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본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Manchester by the Sea, 2016)' 덕분에 생각하는 게 있어 인터넷을 살펴보았다. 그와중에 우연히 '공감능력 테스트'라는 말이 눈길을 끌었다. 주로 가십성 내용, 흥밋거리를 유발하는 유사 심리학으로 가득 채워진 사이트다. 유사 심리학이란, 과학적 근거가 불충분함에도, 대중적으로 심리학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을 통칭한다. '과학적 근거가 없다' 함은 엄격하게 통제된 환경 속에서 관찰과 실험으로 검증된, 충분한 과학적 데이터가 없다는 말이다. 단순한 호기심에 테스트해 봤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사람의 눈 표정을 보고 그 사람의 심경을 추측하는 테스트다. 이 때문에 생각이 약간 달라졌다. 언젠가 이와 연관이 있는 실험 연구에 관한 전문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의 거짓말을 체크하는 실험 연구다. 사람 눈의 미세한 홍채 변화를 감지하는 기술이 사용되었다. 물론 이 실험에 참여하는 실험대상자는 단지 모니터의 질문지에 자유로운 선택만 할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신체적 변화, 즉 눈동자의 미세한 변화를 추적하는 그런 첨단기계가 자기를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이 연구실험은 그 신뢰성에서 거짓말탐지기를 능가하는 상당한 수준까지 진전된 것으로 안다.
어째튼 '감정이입적 능력 우수, 오직 10%만 해당, 뛰어난 공감능력'. 이러한 테스트 결과는 내가 남다른 공감능력을 가졌다는 말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살아오면서 나름 패턴 읽기가 자연스레 몸에 밴 결과다. 개인적으로 익숙한 경험의 산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름의 결론을 먼저 내리자면, 상대의 표정이나 행동거지에서 느낌이나 정서, 내면의 정동을 정확히 포착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공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다. 더욱이 이러한 개인적 특성들이 곧 좋은 사람, 선한 사람, 어진 사람, 인격적인 사람임을 나타내는 단정적 표지 일리는 만무하다.
전형적으로 악한 범죄자 유형으로 알려진 반사회적 인격장애자 그리고 사이코패스는 공감능력의 결여가 그 특징 중의 하나다. 그런데 공감능력의 결여는 자폐증이나 아스퍼거 증후군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특징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일반화하여 사이코패스 혹은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들과 동일한 범죄자 유형으로 단정 지울 수는 없는 일이다. 공감능력을 가지고 개인의 품성이나 인격 수준을 판단하는 표지로 삼는 것은 무리한 시도라는 말이 되겠다.
그래서 그 근거로 삼고 있는 것들을 찾아봤다. 캐임브릿지 대학교수로 소개된 코엔은 영국의 심리학자인 'Simon Baron Cohen'이다. 캠브리지의 자폐증 연구 센터 (ARC) 소장으로 정신발달 병리학자이기도 하다. 자폐증의 전문가다. RMET는 "Reading the Mind in the Eyes Test"의 약자다. 위 테스트의 이론적 근거와 과학적 데이터는 'The Essential Difference: Male And Female Brains And The Truth About Autism Paperback (본질적인 차이 : 남성과 여성의 두뇌와 자폐증에 대한 진실, 2004)'가 출전으로 나와 있다. 소위 공감능력 테스트를 통해 자폐증 여부를 진단하는 도구다. 다시 말해 자폐증 진단도구로 보편적인 인간의 품성 혹은 인격 수준을 가늠하는 측정도구로 사용하기엔 부적절하다는 말이 되겠다.
여튼 사이트에서 평가의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인지적, 감정적 공감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감정이입적 공감'이라는 용어가 많이 생소하다. 결과 아래에 제시된 설명에 의하면, '감정이입적 공감'이란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것을 도와주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이는 공감과 흔히 혼동하기 쉬운 '동정(同情)'의 실천적 의미에 가깝다. 거기에 감정이입까지 덧붙이면 정신 병리적 차원의 ' ☞투사적 동일시'에 더욱 가까워진다. 출전이 되는 코엔의 저작을 굳이 찾아내어 확인해 볼만한 능력이 못되니, 섣부르게 어설픈 토를 달 수도 없는 일이다.
