부지런히 풀을 뜯어먹다가, 어느 날 갑자기 끌려와 인간의 제물로 받쳐지는 염소는 죽임을 당해도 그 죽임의 과정이 단지 아프고, 슬프고, 두려울 뿐 왜 죽어야 하는지 그 영문을 알리가 없다. 하물며 염소가 스스로 그게 숙명이요, 운명이라고 받아들일 리는 더욱 만무하다. 종교적 맹신과 맹종을 강요하듯, 너도 나도 그렇게 등 떠밀리듯, 정신없이 신봉하고자 하는 긍정과 행복의 철학에 대해서 잠시 멈춰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과연 그것이 지향하는 방향이 과연 작금의 현실에 합당한 것인지를 성찰하고 반성해야 한다. 인간은 결코 미꾸라지나 청어와 비교할 존재가 아니다. 하물며 누군가의 식탁으로 올라가고, 또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갈 식도락의 싱싱한 재료로 취급될 존재는 더욱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惡)은 거의 대부분 무지(無知)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올바른 인식이 없으면 착한 의지도 악한 의지와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줄 수 있다." 이 말은 알베르 까뮈의 말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일반 심리학의 관심과는 달리,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을 온전한 상태로 치료하는분야는 임상 심리학이다. 대부분의 인간 중심 심리학이 가진 인간 이해는 회복의 능력이 인간 본연의 심층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긍정심리학과 신경언어 프로그래밍은 특히 임상심리학의 유용한 이해 도구 중의 하나임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이러한 것들이 사회의 본질적인 부조리한 문제를 차단하고,  종교적 맹목과 맹종으로 이끄는 인위적 학습과 세뇌의 사회심리학적 도구로, 집단 혹은 개인에게 잘못 사용될 때를 문제 삼는 것이다. 


모르핀과 같은 마약을 포함해서, 비록 위험한 독소일지라도, 적정량을 세밀하게 잘 배합해서 사용하면 약이 된다. 그러할지라도 일정 기준을 넘어가면, 반드시 사람을 해치거나 심할 경우 생명을 잃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의 내면을 다루는 분야에서는, 모든 과정들이 지나칠 정도로 세세하고 엄격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말 죄송한 비유이지만, 긍정심리와 NLP(신경언어 프로그래밍)를 밥그릇과 도구로 하여 자칭 타칭 전도사로 자처하며, 마치 신앙처럼 사람들에게 무분별하게 주입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미꾸라지를 잡아먹는 메기와 같다. 비록 본의는 아니라 할지라도, 현재의 부조리한 현실에서 만큼은 그렇게 생각된다는 말이다. 다만, 누구보다도 사람에 대한 애정과 진정성을 가지고, 사회일선에서 열성을 다하여 사시는 분들까지 일반화하여 '메기'라는 표현을 한다는게, 마땅히 표현할 어휘를 찾지 못하는 아둔한 나로선,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실험실의  개와 달리, 인간은 반복적으로 불가피한 상황이나 환경에서 생래적으로 무기력하게 학습되지 않는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뿌리 깊은 나무는 비록 거센 폭풍우, 눈보라에 떨며 흔들리고 기울어지고 비록 꺽여 넘어진다 할라도 뿌리 채 뽑혀  쓰러지지 않는다. 무리를 이루고, 땅속의 뿌리들이 서로 얽혀 군생하는 약한 들풀도 마찬가지다.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는 성질,  즉 인간 내면으로부터 발견되는 회복탄력성 개념의 가장 큰 동력은 사랑이다. 열악한 상황과 환경에서도 인간됨을 잃지 않고,  아낌없는 사랑을 나누고, 부단한 격려와 지지를 경험한 사람이나 가족에 그 배경이 있다. 즉 진정한 사랑이 그 중심에 자리한다. 


진실로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긍정적 마음을 무작정 강조하기보다는 그저 따뜻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그 힘든 고통을 헤아려 줄 일이다. 능력의 유무를 헤아리기보다는 그것 때문에 고통이 있음을 알아주며 공감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 마음을 함께 하며 아낌없이 격려하고 변함없는 따뜻한 마음으로 지지해 주는 일이다. 시련 중에 있는 그 사람을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진정한 긍정적 사고의 원동력, 역경과 시련을 극복해내는 힘은 여기로부터 나온다. 신앙, 혹은 믿음의 위대한 힘도 역시 여기에 있다. 성서에 등장하는 역경의 대명사 욥과 요나의 정신 승리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에게 진실로 시급하고 절실한 것은, 미꾸라지들을 보상으로 긍정심리로 무장한 메기를 푸는 것이 아니다. 승자독식과 독선이 아닌 승자든 패자든 더불어 공생하는 삶, 곧 공존과 화합과 배려와 존중의 사회적 정신이 필요하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아래 위치에서는, 저 위에 보이는 골대를 향하여, 아무리 공을 찰지라도 헛수고일 따름이다. 부조리한 사회구조와 시스템의 근본적인 개혁이 더욱 절실하다 하겠다. 선거가 다가오니 맹목과 맹종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일상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는다. 물메기탕은 겨울 별미다. (2016.4.9 쓰고 4.11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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