'감정이입'으로 번역되는 영어 'Empathy'는 주로 철학에서 논의되는 미학 차원의 개념이다. 이는 독일어 'Einfühlung'에서 나온 말이다. '어떤 대상에 자신의 감정이나 정신을 불어넣거나, 대상으로부터 느낌을 직접 받아들여 대상과 자기가 서로 통한다고 느끼는 일'을 뜻한다. 여기에서 착안하여 심리적, 철학적, 사회적 차원의 개념으로 파생된 조어가 바로 공감(Empathy)이다. 미학적 차원의 'Empathy(감정이입)'와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정 또는 정서와 관계되는 'Empathy(공감)'는 차이가 있다. 감정이입과 비슷한 개념이 심리적 방어기제로 '동일시(Identification) '가 있다. 동일시는 타인의 특정 성향이나 인격 특성을 그대로 받아들여 마치 자기인 것처럼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혹은 자기가 생각하는 특정 인격이나 성향을 대상에게 그대로 이입시켜, 대상을 마치 그 특정인인 것처럼 대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공감(共感)과 비슷한 의미로 흔히 사용하는 우리 말에는 동감(同感 ,sympathy)이 있다. 동감(同感)은 사전에,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이라고 설명한다. 사전의 설명 그대로 동감은 동일시 라기보다는 감정적 정서적 동조에 가깝다. 그 핵심은 각각 독립된 자율성과 주관과 의지를 가진 개별적인 주체로서 느끼는 감정이다. 이는 굳이 공감과 동감을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로 맥락 상 그 의미가 서로 통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상담·심리·치료 분야에서는 공감이든 동감이든 간에 이러한 일반적인 의미와 구분하여, '공감적 이해'(Empathic Understanding)라는 말로 대신한다. 이 중심에는 정서적인 면을 강조하는 칼 로저스와 인지적 측면을 강조하는 코헛이 있다. 이는 상담기법에서 중요한 치료적 위치를 차지하는 개념이다. 공감적 이해 자체만으로 치료효과가 발생하는 까닭이다.
로저스(Rogers)의 정의를 요약하면, "공감적 이해란, '감정적 요소와 의미를 다른 사람의 내적인 기준 틀(frame of reference)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공감이 상태가 아닌 과정이며 상대방의 삶을 판단하지 않고 잠시 자신의 가치들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치~처럼(as if)’이라는 인식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한다. 즉 상대방을 이해하고 느끼되, 자기감정, 주관, 가치를 그대로 유지하는 정서적, 인지적 상태가 곧, 공감적 이해다. 다시 말해,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헤아리듯이 대상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 그 대상의 감정을 헤아리고 이해하려는 능력'이 공감적 이해다. 그래서 감정이나 호불호, 취향에 휘둘리지 않고 상대에 대한 인정, 존중, 경청, 수용, 인내, 기다림이 모두 가능해진다. 가치 윤리학과 문화사회학의 토대를 세운 독일 철학자 막스 셸러('공감의 본질과 형식', 1923)도 감정 가치를 논하면서 공감을 동일시와는 다른 것으로 통찰한다.
그러고 보니 흔히들 공감의 감정을 방어기제로써 동일시,투사적 동일시, 투사, 또는 연민, 동정, 라포 등과 같은 것으로 혼용하거나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지 비슷할 뿐이다. 상대의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마치 내 감정처럼 이입하여 동일시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다른 분야에서는 어떨지는 모르나 정신분석 또는 일반적인 상담·심리치료에서 상담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피상담자에 감정이입 즉, 동일시 혹은 투사적 동일시, 투사 혹은 감정의 역전이다. 상담자의 주관과 감정이 피상담자의 정서에 엮이어 상담 관계에 개입하는 순간부터 상담을 통한 치료효과는 물 건너 가버리게 된다.
당신은 내가 될 수 없고, 나 또한 당신이 될 수는 없다. 또 당신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고 고통이 있음을 안다. 알뿐만 아니라, 당신의 모습을 통해 당신의 말을 통해 느낀다. 당신만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마치 내 일처럼,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당신의 말에 행동에 더욱 깊숙이 눈과 귀를 기울인다. 궁극적으로는 그 극복의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는 데에 있다.
이처럼 공감은 단순한 감성적 상태가 아닌, 정서적 인지적 상호작용이 복합적으로 다차원적으로 이뤄지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감정 또는 정서적으로 엄연히 분리되고 독립된 인격체로서 상대에 대한 진정한 존중과 깊은 배려가 기본으로 깔려 있다. 이게 개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치료적 관계에서의 '공감적 이해'다.
공감 혹은 연민, 동정 같은 것은 뇌에 특별한 결함이나 장애가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한다. 하지만 공감적 이해는, 부단한 자기성찰의 학습과 훈련 없이는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기술적인 영역이다. 여기서 보통 사람이라 함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부도덕한 사람, 불의한 사람, 이타적이거나 이기적인 사람, 성격의 좋고 나쁨, 기타 등등 학식이나 인품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포함되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다. 감정이나 정서는 시간이 흐르면 개인이 처한 상황과 처지, 또는 이해관계에 따라 변하는 것은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상다반사다.
이러한 공감에 대해 사회적인 면과 관련하여 잠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최근, 암울하기만 했던 우리 사회에서 단 한 사람이 바뀜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기쁨으로 바뀌는 것을 목도했다. 감동의 눈시울을 적시며 깊이 공감했다. 나는 생전 처음, 국가 기념행사 장면 중계(5.18)를 보면서 울컥하고 눈물을 흘렸다. 나중에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 유독 나만 그런게 아니다. 맹자는 '사람이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고 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자. 만약에 내게 큰 감동을 준 어떤 대상이 내 생각, 내 기대, 심지어 내 감정까지도 똑같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치자. 다시 말해 감정이입을 하거나 또는 동일시하였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내 심사, 내 정서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불현듯 알게 된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내 마음, 내 생각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도자는 책임을 떠맡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패배했다'라고 말하지, '내 부하가 패배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생텍쥐베리, '아라스로의 비행'(Flight to Arras, 1942))
자동차는 운전자나, 혹은 엔진만 갖고는 굴러가지 않는다. 국가의 경영은 규모와 범위가 우리가 알고 이해하는 상식이나 지식을 벗어나는 영역에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천만의 사람들, 그리고 수많은 나라들의 이해관계까지 복잡 다양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수많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행정가, 정치가들이 머리를 맞대어 국가 운용에 참여한다. 내 생각, 내 마음만 가지고는 나 자신은 물론, 내 자식, 내 가정조차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 세상사 대부분이 그렇다. 하물며 수천만 개인과 가족, 수많은 이해집단들의 합집합으로 이루어진 국가는 오죽하겠는가. 국가는 한 개인의 지식이나 감정 정서의 차원을 벗어난 영역이라는 말이 되겠다. 그중에서 국가 지도자는 올바른 방향을 이끄는 자로서, 책임을 떠맡은 자로서, 특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기대심리가 클수록 실망은 큰 법이다. 실망이 커질수록 신뢰의 크기만큼 배신감은 어김없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배신감이 혐오와 적대로 바뀌는 것은 시간의 문제다. 이러한 감정이 사회적 집단의 심리로 집단의 광기로 이입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사회는 특히 사회적 집단 공감이라는 차원에서, 이미 故 노 전 대통령을 경험한 바 있다. 세월호까지 겪었다. 문제는 상식적으로 알고 이해하는 공감을 감정이입이나 동일시로 오해하거나 착각하고 있는 경우다. 감정이입으로 집단적으로 형성된 사회적 공감이 정치와 맞물렸 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떻게 전개되고 변질되어 갔는지를 몸소 체험했다. 도덕과 정의 그리고 원칙과 상식을 벗어난 그릇되고 왜곡된 공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태극기 집회는 왜곡된 공감이 집약되어 나타난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설령 정치적인 혹은 사회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관여되어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더욱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볼 일이다.
봄에 땅을 일구어 씨앗을 뿌린 농부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아무리 힘들지라도 돌봄과 가꿈을 쉬지 않는다. 그것은 때가 되면 결실을 이룰 것을 알기 때문이다. 씨앗을 잘못 심지 않은 한, 콩 심은 데서 팥이 나올리는 없다. 상식을 가지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10여 년에 걸쳐 적폐로 기득권으로 쌓아 올린 마치 철옹성 같은 쓰레기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치워질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게다. 우리 사회에서 적폐의 역사는 그 뿌리가 모질고도 독하다. 심지어 그 쓰레기들은 기득권의 중심에서 여전히 악취를 풍기며, 후안무치한 갑질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실정이다. 치우는 사람이 오히려 그 악취와 쓰레기 더미에 파묻히고, 행여 해악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걱정해야 함이 마땅하겠다. 사회적 쓰레기는 힘을 합쳐 치울 일이다.
아무리 철없는 부모라 할지라도 이제 막 일어서서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에게, 위태로움에서 바로 잡아줄지언정, 왜 뜀박질을 못하냐고 다그치고 야단을 칠 부모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전폭적으로 격려하고, 지지하고 마음을 다해 돌보는 것이 마땅한 도리다.
나는 의외로 허술한 사람이라 착각이나 오해를 곧잘 한다. 행여 나는 단순히 감정이입적인 공감을 공감으로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볼일이다. 공자가 강조하는 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의미, 대동(大同)의 정신을 다시 헤아려본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로마서 8:28). 성서에 나오는 말이다. (2017.5.24)